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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백년편지 168> 나의 동생 조소앙을 그리며, 제65주년 제헌절에 쓴다 -서희경-

[그린경제 =  이나미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나의 동생 조소앙을 그리며, 제65주년 제헌절에 쓴다 -서희경-
 
    소앙, 나의 동생. 맏형 용하(趙鏞夏)다. 너와 나는 한 부모 몸에서 난 형제지만, 또한 평생 뜻을 같이 한 동지이다. 우리만 아니라 남동생 용주·용한·용원, 여동생 용제도 모두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동지들이다. 우리가 이름 모를 이역만리를 떠돌며 풍찬노숙할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얼마나 숱한 밤을 가슴 졸이며 지새웠을까. 저희 불효자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대한민국임시헌장> 1919.4.11
  이제 얼마 뒤면 예순다섯번째 제헌절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헌법을 제정한지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다. 백여 년 전 국망의 슬픔 속에서도 새 나라의 모습을 그리던 젊은 네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지금 사람들은 유진오(兪鎭午)씨가 헌법 작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1910년 나라가 망한 이래 너는 늘 독립 후 세울 새 나라의 모습을 진지하게 탐구해왔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것도, 동서양 정치사상을 폭넓게 공부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 그렇다. 모두들 가슴을 치며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울 때, 너는 한편으로 3천만 조선 백성이 살아갈 새 나라를 꿈꾸었다. 그 꿈이 1919년, 1944년「대한민국임시헌장」으로, 1948년 다시 대한민국 건국헌법으로 거듭났다.
  
  소앙, 너는 1887년 이 조선 땅에 태어났다. 나보다 5년 아래였지. 그 시대는 온통 혼란의 시대였다. 서양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동양은 어찌할 바를 몰랐어.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는 동양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고, 누구는 서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이 부딪혀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일어났지.
  
  우리 집안이 어떤 가문인가. 우리는 생육신 조려(趙旅) 선생의 17세 손이다. 삼강오륜의 정학(正學)을 지키기 위해 위정척사의 길에 나서야 마땅했다. 하지만, 나는 문명개화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어릴 때 사서삼경을 배운 나는 열네 살 무렵 신식학교 소식을 들었고, 마침내 1896년 문을 연 관립불어학교에 입학했지. 당시 프랑스공사관이 지금의 서울 정동에 있었고, 학교도 거기에 있었다. 거기서 3-4년 동안 프랑스어, 수학, 지리학을 배웠다. 나는 법률학교도 다녔고, 프랑스어뿐 아니라 영어, 독일어, 중국어까지 습득했다. 정말 세상이 다르게 보였지. 이렇게 세상이 넓고, 서양 여러 나라는 문명이 크게 발달했는데, 우리 조선은 까막눈 아닌가? 이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소앙, 나는 집에 올 때마다 아직은 어린 너에게 신학문과 세계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열 살을 갓 넘은 너는 고을에서 이미 신동으로 소문난 천재였지. 1901년, 내 나이 스물 살 되던 해 나는 대한제국의 주 독일·주 프랑스공사관 참사관으로 파견되어, 서양 세계를 처음으로 직접 보았다. 놀랐고, 부러웠고,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며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것을 담아 너에게 편지를 썼다. 책도 보내고, 너의 학업과 진로에 대해서도 말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한 너의 지식도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1902년 너는 불과 17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거기서 너는 일곱 살이나 많은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운명적으로 만났지. 어린 너는 단재 선생과 의기가 투합하여, 정부가 산림과 천택을 일본에 팔아 넘기는 일에 대해 성토문을 작성했다고 들었다. 성균관을 마친 너는 황실유학생 자격으로 1904년 일본 동경부립제1중학교에 입학했고, 다시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그 무렵 나는 나라를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는 걸 보고,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너는 한일 강제병합에 항의하기도 하고, 또 기독교로 개종했다. 나라를 되찾자면 정신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졸업 후 너는 조선으로 돌아와 잠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1913년 동생 용주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정말 오랜만의 형제간 만남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해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하와이에서 나는 박용만, 안창호 선생과 조선독립단과 한인협회를 조직했다. 1917년 서른 한 살인 너는 동생 용주와 함께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일치단결을 호소하는 「대동단결의 선언」을 기초했다. 독립운동의 길이 왜적과의 싸움이자 동지들 간의 싸움이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박용만 선생, 김좌진 장군도 동포의 손에 세상을 떠났다.
 
   1919년은 전세계 피압박민족 모두에게 희망의 해였으리라.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천상의 복음과 같았다. 한반도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물결쳤다. 그 때 소앙, 네가 주도하여 작성한「대한독립선언서」는 조선왕조를 부활하려는 ‘복벽주의’를 부정하고 ‘민주공화제’를 새 나라의 모습으로 선언했다. 백성이 주인되는 나라, 모두가 나랏일에 참여하는 나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꿈이냐. 그 꿈이 임시정부의 정치적 이상으로 뿌리내렸고,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졌다. 오늘 우리 헌법 제1조는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지난 백여 년, 한민족의 정치적 꿈은 이 한마디일 뿐이다. 내각제니 대통령제니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희미하게나마 일본의 패망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새로운 나라의 기본이념과 정책노선을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1년 「대한민국건국강령」, 1944년 「대한민국임시헌장」이 그렇게 하여 제정되었다. 너의 삼균주의는 그 기본이념이 되었다.
  
  세간에는 정치균등, 경제균등, 교육균등을 주장하는 너의 삼균주의를 들어 너무 급진적이지 않느냐는 말도 한다. 문제는 경제균등이다. 새 나라 국민이 고르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디까지 고르게 살아야 할까?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 너는 토지국유화, 주요산업.생산기관 국영화, 적산 국유화를 밝혔다. 오늘날로 보면 거의 공산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독립운동세력들 간의 이념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었다고 생각한다. 1920년대 이후 민족진영과 좌익진영의 대립이 너무 극심했지. 너는 민족진영이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면 따라올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분열된 상태로 독립이 된다면, 조국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민족상쟁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또 하나, 당시 조선 토지의 70%, 생산 기관의 85%가 일본인 소유이므로, 너는 균등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네가 공산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제3의 사회적 민주주의 국가, ‘뉴데모크라시 국가’를 꿈꿨다. 자유 시장을 인정하면서도 자본의 독점적 폐해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회는 이 둘을 잘 조화시킬 때 가능하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헌법도 그런 생각을 따랐다. 건국헌법은 자유시장의 원칙하에 대규모의 공적 기간산업이나 독점적 분야는 국유 또는 국영 부문을 폭넓게 인정했다. 공공복리를 위해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임시정부외무부장 조소앙(1925), 삼균학회 『소앙선생문집(上)』(1979)
  네가 공산주의의 실상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참석차 유럽에 간 너는 1920년 혁명 직후의 소련에도 들렀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상지이자 기지라는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자부심은 높았다. 하지만, 너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공산당과 다른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만장일치의 사회,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노동자가 주인인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얼굴이 왜 이리 어둡게 보이는가? 공산주의에 대한 그런 생각을 너는 1921년 ‘만주리선언’을 통해 밝힌 바 있다. 너는 남들처럼 혁명의 아우라에 도취하여 현실을 망각하지 않았다. 자기비판과 자기변혁을 주저하지 않았지. 그랬기에 너는 그처럼 이른 시기에 공산주의의 실상을 파헤칠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공산권의 붕괴 이후, 공산주의는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지독한 체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상 사람들이 너를 의심하는 또 하나의 거취가 있다. 너는 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는가? 해방된 조국의 첫 민주주의 선거, 1948년 5.10선거에 불참한 이유는 무엇인가? 너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분단을 영구화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1948년 3월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하지만, 너는 평양 귀환 직 후 ‘여현성명(礪峴聲明)’을 통해 “북방은 소련 코민포름 지령하에 강대한 권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한 데 대하여 우리들은 (…)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실패에 돌아간 것이다”고 북한정권의 실상을 밝히는 한편 남북협상의 실패를 솔직히 인정했다. 그리고 너는 “남한에 돌아오면서 민족진영의 재편성 내지는 대동단결의 필요성과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로 우리의 정부를 수립할 것" 을 굳게 다짐했다.(『삼천리』 1950.4.1) 때늦은 각성이었지만, 또 한 번의 자기비판과 자기변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너는 김구 선생과 결별하고 사회당을 창당했지. 또 1950년 5.30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전국최고 득표로 당선되었다. 아우야, 정말 축하한다. 제2대 국회는 1950년 6월 19일 개원되었다. 며칠 후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너는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북으로 끌려갔다. 그 뒤 네가 어떻게 눈을 감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명(命)이로구나. 너의 높은 경륜은 해방 조국을 위해 쓰이지 못하고, 그렇게 헛되이 쓰러져갔다.
  
  하지만 아우야, 대한민국은 세계가 놀란 기적을 창조했다. 네가 보았던 조국은 식민지의 고통을 겪고, 절대빈곤에 신음하던 나라였다. 조국의 상처를 보며 너는 얼마나 가슴 아파했던가. 그 대한민국이 이제 풍요롭고 자유와 번영이 넘치는 나라가 되었다. 민주공화제를 향한 너의 염원도 활짝 꽃 피었다. 너의 꿈, 아니 우리 형제자매 모두의 꿈은 헛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국의 북쪽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오늘도 압제와 빈곤에 고통 받고 있다. 우리의 남은 꿈은 그들이 하루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는 것이다. 하나된 조국이 세계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는 것이다. 조국이여, 다시 이 땅에 태어나도 영원히 너를 사랑하리라.
 
            
                                                                                  제65주년 제헌절에 형 용하가.
                                                                          
 

서희경

 학력 및 경력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대구 출생,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과 석사.박사
 토오쿄오대 동양문화연구소 방문학자
 서울대 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연세대 김대중도서관.국가관리연구원 연구교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팀장 역임
 
 대표저서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 한국헌정사, 만민공동회에서 제헌까지 
                   
    (2012)
 
 대표 논문
 한국전쟁에서의 인권과 평화(2012)
 이승만의 정치리더십 연구(2012)
 한국 헌법의 정신사(2011)
 남한과 북한 헌법 제정의 비교 연구(1947-1948)(2007)
 한계상황의 정치와 민주주의(2004)
 한국제헌국회의 정치세력 형성에 관한 연구(2004)
 War and Justice: Just Cause of the Korean War(2012)
 Atrocities before and during the Korean War(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