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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과 수단이 많이도 멀어져버린 한국

세월호 침몰 사고에 부쳐

[그린경제/얼레빗 = 고리들 기자]  어쩌다 한국은 삶의 목적과 수단이 많이도 멀어져버렸다. 지금의 한국 성인들 대다수는 자신의 꿈을 키워볼 기회도 없이 성적을 올리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공부를 왜 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더 잘하느냐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분위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가난했던 국가였기에 그런 면도 있다. 이유는 있었지만 목적보다 수단에 급급한 정신은 돈을 왜 버느냐보다는 어떻게 더 많이 버느냐로 자연스럽게 이행한다.  

모든 사람이 소중하며 그 사람이 살고 다니기에 건물과 다리를 더 튼튼하게 짓는 것이 중요한데 돈을 생각하면 공기를 앞당기고 철근을 빼거나, 배와 트럭에 과적을 하며 이윤을 더 남기는 것에 관심이 간다. 과거에도 지금도 일부 탁월한 여건을 갖춘 이들을 빼고는 제도권 내의 학생들이 왜 세상은 이런 모습인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사랑에 빠질 환경을 만나본 적이 없다. 왜보다는 그냥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에 더 매달렸다.  

공부보다는 공부하는 척이 더 힘들다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학년별로 정해지는 단계별 학습은 극소수에게나 맞는다. 사람들은 원래 다양하게 태어나며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부모에게 자란다. 그런데 어떻게 몇 교과서와 정해진 진도 속에서 그들의 호기심과 배워가는 맛을 지킬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교실에는 공부가 저절로 되는 애들보다 공부를 하는 척하는 애들이 점점 많아졌다. 공부로맨스를 사라지게 하는 학습 커리큘럼 문제는 다음 칼럼으로 미루고, 우선 세월호 선장이 더 위험한 구간에서까지 왜 3등 항해사에게 배를 몰게 했는가를 생각해보자 

   
 

성적의 경쟁, 부자가 되려는 경쟁은 왜?(Why) 사는가 보다는 어떻게(How) 더 잘 사는가에 관심을 갖게 했다. 고액의 연봉을 받는 취직이나 학벌이 좋은 곳에서의 인맥의 형성을 목표로 성적을 올리다보면 자신의 일상적 삶을 사랑하는 법까지 잊어버릴 수가 있다. 목적을 위해 일상을 희생하다보면 목적을 이룬 뒤에도 계속 그 다음 목표를 위해 일상을 희생하는 중독에 빠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10대 기간 전부를 그렇게 보내면 두뇌는 늘 일상의 행복과 미래의 가상적 보람의 접점을 찾는 것에 실패할 수 있다. 예전에는 자기의 적성이나 꿈보다는 성적순으로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고등학교가 훨씬 많았다. 필자가 퇴학을 당한 후에 자퇴 처리한 광주 인성고에는 유독 서울대 농대생이 많았다. 그렇게 인원수를 채우고 현수막과 신문에는 서울대 00명 합격이라고 써서 내걸었다.  

그런 경우가 어디 인성고만의 전략이었을 것인가! 서울대 법대에 간 ㅇㅇㅇ 후배도 학교의 권유에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는 영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와 학교의 설득에 넘어가 법대에 갔다. 그는 고시에 계속 떨어지다가 지금은 영한번역출판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가 혹시 고시에 합격했어도 그는 판사가 아니라 월급쟁이가 되었을 것이다.  

더 사랑하는 일이 늘 다른 곳에 있다면 그는 프로도 아마추어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자기의 꿈과 적성보다 성적순으로 대학을 가고 전공을 정하였다가 그 전공에 맞는 직장에 배치되어서, 자기 일을 사랑하는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일을 좋아도 하고 또 잘하기도 해서 돈을 버는 프로도 아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한 사회에 프로도 아마추어도 아닌 그저 월급쟁이의 비율이 높으면 곳곳에서 사건사고가 많이 터진다. 월급이 목적이면 감봉을 당할 위험이 없는 작은 변수들과 큰 원칙에 점점 소홀해져서 통찰력과 직관력(순발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 한국은 왜 미국의 NSC 같은 유사시 일괄적 재난 구제 시스템이 지금 없을까?) 선박의 안전점검을 하는 사람들이 그냥 보통의 월급쟁이였더라도 그나마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서류만 믿고 안전점검을 급하게 승인하는 서명을 해주고, 화물 과적을 허용하고, 안개 속에 위험한 출항을 눈감아주고 급행료를 받는 월급쟁이였을지 모른다.  

의사의 수입보다 피를 묻히며 환자를 돌보는 바쁜 일상을 사랑하는 의사와 배를 사랑하고 배의 키잡이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키를 잡는 것 자체를 즐기는 선장은 얼마나 될까?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승진을 포기하고 평교사로 은퇴할 맘을 먹는 타고난 스승은 얼마나 될까? 참배움학교연구회 회장 김두루한 국어 선생님이 학회에서 말했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걱정하는 일에 소홀해져야 승진에 유리합니다. 교사가 행정업무 위주로 점수경쟁을 하려면 수업과 상담에 신경 쓰기 어렵죠.”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는 적성이 아니라 당장 돈벌이가 중요했고 자식들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이 행복이었다. 가난하다가 부자가 되면 여전히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열등감 때문에 여기저기 자랑을 하고 싶어졌다. 검은 중형 승용차를 무리해서 사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이 여전히 그런 상처 입은 시대의 정신상태에 살면 희망이 없다. 오히려 저렇게 재난을 수습하는 일들이 많아질 것이고 위기에서 비겁해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4월 18일 오후 대구시 중구 계산 성당에서 엄마와 딸이 ‘세월호’침몰사고로 실종된 승객들의 무사생환을 기원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다.

돈과 권력과 명예라는 목적을 위해 자기 영혼을 구속한다면 일상의 작은 행복이 사라진다. 그렇게 삶의 로맨스가 줄어든다면 늘 작은 것들은 놓치게 되면서 부하들과 아이들이 상처받게 된다. 그리고 하인리히 법칙에 걸려든다. 하인리히 법칙은 하나의 큰 사고가 터지기 전에 29번의 꽤 심각한 위험한 사고와 300번의 사소한 실수가 일어난다는 법칙이다. 테레사 수녀는 천한 사람은 있어도 천한 직업은 없다고 했다. 어떤 직업을 수행하는 일상에서 일하는 과정보다 돈벌이를 사랑하게 되면 바로 천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마음과 영혼이 가난해지면 감각이 무뎌지면서 통찰력과 직관력이 줄어들어서 300번의 실수는 그냥 넘어갈 문제가 되고 29번의 위험까지 무시하면서 큰 재난을 향해 간다. 그러면서 월급만은 꼬박꼬박 잘 받게 된다. 큰 재난을 막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의 일상보다 돈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부 자체보다 공부로 얻을 것을 보면서 현재의 직업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과 신입직장인의 적성과 전공 불일치도는 77%였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성인의 74.4%가 자아정체감이 혼란스럽거나 거의 없다는 조사이다. 자아정체감이 부족하면 자존감이 줄어들어서 자꾸 남들과 견주게 된다. 정체감의 부족은 먼저 타인과 비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이어서 열등감으로 이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더 좋은 브랜드와 더 좋은 학벌과 더 좋은 직장과 더 높은 월급이 자신의 정체성에 필수라고 믿는 사람이 된다.  

이런 결과는 우리 가정과 학교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는 위계적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 하브루타 방식의 수평적 토론과 소통이 부족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나이가 어리고 지위가 낮아 자기표현이 억압받으면 곧 자아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스스로 표현하지 않으면 자기가 사라진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것은 표현과 정체성에도 적용된다.  

노키아가 망한 이유는 과장급 이하의 직원들이 스마트폰을 개발하자는 주장을 부장급 이상이 자기가 받는 연봉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단기적 성과(돈벌이)에 관심이 쏠리면서 그 제안을 거부해서이다. LG2001년 초기 아이패드를 먼저 만들고도 계속 개발하지 않아서 애플에게 이름도 흥행도 모두 빼앗겼다.  

아놀드 토인비가 지적한 기득권의 오만, 성공경험의 오만 때문에 우리 한국이 얼마나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을까? 교과서적이라는 말의 어감이 여러분들에게는 어떻게 들리는가? 그동안의 부모와 상사와 교사와 교과서들은 토론과 자기표현을 억압해왔다. 그렇게 우리들의 두뇌는 자아 정체성을 잃어갔다. 

요즘도 술자리에서 집안 자랑과 자식의 성적 자랑과 학벌 자랑이 주요 얘깃거리인 사람이 종종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내가 왕년에~’를 외치거나 자기의 꿈이나 업적이 아닌 집안이나 친척의 자랑을 하거나 자신의 고민 대신에 자식의 학벌과 대기업 취직을 자랑하는 사람이 성심성의껏 사회에 공헌과 봉사와 기부를 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돈이 많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은근히 자랑하는 사람들이 시원하게 밥값과 술값을 내는 경우도 드물다. 지위가 올라가면서 우쭐거리는 상사가 회사나 부하들이나 고객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경우도 거의 없다. 저들은 Why에 대한, 왜 사는지에 대한 자아 정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