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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전 재산 백성 구휼과 의병 지원에 쏟은 명가"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18)] 예천 연안이씨 별좌공 종가

[그린경제/ 얼레빗=김영조기자] 경북 예천 송곡리의 사고(沙皐) 이덕창(李德昌1569~1616) 별좌공 종택을 찾아 가던 날은 함박눈이 펑펑 내려 자동차들이 설설 기던 날이었다. 평소 예천은 갈 기회가 없었는데 벼르고 별러 찾아 나선 길이 빙판길이라 조심조심 찾아 갔다.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 별좌공 종택에 이르렀을 때는 눈은 뚝 그치고 하늘은 마치 비 갠 뒤의 날씨처럼 높고 푸르렀다. 

내려 와도 별로 들려 줄 이야기가 없는데…….”라며 찾아뵙기 전 나눈 전화 통화 너머에서 바튼 기침 소리를 내던 이의선 종손 어르신은 불편한 몸으로 기자의 방문에 대문을 활짝 열고 반겨 주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앞마당 위쪽에는 오래된 고택 한 채가 버티고 있었다

   
▲ 별좌공(사고) 종택 전경
 
   
▲ 이응 선생 후손 이태형 공이 지은 병인양요 당시의 의병기록 동야일기


의병장으로 적을 토벌하고 주검 못 찾아 의관 거두어 장사 지내
 

이유(李愈)는 자가 자흠이요 호를 매촌(梅村)이라 하는데, 연안인(延安人)인으로 예천 출생이다. 가정 임오에 형제가 함께 진사가 되고 퇴계문하가 되었다. 4개의 읍을 다스려 치적을 쌓고 임진년에 용궁(龍宮) 현감으로 부임하자 군사를 모아 외적에 대항하였다. 난리를 만나 뿔뿔이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였다. 겨우 수백에 지나지 않는 군사였지만 용궁 정재령(政在嶺)은 나라의 주요 보급로로써 이를 반드시 지켜야할 책임이 막중한 바 죽을 각오로 임하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의 목을 벤 다음 보급로를 열었다. 다시 예천의 병장으로 지방의 도둑떼를 잡아 온 고을이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질서를 잡아나갔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는 진충보국한 공으로 포상하였다.” 

이는 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퇴계이황 선생의 언행록, 묘갈명, 도산급문제현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음)에 기록된 중종 17년 임오(1522)생 매촌(梅村) 이유(李愈) 선생의 이야기다. 또 국조실기(國朝實記)에도 용궁현감 이유(李愈)는 적병과 더불어 교전하여 많은 적의 머리를 노획하였으며 경상감사 백암 김인이 포상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예천읍지(醴泉邑誌, 이동표 펴냄)에는 이유(李愈)는 의병장으로서 많은 적을 물리치고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니 주검을 찾을 수 없어 그 의관을 거두어 장례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유(李愈)선생의 동생 이응(李應)공의 아들이 바로 사고(沙皐) 이덕창(李德昌1569~1616) 선생이며 지금의 종손 이의선 선생은 그로부터 14세손이다. 이덕창 공의 아버지 눌헌(訥軒) 이응(李應1536~1597) 선생은 퇴계 이황의 제자다. 천부적인 재질에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한 결과 선조 때 생원이 되었고, 당시 쟁쟁한 퇴계의 제자 중에서도 이응(李應)의 깊은 학력을 누구도 따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경상도관찰사는 이응(李應)의 학문이 넓고 깊으며, 행실이 고상하다 하여 벼슬에 추천, 통례원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왕도 정치 이념을 가진 이응(李應)으로서는 벼슬아치들의 당파 싸움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 무릉정 모습/국학자료진흥원 제공

   
▲ 무릉정 편액

그 뒤 안동의 절강 뒤 도수골에 무릉정(武陵亭)을 짓고, 성리학 연구와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이때 동문수학 하던 학봉 김성일, 월천 조목 등과 사귀면서 시국과 정치와 학문을 논하며 산림학파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고, 왜적과 싸우다 맏형 이유(李愈)와 둘째 형인 이희(李憙)가 잇달아 순국하게 되자, 이응(李應)은 비탄과 울분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 뒤 경상도 관찰사 이관징이 이응(李應)의 학덕을 기리어 송곡리에 사곡사(沙谷祠)라는 사당을 지어주었고, 후손이 그 곁에 무릉정을 옮겨 지어 그가 남긴 덕을 기리고 있다.  

이리저리 오가며 바쁜 중에 부끄러이(東奔西傃愧栖栖)
도처에서 사람 만나 머리를 낮추네(到處逢人首盡低)
신선 사는 곳에는 절경이 많다던데(聞說仙源多勝絶)
공의 삶 따르고자 주계에서 빌고프네(欲隨公住祝朱雞) 

이 시는 이응(李應) 공의 벗들이 무릉정(武陵亭)에서 지은 시다. 그리고 이응(李應)의 아들 이덕창(李德昌)은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선조 때 약관의 나이에 과거 급제하여 상주판관(尙州判官)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내자시정(內資寺正궁중의 식품, 피륙, 의식 등의 일을 맡아보던 정3품 당하관의 벼슬)에 제수됐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선대가 자리하던 옛터에 집을 세우고 안채 대청에 사고구려(沙皐舊廬사고의 옛집)’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는 마흔일곱 살로 삶을 마쳤고, 충효를 모두 갖춘 뛰어난 인물로 추앙받던 이덕창(李德昌)이 갑자기 숨을 거두자 많은 사람이 애통해 했다고 전한다. 


구한말 이정기 선생 전 재산 풀어 구휼 후 차용증서 모두 불태워
'비라이어른'의 후덕함 칭송 집 뒷산을 '활인봉(活人峰)'으로 바꿔 불러 

   
▲ 활인봉으로 불렸던 사고종택 뒷편 건지산

   
▲ 사랑채 대청에 붙은 '긍구헌' 편액

사고 이덕창(李德昌) 공의 후손으로 비라이어른으로 불린 이정기(李鼎基) 선생을 빼 놓을 수 없다. 이르기를 송곡 뒷산 건지산을 활인봉(活人峰)’이라 한 것은 이 연안이씨 이정기(李鼎基) 어른의 후덕함을 칭송하여 부른 것이라 전한다.(斂荒隨力賑恤窮交貧族賴而擧火. 例擧不逞列枚所居後山稱活人峰其或受賜威恩者相呼識不忘故耶善慶之理宜享完局而)”라고 전 성균관장 권중해 선생은 말했다. 얼마나 별좌공 종가의 구휼이 훌륭했으면 멀쩡한 산 이름을 놔두고 활인봉(活人峰)’이라고 바꿔 불렀을까?  

대한제국 말기의 신돌석(申乭石) 의병장은 송곡 뒷산 부근을 지날 때마다 특히 저 산 밑에는 활인(活人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살림)하는 분이 산다. 어려운 사람은 저 산 아래로 찾아가고 부정한 사람은 부근을 다닐 때 조심하여 다니라.”는 당부를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또 이러한 여러 가지 후덕함이 소문나서 구한말 불한당조차도 이 부근을 지날 때에는 조심하며, “비라이어른 잠깨실라 발자국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골골마다 전해왔다. 

흔히 비라이어른으로 통했다는 이정기(李鼎基)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 흉년이 겹치고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를 당하자 전 재산을 구휼과 의병지원에 힘쓰느라 그 흔한 저택하나 짓는 것마저 삼갔다. 이후 자손이 욕심을 내어 송사를 일으킬까 저어하여 사람들을 모아 갖고 있던 산더미 같은 차용증서와 금전거래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하니 이분의 구휼 정신이야말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종손 이의선 선생, 종택의 밭 마을사람 힘닿는 대로 지어먹으라고 내놔 

   
▲ 종손 이의선 선생

 

호명면 사고막골의 야산을 배경으로 이덕창(李德昌) 공이 지은 사고(沙皐) 종택은 선조 때인 1598~1600년에 지어 나이가 400살이 넘는 오래된 고택이다. 현재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채와 사당, 대문채 3동이 모두 남향이며 대문간에서 본채까지의 넓은 마당은 경사가 졌고 그 위에 다시 이중으로 축대를 쌓아서 본채를 앉혔다. 본채와 대문채 사이엔 기와집이 여러 채 있었는데 돌보지 않는 사이에 무너져 내려 헐려버렸다. 하지만 이 지역 사대부가의 모습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고, 특히 조선 중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집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는 평가다. 한때는 안동의 큰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예천의 손꼽히는 선비로 이 집을 지켰을 사고종택은 지금은 건물 세 동만 남긴 채 쓸쓸히 서 있다. 

눌헌 이응(李應) 공의 14세손인 이의선(80) 선생은 현재 대문채에서 혼자 외롭게 종택을 지키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을 하면서도 굳건히 종택을 지키는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이의선 선생은 지금도 책 읽기를 좋아하여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을 때가 많다고 한다. 특히 책을 읽다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생기면 서울 국립중앙도서관까지 찾아가 자료를 찾아 확인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조상인 사고 이덕창 공으로부터 내리물림 한 것인지 모른다. 현재 이의선 선생은 종택의 밭들을 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힘이 닿을 만큼 지어먹으라고 모두 내놓았다고 한다. 고조할아버지 이정기 선생을 닮았음인가?  

이의선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고택을 둘러보기 위해 마당으로 나오니 겨울바람이 몹시 차다.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고택 사랑채로 오르니 부엉이 한 마리가 푸드덕 먼지를 일으키고 날아간다. 안채로 들어서니 퇴락한 건물이 안쓰러울 정도로 옛 영화를 세월의 무게에 내준 채 고즈넉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요새 그 흔한 종가집 체험 프로그램이라도 했으면 고택이 더 이상 퇴락하지는 않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안고 집 모퉁이로 돌아가 보았다. 

   
▲ 밥 짓는 연기가 나면 쌀이 없어 며칠이고 굶주리는 이웃이 속상해 할까봐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구례 운조루, 나주 남파고택처럼 나눔을 실천했던 종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낮은 굴뚝이 있다. 밥 짓는 연기가 나면 쌀이 없어 며칠이고 굶주리는 이웃이 속상해 할까봐 굴뚝을 낮췄다는 바로 그 낮은 굴뚝이다. 별좌공 종택도 예외가 아니다. 안채 대청에 사고구려(沙皐舊廬사고의 옛집’, 사랑채 대청엔 긍구헌(肯構軒)’이라고 쓰인 편액이 붙었는데 원본 편액들은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수탁되어 있고, 지금 붙어 있는 것은 원본을 본떠 만들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상당수의 종택에서 귀중한 편액과 각종 문헌 등을 도둑맞은 것처럼 사고종택에도 많은 문헌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불편한 몸인데도 기자를 위해 종택의 철학과 나누고 베풀었던 조상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던 종손 이의선 선생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선생이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사고종택의 주인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