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한글 그리고 우리말

수몰된 황해벌[판-黃海平原]의 원시 동방문화 존재가능성

시원 곧소리[proto ortho phonetic phoneme 정음소] 기원의 추적 1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첫머리  

우리의 역사문화 전통은 대륙과 해양문화가 교차하는 동아시아 정자[] 교차로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은 빙하기 이전 유우라시아대륙 문화가 상호 교류되고 집산되었으며 신대륙 문화의 발산지였다. 그러나 일제항쟁기[식민 지배]의 반도사관[반도 이남에 국한]으로 그 활동 강역이 찌들어 들고 말았다. 여기에다 북방 대륙문화가 아사달곳[한반도]으로 유입되었다가 다시 일본 열도로 이동했다는 일본열도 종착론에 통째로 편입되고 말았다.  

이에 반해 민족진영에서는 일제의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곧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뿌리가 같다는 논리)에 맞서야 할 필요성에 따라 당연히 단일민족과 반만년 역사를 강조하였다. 특이한 점은 민족사관이든 반도사관이든 우리역사 무대에서 일어났던 타민족 역사[여진과 거란 등]는 아예 제외시켜버리고 교린적 시각보다는 복속, 지배나 타도의 대상으로만 치부했다. 지나친 순혈[純血]주의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21세기 이동슬기정보시대에 접어들면서 통일을 달성해야하고 또 한류현상에서 목격하듯이 순혈주의보다는 두루누리퍼짐새[국제적 보편활]를 감안해야 필요가 있다. 순혈주의도 문제려니와 배척과 투쟁에 주력하는 유물사관 그리고 종속적 반도사관은 시대정신을 외면하는 것이므로 모두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앉고 있다.  

인류가 출현한 시기의 원시 문화장과 아사달곳[한반도]을 넘어 동아시아 대륙 전체와 세계적 시각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곳이 빙하기 황해벌[]이다. 지금은 해저 평원[sea plain]이지만 빙하기에는 이 지역이 벌판이었으며 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의 역사 문화원형과 문화장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이 점을 소홀이 하고 심지어 제외시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갑골문은 동이족 산물인데 우리민족사에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과 중국 대륙에서 발흥한 은나라의 문자이므로 한자의 기원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어떤 한 민족의 선조보다는 원시 시대에는 동일 지역의 동일 유전인자가 혼혈된 민족이므로 동방문화의 시원의 하나로 보아 공통 기원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쟁점사항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수몰된 황해벌[]지대  

빙하기가 절정이었던 시기 황해는 육지이고 벌판[평원]이었다. 주위로는 요하, 황하, 장강, 한강으로부터 강물이 흘러 들어오고 초원지대가 펼쳐졌다.(지도참조). 북쪽으로는 빙하지대이고 그 아래로는 툰트라와 극한 랭 사막지대가 전개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은 사냥이나 주거가 용이치 않았다.

   
 

그러나 황해벌에 펼쳐진 들판[平原]에는 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사냥은 물론 때로는 농경이 가능한 환경이었다. 이곳에 원시 동방문화 존재 가능성이 조심스레 검토되는 이유이다. 

 

황해 벌[]의 자연환경 

황해 벌에서 현생 인류가 출현한 시기인 3-12천 년 전이다. 해수면이 다시 낮아지고 18,000년 전 마지막 빙히시기에는 최고조에 달해 180미터에 이르렀다. 강수로는 황해벌[] 중심부를 관통하고 남해와 동중국해로 흘러들었다. 해빙되면서 해수면이 다시 상승하여 8천 년 전 이후 오늘날과 같은 황해가 형성되었다.

 

   
 

이에 대해 윤순옥 교수는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황해와 동중국해는 바다가 후퇴해 곳곳에 사막이 펼쳐진 육지였고, 차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넓게 펼쳐진 초원 위를 매머드(mammoth, 480만 년 전부터 4천 년 전까지 존재했던 포유류)가 무리 지어 돌아다녔다. 제주도를 포함한 아사달곳[한반도]과 일본열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일부가 됐다.[윤순옥 황상일 한국지형학회지'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최종빙기 최성기 자연환경']

   
 
자료출처-구석기 길라잡이(손보기 1996 연세대학교 출판부)지도
 

황해의 수심 분포 퇴적물 분포 비교 

빙하시기 황해의 퇴적물 분포와 수로의 유량은 한반도에서 유입되는 수량에 의하여 주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면 당시 황하는 산동돌곳(산동반도)의 지형에 막혀 산동돌곳 밑으로 흘렀으며 장강의 위치도 지금보다 올라와 있었다. 황하와 장강에서 유입되는 토사의 양은 아사달곳 지역에서 유입되는 토사량과 거의 비슷했다. 물론 지도면적으로 추산한 것이지만  당시의 기후상황은 매우 건조하고 한랭하여 강수로에 유입되는 유량도 적었을 것이다. 

.

   
 

동방 인종의 이동경로 

인종 이동경로를 보면 황해벌판 초원지대에는 동남아 순다대륙(말레이시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으로 이어진 거대한 평원을 말한다)에서 이동해온 하플로 C그룹과 O 그룹이 정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에 의하여 원시 황해벌 동방문화가 시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박홍석 유전체연구단장은 "네안데르탈인과 교잡해 후손이 계속 생겨났다는 것은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가 별개 종이라기보다는 아종(亞種, 분류상의 한 단계) 수준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동방 지역에는 현생 인류 이전 약 20만 년 전 금오산인[요령성 출토]이 발굴되었다. 이들은 황해벌 동방인종과 데미소바인의 그리고 유럽의 네인데르탈인의 선주민이었다. 이들은 경로는 아사돌곳[한반도]과 만주 및 일본열도에는 모계 지손족(웅족/호족이)은 중동에서 인도와 순다대륙을 거쳐 중국대륙과 황해륙 북부에서 있다가 시베리아로 진출하고 일부는 신대륙으로 진출하였다. (흑색) 한편 부계 혈통은 인도 대륙에서 순다대륙을 거쳐 황해륙으로 이동되었다가 다시 중국 북부를 거쳐 티벳쪽으로 이동했으며 일부는 해안선을 끼고 신대륙까지 진출했다.

 

   
 

한편 미토 콘트리아 유전인자를 가진 모계 혈통 D,F,V의 유전인자는 북방지역으로 이동해 왔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신대륙으로 이동했다. 20만 년 전 금오산인[요령성]들이었다. 또 일부는 시베리아[데미쇼바인]] 유럽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모두 현생 인류와 반듯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전인자들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소로리 볍씨와 파종 농법의 시작 

빙하기가 물러나면서 수몰되자 파종 농업과 가축 유목을 가지고 중국 동원지역과 아사돌곳 지대의 육상으로 이동하면서 신석기 문화혁명을 주도했다. 구체적으로 15,000년 전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볍씨가 발굴되었다. 이를 완화종[이융조, 1998]이라 했다. 야생종과 재배벼의 중간이었다. 10,500년 전에는 양자강 남방에서 발굴되었다. 재배벼에 장립형(Oryza sativa L)과 단립형(OryzaglaberrimaSteud)으로 구분된다

   
 

소로리 볍씨는 농업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 관계 수로와 농기구를 이용하기 이전 단순히 종자를 뿌려 놓고 수확하는 농법이었다. 원시적 단순 채집 농법에서 주기적 파종농법을 구사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진보였다 여전히 수렵이 주력이었으나 토기를 이용하여 종자를 보관하고 씨를 뿌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 돌아오는 이동성농법을 터득했다. 진일보 한 농법이었다. 구석기 시대의 채집 경제로부터 신석기 시대의 생산경제로 발전함을 뜻한다.  

 

태양과 별의 관측 -수리학과 천문학의 기원 

홍수가 강가를 휩쓸고 지나가며 많은 기름진 흙을 남겨 놓았고, 그 땅에는 씨만 뿌리면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의 범람이 매우 큰 사건이었다. 강이 넘쳐흐르는 때를 알아내야만 했고 이동시기의 방향을 파악해야 했다. 별과 태양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항해벌과 아사돌 곳에서 윷과 윷판이 나타났고 윷경과 28수 별자리로 발전했다. 윷경은 또한 중국 동원족[동이족]의 하도낙서의 기원이 되었다.

 

   
 

.황해벌 지역의 원시 문화의 존재 가능성 

터키 중심부 멜렌디즈강 연안의 아시클리휘위크 마을은 목가적인 시냇물과 인상적인 화산지형이 공존하는 곳으로 동물의 가축화(animal domestication)의 초기형태를 보여주는 곳으로 꼽혀 왔다. 1400~1100년에 곡물, , 견과류가 집중적으로 재배됐다. 그 지층 아랫부분에서는 염소, 들소, 사슴, 양과 같은 대형동물은 물론, 토끼, 거북이,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의 뼈가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양(50% 미만)이었다.  

이곳은 토질이 비옥하여 작물재배에 이상적이기 때문에, 초기 농민들은 이곳에 눌러앉아 정착촌을 건설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다가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 단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먼 곳으로 사냥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짐승의 고기는 그들의 식단에서 여전히 중요한 메뉴였기 때문에, 농경생활을 한다고 해서 고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같은 사냥과 농경 간의 스케줄 갈등을 조정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야생의 양을 잡아다가 우리안에서 사육하는 것이다. 가축 사육의 기원을 이해하게 해 준다. 농경생활로 인해 이동하지 못하게 되자 비교적 온순한 동물을 선택하여 길들이기 시작했고, 거듭된 돌연변이와 선택을 통해 마침내 오늘날의 가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은 언제, 어떻게 가축이 되었을까?[ Michael Balter 2013 ] 

정회수(2006)는 한중 해양공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컬럼에서 황해 해저 평원에 '황해 문명'이 존재했으리라 가정했다. 이의 근거는 중국 웨이밍 박사(2005) 가 황해 평원에서의 인류문명 발상 연구논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 황해 평원에서의 인류문명의 번영 이동 등에 관한 학설과 인류거주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문명수준 보다는 문화의 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면 확실한 직접적 증거가 보다는 동쪽[중국 대륙 동원)과 서쪽 [아사돌곳]에 나타나는 문화적 상황에 따른 추론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사달곳의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 중국 동원지역의 갑골문과 28수 등은 모두 황해벌[]에서 기원했겠지만 간접적 추론이지 직접적 증거는 아니다. 어쨌든 아사돌곳 지역과 중국 동원지역은 원시 동방문화에서 기원한 황해벌 문화로 보고자한다

이 지역은 메소포타미아처럼 사막으로 둘러쌓여있으며 강 유역으로 형성 되어있어 빙하기 직후부터 원시문화가 발생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었었다고 본다. 해빙이 되면서 항해 벌판은 수몰되었지만 황해동선 남북 각 연안 각 지역에 신석기 문화를 뿌려주는 모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씨뿌리는 농법이 등장하면서 신구대륙에는 신석기 문화가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이중에서 요하-황하-장강-한강 유역에 벼를 재배하는 소로리인이 등장했으며 파종농법이 전파되고 양자강 유역으로도 전해졌다. 이는 황해 벌이 원시 동방문화의 기원지였음을 뜻한다
 

맺음 - 동방 문명의 기원, 황해벌 문화

인류문명은 단방성 보다는 원시시대부터는 쌍방성이었다.

 

   
 

지금까지는 동방문명은 황화문명이 주력으로 생각해 왔으나 황화 문명보다 이른 시기에 요하 문명은 물론 송화강 유역에 이른 시기에 토기 제작이 있었으며 유럽은 물론 제주 고산리 토기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모두 쌍방향성 이었음을 의미한다.

황해벌 지대에는 그 이외도 악율악기와 세계 최초의 목선 유물도 발굴되었다. 모두 6~9천 년 전 동방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는 시원 곧소리[정음]악율 언어가 동방지역에서 최초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며 목선은 해양진출의 중거를 뜻한다. 아직 황해벌에서 출수 출토된 직접적 유물이 없어 가설 수준이다 보다 상세한 기술은 다음을 기약한다. (1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