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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100년 전 설립 백산상회, 상해 임시정부 비밀 자금줄로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19) 백산 안희제 종가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종가의 역사는 짧을지 몰라도 백산 안희제 종가를 빠뜨리면 안 됩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서 백산 선생이 차지하는 부분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나라 안에서 모은 독립운동자금의 많은 부분은 선생의 손을 통해서 상해임시정부에 건네졌으니 선생을 빼놓고는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수 없지요.”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 광복회 경북지부장은 종가 취재에 백산종가를 빼놓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차린 뒤 비밀리에 상해로 돈을 빼돌려 독립자금을 댄 백산 선생이야말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분이었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 백산 안희제 선생

 

  
             ▲ 백산 선생 생가


양정의숙 재학 때 민족교육 운동을 시작, 여러 학교를 설립하며 교육운동 


“새는 한가로움을 좋아하여 골짜기만 찾아드는데(鳥欲有閑尋僻谷)
해는 편벽되기를 싫어하여 중천에서 광채를 더한다.(日慊偏照到中天)“
 


위 시는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 8. 4∼1943. 8. 3) 선생이 17살 때 의령군아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지은 시다. 선생은 가장 먼저 시를 써내 군수로부터 칭찬를 받고 후한 상을 받았다. 이 시를 보면 이미 백산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민족을 위한 큰 인물임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음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집안의 형인 안익제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9살이던 1903년 7월에는 당시 영남의 유명한 유학자들과 섬진강 부근을 유람하며, 32수의 한시를 지어 《남유일록(南遊日錄)》에 남겼다.
 

  

                                        ▲ 백산 선생이 19살 때 지은 한시집 남유록


하지만 이 무렵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 같았다. 을사늑약으로 국권까지 빼앗기자 선생은 집안 어른들에게 신학문을 배울 뜻을 밝혔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옛 책을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제대로 된 공맹(孔孟)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 속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양정의숙(養正義塾)으로 전학하여 전통 한학의 바탕 위에 서양의 선진 학문을 보태나갔다. 이 때 선생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겨레의 기둥이 될 청소년의 교육이 시급한 일임을 깨달았다.  


선생은 이 같은 깨달음으로 양정의숙에 재학 중이던 1907년 “교남학우회(橋南學友會)”를 조직하여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보태고, 방학 동안에는 순회강연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벌여 항일 민족의식을 드높였다. 나아가 선생은 1908년 영남지방의 뜻 있는 이들과 “교남교육회(橋南敎育會)”를 만들어 잡지 발행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펼치면서 학교를 세우기 위한 교육재원의 확보에 힘썼다.

그 결과 1907년에는 동래 구포(龜浦)에 “구명(龜明)학교”, 의령에 “의신(宜新)학교”를 세웠고, 1908년에는 자신의 고향인 입산리에 “창남(刱南)학교”를 세워 민족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을 해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19년 11월 선생은 뜻 있는 이들과 더불어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만들고 똑똑한 청소년을 뽑아 나라 안팎에 유학시켜 조국 광복과 민족국가 건설의 인재로 기르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독립자금 나라 안 조달창구 “백산상회” 설립 


백산 선생은 1911년 봄 일본에 견학 간다는 소문을 퍼뜨려 일제의 눈을 따돌리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안창호·이갑·신채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조국 광복의 길을 의논한 뒤, 모스크바로 가 있으면서 국제정세를 살피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찾았다. 그러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라 안팎 독립운동세력의 유기적인 정보 연락망을 갖추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나라 안 조직망이 필요하다고 깨닫고 국내로 잠입해 작업에 착수하였다.
 

  
                   ▲ 독립운동의 자금줄 백산상회 모습

  

                   ▲ 백산상회가 한 광고



국내로 들어온 선생은 일제의 눈초리를 피해 구체적인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유리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선생은 1916년 무렵 고향의 논밭 2천 마지기를 팔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뜻 있는 이들과 함께 부산 중앙동에 포목과 건어물 따위를 파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세워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소규모였던 상회는 1917년 합자회사로 바꾸고 1918년이 되자 주식회사로 전환했는데 이때 중요 출자자는 안희제, 경주 최부자집 주손 최준, 경상우도관찰사를 지낸 윤필은의 아들 윤현태였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독립운동자금을 위한 나라 안 독립운동기지로 삼기 위해 영남지역 지주들이 여럿 참여해 조직한 대규모 무역회사였다. 백산 선생은 2,560주를 가진 최대주주였지만 최준 선생이 취체역 사장을 맡았다. 그것은 백산 선생이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가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는데 온힘을 쏟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자금은 회사의 손익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지원해야 했기에 결손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걸 알고 있는 주주들은 1921년 한 차례, 1923년 두 차례나 자금을 보태 자금 위기를 막아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은 장부거래 형식을 띄었기 때문에 일본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고 귀국하여 경교장으로 온 김구 선생은 최준 선생을 불러 독립자금 지원에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독립운동자금 장부를 보여주었다. 이때 최준 선생이 준 자금이 고스란히 장부에 적혀있는 것을 보고 최준 선생은 백산 선생을 생각하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최준 선생이 백산 선생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금 가운데 일부는 여비나 활동자금으로 썼으려니 생각했던 것이 못내 죄스러웠던 것이다. 그만큼 백산 선생은 독립운동에 자금을 완벽하게 관리했고 선생이 있었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외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맹활약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1926년 동지들과 함께 인수하여 중외일보로 명의를 변경하여 발행하였다. 이때부터 1931년 6월 종간할 때까지 선생은 중외일보에서 사장, 발행인 겸 편집인 등으로 활동하면서 잦은 압수와 정간처분 등 일제의 언론 탄압을 뿌리치고 젊은 기자들과 편집진의 항일 언론투쟁을 지원하였다. 
 

  

         ▲ 중외일보 1928년 12월 6일자 사설. 이를 빌미삼아 조선총독부는 중외일보를 정간했다


때문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중외일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일반적으로 그 논조는 총독부의 시정을 비난, 공격하고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조선이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풍자하고, 매사를 편견과 중상을 바탕으로 한 집필을 강행함으로써 멋모르는 민중으로 하여금 총독정치를 오해하게 하였다.”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농사짓게 하다  


이후 선생은 국내에서의 사업을 서서히 정리하는 한편,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발해의 옛 서울인 만주 동경성 일대 땅을 사서 1933년 물길을 만들고, 발해농장(渤海農場)을 설립했다. 리고는 고향에서 일제의 수탈에 쫓겨 만주로 혈혈단신 이주해온 300여호의 이주민들에게 5년 동안 나누어 갚는 조건으로 땅을 나눠줌으로써 가난 구제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2세 교육을 위해 농장지역에 “발해보통학교” 세우고, 백산 선생이 직접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가르쳤다. 


때마침 1934년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과 대종교 총본사가 발해농장 지역인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선생은 대종교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것은 선생이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통해 발해농장 한인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드높임은 물론 종교의 힘을 빌려 조국 광복의 역군으로 기르기 위함이었다.  


이후 선생은 신병 치료 차 귀향해 있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만주 복단강성 경무청으로 이송 수감되었다. 여기에서 선생은 일경으로부터 9달 동안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 뒤 1943년 8월 3일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출감한지 3시간 만에 목단강성 영제의원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산상회를 설립한 할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국민이 잊지 말았으면 


백산 선생이 부산 중구 동광동에 백산상회를 설립한지 100돌을 맞는 2014년 갑오년 백산 선생의 손자인 안경하(73) 광복회 부산시지부장의 감회는 남다르다. 그는 “조국독립을 위해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투쟁한 할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부산시민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 백산 선생의 손자 안경하 광복회 부산지부장


그런데 조선의 독립운동사에 우뚝 선 독립운동가의 기념관이 초라하다. 백산기념관은 백산상회 자리에 지난 1995년 세워진 것인데 작은 건물로 백산 선생을 기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지하 형태의 전시실에 선생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니 이는 우리 모두가 부끄러울 일이다.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사업 그리고 가난구제를 모두 해낸 위대한 백산 안희제 선생, 그 배달겨레의 영원한 영웅을 기리는 번듯한 기념관이 세워질 날을 고대하며 나는 우울하게 기념관을 빠져 나왔다.

  
                     ▲ 경남 의령에 있는 백산 안희제 추모비(의령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