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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자전거 평화기행

책을 씻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만나는 세책례(洗冊禮)

새로운 세상을 여는 스승과 제자의 발걸음

 [그린경제 – 육철희 기자〕“내가 요즘 일과를 정해서 새로 펴낸 《춘추(春秋)》를 읽어 왔는데 오늘에야 겨우 끝났다. 그런데 자궁(慈宮, 조선 시대 임금의 후궁 또는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부터 태어난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임금의 친어머니를 임금이나 신하들이 부르는 말)께서 내가 어렸을 때 책씻이[冊施時, 우리나라 풍속에 아동이 독서하다가 책을 다 떼면 그 부모가 음식을 차려놓고 기쁨을 표시하는데 그것을 책씻이라고 한다.] 하던 일을 생각하시고 음식상을 마련해 주셨기에 경들과 함께 맛보려고 하는 것이다.” 

위 글은 정조 23년(1799년) 12월 8일 왕조실록에 정조임금이 책씻이 곧, 어릴 때 세책례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춘추>를 읽고 난 후 그것을 기념하여 신하들과 함께 축하한 내용이다.

   
▲ 전통 세책례 모습

이와 관련한 기록으로 정약용은“임금이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음식을 준비하여 세서례를 하셨으니 임금이 시를 짓고 나로 하여금 화답 시를 짓게 하셨다.”고 하여 그의 책 여유당전서에서 왕실의 세책례에 대해 밝히고 있다. 

정조실록에 보이는 것처럼 왕실에서도 세책례를 했지만 세책례란 보통 조선시대 서당에서 책을 한 권 뗄 때마다 학동이 훈장님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전통 행사로 다른 말로는 책거리, 책씻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종이가 귀했기 때문에 종이에 직접 글을 써 책을 만들어 쓰다가 책을 다 떼게 되면 책을 물에 씻어서 말리기 위해 걸어 놓기 때문에 세책, 책씻이, 책거리라고 부른 것이다.

조선시대의 서당에서는 대개 ≪천자문(千字文) 또는 ≪유합(類合)≫으로 시작하여 ≪동몽선습(童蒙先習)≫·≪계몽편(啓蒙篇)≫·≪격몽요결(擊蒙要訣)≫을 거쳐 ≪십팔사략(十八史略)≫·≪통감(通鑑)≫·≪소학(小學)≫의 단계로 가르쳤는데 웬만큼 총명한 학동이면 12, 13세쯤에 이 초급과정을 마치게 된다.

책 한권을 떼게 되면 세책례를 하는데 경단, 송편, 국수 등 음식물을 장만하여 학동을 칭찬하며 격려하고 한편으로는 훈장님의 노고에 사례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때 장만한 음식중 둥근 경단은 하늘의 해를 본딴 것으로 온 세상을 비추는 햇빛처럼 학문으로 세상을 밝히라는 뜻이고, 오방색 송편은 인의예지신의 오륜을 뜻하는 것으로 어질고 예의있고 바르고 믿음직하며 슬기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 것이며, 국수에는 학문을 길게 이어가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 고성 이회서당 세책례 장면

떡이 아닌 차를 마시며 책거리를 하기도 했는데 예로부터 차에는 아홉가지 덕이 있어서 선비들이 자주마셨다. 제자들과 차를 나눈다는 것은 제자들을 이제는 학문을 함께하는 선비로 인정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때부터는 말투로 ‘해라’체가 아닌 ‘하게’체로 썼다.

세책례의 진행순서는 먼저 집례(오늘날의 사회자)가 학생들을 월대아래에 서게 하고 먼저 스승께 큰절로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사를 마치고 나면 학생대표가 스승께 세책례를 올리기를 청하고 이어서 바로 세책례를 시작한다.  집례가 학생들이 배강할 것을 전하면 학생들은 익힌 책을 덮고 차례대로 일어나 훈장님과 등을 지고 돌아서서 훈장님이 지정한 부분의 글을 외우고 그 풀이를 해야 한다.

모든 학생들이 배강을 마치고 나면 훈장님은 한 사람씩 앞으로 불러 총명한 학생인데 꾀를 부릴 것 같으면 부지런할 “근(勤)”, 늦잠자는 버릇이 있는 학생에게는 닭 “계(鷄)”, 똑똑함이 지나친 학생에게는 어리석을 “우(愚)”, 효성이 부족하다 싶은 학생에게는 까마귀 “오(烏)”, 성격이 급한 학생에게는 소 “우(牛)”, 지나치게 조용한 학생에게는 즐거울 “락(樂)”자 등 한글자로 표현하는 성적표인 단자수신(單字修身)을 써서 봉투에 넣어준다.

책거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새로 꺾은 회초리를 곱게 묶어서 훈장님에게 드리는 이다. 회초리는 학문을 독려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회초리처럼 곧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달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공부했던 책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요즘도 책을 공부하고 나서 고생한 학생들과 가르치느라 수고하신 선생님이 함께 그 자리를 축하하는 모임을 하거나 학기가 끝날 때 하는 종강파티가 전통적인 방식의 세책례는 아니지만 이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다.

조선시대처럼 음식물을 장만하지는 않지만 과자와 과일을 준비하여 다과회로 하거나 식당에서 밥을 함께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예전처럼 똑같지는 않지만 현재에도 그 의미만이라도 잘 살려 오늘날에 맞는 책거리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