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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의 언문 창제 반대상소(1)

[홍사내의 세종한글 길라잡이 4]

[그린경제=홍사내 기자]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기사에는 최만리 등이 임금에게 올린 글이 온전히 실려 전한다. 당시 최고위급이자 대유학자인 최만리를 으뜸으로 하여 유학자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 새로운 글자 창제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아뢴 상소문 내용은 <훈민정음>에 기록된 서문과 해례 이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소란 신하로서 임금에게 문제점과 잘못, 또는 태도와 자세 따위를 지적하여 개선코자 할 때 올리는 글로서, 학문적 바탕을 총동원하여 글을 써야 하고, 근거와 타당성을 갖추어야 했으니, 목숨을 건 글쓰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였다고 발표하자 두 달이 지나서 올린 이 상소의 내용으로 우리는 당시 국내외 정세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되고, 학자들의 문제제기와 그들이 이해하는 글자의 장단점을 보면서 객관적 안목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 상소문이 없었다면, 세종이 이런 논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 왕권으로 밀어붙인 것이 되고, 강압적인 정책으로 새 글자의 사용은 빠르게 확대되었겠지만 여러 반대론자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며, 세종의 위대함은 그만큼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물론 한글은 지금 우리에게 산소 같은 존재로서 한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못할 정도가 되었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이 글자는 교육과 정책, 제도와 기록에서 멀리 떨어져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그럼 최만리의 주장이 무엇인지, 반대한 논리는 무엇이며, 타당성은 있는 것인지를 따져보기로 하자.

   

   ▲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치, 최만리의 상소 내용이 나와 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언문(諺文)을 제작(制作)하신 것을 보니, 지극히 신기하고 놀라워서,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여 <언문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쏟으심이 천고에 뛰어나십니다. 하오나, 신들의 구구하고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 감히 간곡한 심정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성재(聖栽)하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庚子/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千古. 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 

- 새로운 글자 이름이 ‘언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기록에서부터 모든 학자뿐만 아니라 세종까지 ‘언문’이라고 불렀으니, 아마도 그 글자를 만든 이가 세종이고 보면 이 이름도 세종이 맨 먼저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 최만리는 글자를 지은 원리를 자세히 보니 사물의 이치, 원리를 터득하지 않고는 그 깊은 원리를 밝힐 수 없는 것이라 칭송하였다. 실제로 발음의 방법과 그 모양, 소리 나는 위치, 글자의 획을 더하는 법, 우주 생성원리와의 관계, 글자를 짜 맞춰 말을 표현하는 순서와 원칙들이 인체공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흠이 없어 보였음을 실토한 것이라 본다. 

- 여기서 제작(製作)이 아니라 제작(制作)이라 표현한 것은 임금의 새 글자 공표를 더욱 높이고 공고히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한다. 

- 글자를 만들 때 처음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관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하들에게 처음 공개한 뒤에야 비로소 보고 놀라워하는 모습과, 두 달이 지나서야 살펴 평가하여 글을 올린 것을 보아 세종이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알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정의공주 등에게 연습시켜보고 의논하여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임금에게는 사관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임금의 손짓 발짓을 기록하였으나 실록에는 창제에 대한 기록이 없고, 개인 문집 등에서도 찾기 어렵다. 

“1. 우리 조선은 조종(祖宗)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큰 나라를 섬기고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랐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 전서체 글)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근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큰 나라를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 태조 이성계는 원나라를 끊고 명나라를 섬기자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듯이, 중화의 정통성과 그 제도, 학문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그렇기 위해서는 한자와 한문을 써야 하며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 글자 만든 원리의 근거를 한자의 생성 원리에 맞추어야 한다는 최만리의 생각은 매우 근시안적인 발상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세종은 여러 나라의 글자를 살펴보면서 말과 글의 상관관계를 광범위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상소를 읽은 다음 나눈 대화와 다른 일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7개국 말을 알아들었다는 신숙주를 집현전 학사로 써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찾아 13번이나 요동에 가서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여 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최만리는 글자의 필요성 보다는 명나라에 발각되면 외교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맹의 사상을 신봉하는 학문적 관점에서도 부끄럽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우리나라 말이 중국말과 다르기 때문에 중국 문자로는 도저히 우리말을 표현할 수 없음을 훈민정음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글자는 외교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고, 학문하거나 통치하는 데 매우 현실적이고 시급한 요소라고 파악하였으며, 명나라가 아무리 강대국이더라도 국가 통치를 위한 노력에 관여할 수 없는 일이라는 주체의식과 자주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 예부터 구주(九州; 중국을 중심으로 각처를 말함)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역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골(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番)이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오랑캐[夷狄]의 일이므로 말할 것이 못 됩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중화를 써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는 말은 있어도, ‘중화가 오랑캐로 변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화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 웅담이나 사향)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 말똥구리가 만든 소똥이나 말똥)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螗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 최만리가 당시 오랑캐라고 규정한 것은 중국의 관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 나라들이 왜 글자를 만들어야 했는지 이해가 빨리 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중국이 우리나라도 동이족이라고 불렀으니 오랑캐였다. 하지만 그만큼 여러 나라에서 그들의 말과 맞지 않는 한자를 쓰면서 그 나라 말에 맞는 글자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글자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몽골은 15세기에 아유시가 기존의 위구르 문자를 개량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는데, 왼쪽에서부터 세로쓰기하였다. 서하(西夏 1038∼1227)는 중국 서쪽에 있던 나라인데, 경종 이원호가 한자를 모방하여 표의 문자를 만들었는데, 서체는 해서ㆍ행서ㆍ초서ㆍ전서가 있고, 위에서 아래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썼다. 모두 6,000여 자에 이르며, 1036년에 국정(國定) 문자로 공포된 후 400여 년간 쓰였다. 여진은 만주족의 선조인 여진족을 말하는데, 금나라 태조 5년(1119)에 완안희윤이 만든 여진 대자(大字)와 희종 1년(1138)에 희종 스스로가 만든 여진 소자(小字)가 있었으며, 15세기까지 쓰이다가 사라졌다.  

일본은 8세기 말쯤부터 가나글자를 만들어 썼다. 한자를 빌려 그 일부를 생략하여 만든 가타카나(片假名)와 그 초서체를 따서 만든 히라가나(平假名)가 있다. 서번은 서쪽 오랑캐 나라인 토번, 즉 티베트를 말하는데, 8세기에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나라의 문물을 교류하며 번성하였으며, 티벳문자를 만들어 썼다. 이들의 문자를 보면 한자의 표의문자를 본뜨거나 차자(借字) 표기로서 만들어졌고, 그 원리가 체계적이지 못하여 한자를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곧 사라졌다. 일본의 가나글자는 지금도 쓰고 있으나 한자와 함께 써야 하는 절름발이 글자가 되었다. 

- 최만리의 생각은 온통 강대국인 중국(명나라)만을 향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모든 학문과 현실 외교를 생각할 때 충분히 그런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 또 단군 사당을 짓도록 명한 시절인데도 최만리는 기자를 들먹이며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 그럼에도 세종이 그런 처지를 잘 알면서도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일이 온당하다고 여긴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민심의 안정’이었다. 역성혁명을 치르면서 고려의 왕족을 전멸시키고 불교를 억압하고 절과 중을 대폭 줄이고 백성들이 부처 믿는 것을 근원적으로 막았으며 윤회사상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무시하였다. 사람에게 종교란 그리 호락호락 바뀌는 것이 아니어서 가치관의 혼란이 얼마나 컸을까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 새 왕조라고 들어서더니 왕자들이 형제간에 살육하는 아비규한 세상을 눈으로 본 백성들이다. 법과 제도가 하루아침에 바뀌고, 대국으로 섬기던 나라도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바뀌었으니 그 혼란도 엄청났을 것이다. 우선 백성의 마음을 편안케 해야 했고, 제도와 종교도 빨리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 했으며,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통의 도구, 윤활유 같은 매개체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 두 번째로 절실했던 사안은 ‘문헌의 이해’였다. 고려 때까지는 불교 경전을 외거나 유학 서적을 외거나 하면 되었지 그 내용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을 창업한 뒤 세종은 경연을 열어 날마다 유학서와 역사서를 탐구하고 논의를 거쳐 분석하면서 실천하고자 애를 썼다. 더구나 농법, 공법, 역법, 역사서 등 모든 학문 자료를 통해 실제 백성들이 활용하고 배워서 익힘으로써 실생활에 적용시켜야 하겠다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창업 초기의 혼란스런 민심을 달래고 정치와 제도가 하루빨리 바로설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중국의 사서삼경과 역사서 따위를 읽어 터득하여도 그것을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알게 하거나 소통시킬 수 없는 문자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책 내용은 이렇고 저 내용은 저렇다고 웅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방 관아에게까지 임금의 지시가 도달하려면 언제나 시간이 걸렸고, 그 결과를 다시 받아보기까지 믿을만한 사람도 없었으며, 한문 문장으로 지시하고 답을 받기에는 늘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자의 발음도 제각각이었고 통일된 글자와 발음도 없었으며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뭔가 명확하지 않아 답답하였을 것이다. 결국 쉬운 글자를 만들어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면 아무리 먼 곳이나 아무리 못배운 사람에게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자의 글자뜻과 발음을 보충 설명하기에도 좋은 도구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사대모화라는 대의명분 속에서도 풀고 가야 할 매우 시급한 과제이고, 발등에 떨어진 불같은 문제였음이 틀림없다. 

- 세 번째는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의 마음이다.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고 백성은 임금이 섬기고 길러야 할 자식이라는 생각이다. 백성이 열심히 일해서 배불리 잘 살고 세금을 잘 바치고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자식을 올바로 가르치고 길러내도록 보살펴야 하는 것이 임금의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임금은 하늘의 뜻을 잘 받들어 나라를 튼튼히 하고 오래도록 융성하도록 잘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관리들은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 부족하지 않도록 임금의 지시를 실천하고 그 결과를 임금에게 아뢰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형벌이나 공법을 형평성에 맞게 적용하고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윤리도덕을 잘 지키고 실천한 자에게 상을 주고 죄를 지었어도 함부로 처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저 중국의 것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에게 실제로 꼭 맞도록 기틀을 고치고 맞추고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자는 세종의 그런 주도면밀함에 어긋난 글자였고 그것을 바로 세우려면 새로운 글자를 잘 만들어 쉽게 쓸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