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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내의 세종한글 길라잡이

막동이 이도가 태어나던 날

[홍사내의 세종한글 길라잡이 12]

[그린경제/얼레빗 = 홍사내 기자]  세종은 1397년 아버지 이방원이 31세 때 낳은 셋째아들이다. 태조 6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에 한양 준수방 태종의 잠저에서 낳았다. 세종 이도(李祹)가 태어나니 맨 처음 막동이라 불렀다. 이때는 할아버지 이성계가 태조 임금이었을 때이고 조선이 창업하여 5년이 흐른 때이다. 그 5년은 실로 피로 얼룩진 세월이 아닐 수 없었다. 고려 왕족인 왕씨는 온 나라를 뒤져 살육하였고, 고려 때 벼슬을 한 자들도 무참히 죽임을 당하였다. 《고려왕조실록》 등 모든 기록은 곳곳에서 불살라졌으며 고려가 세웠던 수많은 유적들도 뽑히고 무너지고 했을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이 몸살을 앓고 민심 또한 불안한 세월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 세종은 600여년 만에 자신이 살던 잠저에 오자 감회가 서린듯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고 쓰인 표지석을 어루만졌다. (세종탄신일 행사에서 세종으로 분한 김영종 종로구청장) ⓒ김영조

그 이듬해엔 아버지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거사에 성공하였는데, 아버지에 의해 아버지의 형제 가운데 방번, 방석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뒤 하륜(河崙)·이거이(李居易) 등 심복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한 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형인 방과가 세자가 되었으니 이가 곧 정종(定宗)이다. 이후 정종과 그의 정비 정안왕후(定安王后) 사이에 소생이 없자,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과 방간은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싸였다.  

이때 공신 책정 문제로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방간을 충동질하여 정종 2년 1월 방원과 방간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이 싸움은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며 이로써 아버지 이방원은 왕위에 올랐으니 세종이 4살 때의 일이다. 막동이(세종)가 태어난 지 3년 만에 두 번씩이나 아버지가 그 형제들과 동족상잔의 참극을 벌였던 것이다.  

이때 어머니 원경왕후는 종 김소근을 시켜 방간을 쫓으라 하였고, 방간이 묘련 북동에서 마전 갈림길로 나와서 보국동으로 들어가다가 김소근에게 잡혀 무릎을 꿇었으며 갑옷을 벗고 교서를 받아 난이 평정되었다. 이때 정안공(태종)의 집 말이 화살을 맞고 제 마굿간으로 돌아왔는데, 부인이 놀라 짐작하기를 싸움에 패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싸움터에 가서 지아비와 함께 죽으려 하여 걸어서 나가니, 시녀들이 만류하여 간신히 막았다고 한다. 
 

이에 앞서 난이 일어날 즈음 정안공이 말을 타고 나가자, 부인이 무당들을 불러 승부를 물었다.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하였다. 이웃에 정사파(淨祀婆)라는 점쟁이가 사는데, 그 이름은 가야지라 하였다. 역시 그에게 부인이 이르기를, “어제 밤 새벽녘 꿈에, 내가 한양 옛집에 있다가 보니, 해가 공중에 있었는데, 아기 막동이가 둥근 해 바퀴 가운데에 앉아 있었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니, 정사파가 판단하기를, “정안공이 마땅히 왕이 되어서 항상 이 아기를 안아 줄 징조입니다.” 하였다. 부인이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한 일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하며, 정사파를 제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때에 이르러 정사파가 이겼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고하니, 부인이 그제서야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정종실록》 2년 1월 28일 기사 참조) 이 꿈이야기는 달리 해석해 본다면, 정안공 이방원이 임금이 되리라는 것을 예견한 기록이거니와, 막동이가 임금자리를 물려받아 세상을 밝게 비출 조짐의 꿈이었음을 기록코자 했던 사관(史官)의 의도 또한 읽을 수 있다. 이때 어린 세종은 피비릿내 나는 아버지의 체취를 느꼈을까? 

그럼 여기서 아기 이도가 태어났을 때 집안 어른은 누가 있었나 재미삼아 살펴보자.

할아버지 이성계는 63살로 임금이었고, 큰아버지는 셋이 있었으니 첫째 큰아버지(방우)는 4년 전에 죽었고, 둘째 큰아버지(방과)는 41살, 셋째 큰아버지(방의)는 37(?)살, 넷째 큰아버지(방간)는 34살, 아버지(방원)는 31살, 첫째 작은아버지(방연)는 28(?)살, 첫째 고모(경신공주)는 22(?)살, 둘째 고모(경선공주)는 19(?)살, 배다른 셋째 고모(경순공주)는 18(?)살, 배다른 작은아버지 방번과 방석은 17살, 16살였다. 또한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큰형 양녕은 4살, 작은형 효녕은 2살이었다.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는 아버지 이방원보다 두 살 위였다.  

이와 같이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던 정치 상황과 왕권을 둘러싼 형제들의 유혈 난동 속에서 억조창생을 염원하는 조정과 백성들에게 가장 적합한 인물이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세종 곧 이도였고, 유일한 해답을 손에 쥔 해결사가 이도였음을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