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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현판, 8월 15일 1시간 동안 한글이었다

[외침]엉터리 복원논리와 한자 맹신 문화재청은 각성해야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광화문’ 현판 글씨를 한글로 표기하느냐, 한자(光化門)로 표기하느냐의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을 떼어내고 새로 만들어 내건 한자 현판이 쩍쩍 갈라지면서 한글 현판을 주장하는 이들의 외침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광화문’이란 현판을 처음으로 내건 이는 세종이었고 한글이 반포되기 한참 전인 1426년이었고 당연히 한자 현판이었다.  

광화문 건물은 태조 4년인 1395년에 완공되었으나 이때는 남쪽의 문이라 하여 오문(午門) 또는 정문(正門)이라 불렀다. 그로부터 31년이 흐른 세종 8년(1426년)에 이르러서야 현판이 걸렸다. 물론 이때까지 현판이 아예 없었던 것인지 다른 현판이 있었는데 그걸 바꾼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1426년 음력 10월 26일에 세종은 집현전 수찬에게 명하여 근정전 앞 셋째 문을 광화라 하고, 궁성 동쪽을 건춘, 서쪽을 영추라 하여 각각 광화문(光化門) , 건춘문(建春門), 영추문(迎秋門)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때는 한글 창제 전이기도 하고 관습에 따라 한자 현판을 내건 것이다. 태조 4년 10월 기록에서 “뒤에 광화문이라 불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세종 때부터 광화문이라 부른 것을 세종 사후 실록 편찬자들이 앞뒤 맥락을 살펴 그렇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럼 세종은 왜 ‘광화문’이라 했을까? 그것은 ‘정문’으로서의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정문’으로서의 의미는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나온다. 태조 4년(1395년) 10월 7일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정문에 대해 말하기를, “천자(중국 황제)와 제후(작은 나라의 임금)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하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임금이 신하와 백성에게 알리는 교지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헐뜯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아뢴 뒤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하였다. 

곧 정문은 임금이 백성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문으로 임금의 바른 정치와 신하들의 올바른 충성과 백성들의 바른 삶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문인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은 이런 정문의 의미가 빛이 환하게 비추어 바른 곳을 향하는 곳으로 보고 그런 비유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광화’라 이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광화문’은 조선의 상징이었고 실제 그런 정문의 세상을 연 세종의 바른 정치의 상징이고 꿈이었다.  

세종은 그런 빛나는 꿈을 위해 백성들과 소통하고 음악을 바로 정리하고 천문을 바로잡고 문자를 바로 세우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간악한 일제는 이런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두 번에 걸쳐 맘껏 능욕하고 유린했다. 첫 번째는 임진 전쟁 때 일본 침략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일본 침략을 막아 낸 이순신장군 동상이 광화문 광장에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이렇게 전쟁으로 없어진 광화문을 1864년(고종 1)에 와서야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으나 일제는 1927년에 광화문을 아예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역사적 정기를 끊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25전쟁 때 폭격으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 뒤 1968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철근 구조로 복원하여 자신이 쓴 한글 현판을 내걸었다. 그러나 위치도 도로 사정으로 뒤쪽으로 밀려났다.  

드디어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과 이전 공사가 시작되었고 2010년 8월에 완공되어 광화문은 잔혹한 아픈 역사를 딛고 이제 21세기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문으로 새롭게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잘못된 복원 논리에 의해 한자 현판이 내걸렸다. 그러나 원형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논리대로 따진다면 당연히 세종 때 글씨로 복원해야 하는데 고종 때 중건하면서 당시 훈련대장이 쓴 글씨를 찾아내건 것은 분명한 논리로의 복원은 아닌 엉터리인 것이다.  

현판 글씨는 역사성과 시대성을 함께 담아야만 한다. 광화문은 태조 때 세운 것이지만 세종은 현판을 통해 그 의미를 더욱 살리고 더욱 높였는데 그것이 현판의 존재 이유이고 현판의 본래 의미다. 광화문 자체가 하드웨어라면 현판은 소프트웨어이다.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에 의해 그 의미와 가치가 주어진다. 당연히 ‘광화문’ 현판은 세종의 정신과 21세기의 의미를 담아 대한민국 최고 브랜드인 한글로 적어야 하는 것은 역사의 대세요, 기본 진리이다.  

이런 현판의 본질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한자 맹신주의자와 현판의 문화재 가치와 역동성에 무지한 자들이 비생산적인 복원 논리를 내세웠다. 현판 자체에 복원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현판의 글씨는 역사성과 시대성을 동시에 부여해야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 따져 그것을 살려 나가야 하는데 덜 중요한 것에 몰입하는 것은 잘못된 보수 논리와 현판에 대한 무지와 문자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이 바람에 교황 방문으로 대한민국 최고 브랜드인 한글과 세종의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기회를 무참히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엉뚱하게 중국 속국이었다는 역사성에 대한 오해만 더하는 꼴이 되었다.  

이런 안타까운 광화문의 비극을 8월 16일 프란체스코 교황 시복식 하루 만이라도 바로잡겠다고 나선 이들에 의해 시복식이 열리기 하루 전, 한 시간 동안 한글 현판이 내걸리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 8월15일 광복절 아침 7시부터 1시간 동안 한글 펼침막으로 한자현판을 가린 광화문 현판 모습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 이대로 제공)

8월 15일 광복절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이었다. 이 일을 주도한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는 8월 13일 다음과 같이 문화재청에 긴급 제안을 했다. 

문화재청장님께 긴급 제안.

안녕하십니까?
오는 8월 16일 서울 광화문 앞 광장에서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체스코 교황이 시복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첨부한 사진과 같이 한자로 된 광화문 현판이 십자가와 함께 온 세계로 보도되어 세계 수십억 명이 그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많은 세계인들이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의 속국으로 알고 있는데 그 보도를 보는 외국인들은 아직도 우리나라가 중국 한자를 쓰는 나라로 여기거나, 우리 글자가 없는 미개한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 한글을 가진 자주문화국가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며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한글을 사랑하는 국민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행사를 하는 하루만이라도 첨부한 그림과 같은 ‘광화문’이란 한글 현수막으로 ‘門化光’이란 한자 현판을 가리면 조그만 노력과 비용으로 우리겨레의 최고 문화유산인 한글을 온 세계에 널리 홍보되어 우리가 문화국가임을 알리고 국가 위상을 높일 수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국민의 뜻과 소리를 문화재청장님께 알리며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이 일은 한자현판을 떼거나 훼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비용은 우리가 부담하고 시행할 것입니다.

                                                                            2014년 8월 13일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
 

이런 취지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들도 무척 공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은 현판 크기와 똑같이 정성들여 제작한 한글 현수막으로 가렸다가 행사가 끝나면 떼는 방식이라 문화재 훼손도 아닐뿐더러 대한민국의 가치를 전 세계 10억 명에게 홍보할 수 있는 기회라 더욱 공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문 처리 과정은 촉박한 시간에 비해 더뎠다. 기중기를 미리 대기하고 공문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한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 몇몇 운동원들은 미리 걸고 양해를 구할 양으로 광복절인 15일 오전 7시께 기중기로 19m 가까이 올라가 한자 현판을 ‘광화문’이라는 한글로 된 덮개로 덮은 것이다.  

한 시간 쯤 지나 이 사실을 알아챈 현장 관계자들에 의해 ‘광화문’ 한글 덮개는 철거되고 다시 한자 현판으로 되돌아갔다. 한 시간의 한글 천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 문자를 사용하는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홍보할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속절없이 날아갔다.

   
▲ 광복절 아침 8시 무렵에 누군가가 광화문 한자현판을 가린 한글 펼침막을 떼내고 있다.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 이대로 제공)

뒤늦게 받은 문화재청 답변은 이러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귀 단체의 관심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의 한글을 세계에 알려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것은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 규정에 따라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청은 광화문 현판 글씨의 경우 사회 각층의 여론조사, 공청회, 토론회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수차례의 관계전문가 자문회의, 문화재위원회 등을 통해 현판 제작 기준 시점인 고종 중건 당시의 현판 원형에 맞도록 한자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울러 2014년 08월 15일 오전 7시 경에 발생한 광화문 현판에 ‘광화문’ 한글 현수막 불법설치 사건에 대해서는 현재 경복궁을 관리하고 있는 경복궁관리소에서 관계법에 따라 조치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기타 궁금하신 사항은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 (042-481-4774)에게 연락주시면 성실히 답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화재청 문화재활용국 궁능문화재과 
 

   
▲ 시복식 하는 동안 안타깝게도 광화문 현판은 한자였고, 이런 장면은 언론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하여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상징이자 자부심인 한글, 대한민국이 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알릴 수 있는 기회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의 이판정 은 이번 거사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저는 해외 사업을 많이 하다 보니 외국인을 많이 만납니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한국을 아직도 중국의 속국정도로 생각하고 한자를 많이 사용하는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로 자랑하지만 실제 외국인들은 한글 자체를 모릅니다. 어떤 이는 한국어는 한자를 알아야 배울 수 있는 무척 어려운 언어로 알고 배우는 것을 꺼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터에 자연스럽게 전 세계인에게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한글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왜 놓쳤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한국은 한글이 세계 으뜸 글자라고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임금 세종이 태어난 곳을 기념관 하나 없이 방치하고 있다. 그에 더하여 대한민국 상징의 하나인 광화문 현판을 한자로 고집하는 몽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건대 문화재청이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기관이라면 무엇이 진정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일인지를 깊이 고민하고 하루 속히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고쳐주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