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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복원, 기존 실측자료 무시했다

광화문과 현판의 역사복원 문제(2)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문화재청에서는 사진 촬영술에 의하여 현판규격을 정하였다고 하였으나 33과 22cm의 오차가 나왔다.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다. 광화문 복원에서 목제 문루(門樓)가 복원되고 2010년 준공식을 했지만 문화재 복원에 대한 신뢰가 급속히 추락하는 상황에서 목제 문루 복원에도 의구심이 들고 있다. 전체적 모습에서 어딘가에 불 안정한 모습과 비례의 불균형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목조 건축은 치수에 기반을 둔 디지털자료가 기본이지만 전제적 균형은 어림셈 수치에 기반을 둔 아날로그 비례 수치다.  

조선의 목수를 대표하는 대목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일인 건축 기사 실측 도면을 참고했다고 했지만 무너진 동편 광화문에서 실측 수치를 찾아냈던 고 강봉진 씨의 자료에 대한 언급이 없다. 강 씨는 불타서 무너진 광화문 문루의 흙더미에서 주춧돌의 정확한 위치와 기둥 간격을 확인하여 이를 콘크리트 복원에 그대로 적용했다고 한다. 복원된 문루가 비교적 안정되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이 때문으로 판단된다.  

콘크리트를 떡 주무르듯 한 사나이로 평가 받은 구일옥 씨의 장인 정신이 더해 진 결과 목재의 질감을 잘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콘크리트 문루와 석축 3예문을 갈가리 찢어 해체하는 과정에서 1861년에 사용했던 석축재의 재사용이나 강 씨가 실측한 정확한 차수를 재확인 했는지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더구나 준공 이후 감리 보고도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세세한 수치(디지털)보다는 전체의 비례와 균형(아날로그)을 파악하기 위하여 3D 레이저 측량을 해야 한다. 독재자의 흔적을 지우려고 콘크리트 복원 건물을 갈가리 찢어 놓고 규격미달 복제 현판을 걸어놓은 것도 문제지만 복원 기술자들의 장인 정신을 무시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고려자기 기술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장인들을 기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말  

콘크리트 광화문 복원에 대해 처음 언급한 기사는 1966217일자 동아 일보에 나타난다. 건춘문에서 허물어진 상태로 있는 광화문을 원래 자리로 옮기는 계획이라고 발표된 것이다. 더불어 돈의문(서대문)도 함께 복원 하겠다고 보도되었다.  

그렇지만 엇갈린 계획이 양쪽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시 건설 당국자는 68년도 예산으로 12천만 원을 들여 광화문을 현 중앙청 정문으로 복원키로 했다고 밝혔다. 설계와 계획이 이미 끝났으며 건물은 콘크리트로 복원될 것이라고 했다. 한편 문화재 관리국은 이미 7천만 원 예산으로 3개년에 걸쳐 목조 조영을 하여, 현재의 자리에 그대로 복원해 종합 박물관 정문으로 사용할 계획이라 했다. (조선일보 1967119일자)  

당시 "콘크리트 계획은 한마디로 언어도단"이라며 반발도 했지만 또 일각에서는 광화문의 완벽한 재현보다는 '실제 활용'에 비중을 두어 원래의 제자리 찾기를 지적했다. 논란 끝에 중앙청 건물 앞에 콘트리트로 복원키로 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의중이 깊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 복원된 위치는 1861년 목제 광화문 보다 뒤로 14.5미터 후퇴하고 방향은 3.5도 틀어진 것이었다. 중앙청을 가리는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뒷날 중앙청이 헐리고 난 뒤 원래의 위치로 복귀해야 한다는 명분을 주게 되었다.
 

고 건축가 강봉진(1917~사망) 씨의 실측과 콘크리트 설계  


   
▲ 한국일보 1968년 3월 19일 치 "석축의 잔해서 옛모습 더듬어" 기사

   
▲ 1965년 복원 이전 광화문. 문루는 없고 삼예문만 남았다.

1968319일자 한국일보에는 콘크리트 복원 공사에 대한 석축의 잔해서 옛모습 더듬어란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에는 설계에 앞서야 하는 일은 광화문(光化門)의 원형(原形)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원래의 자리에서 일본 사람들이 옮긴 광화문은 6.25때 문루(門樓)가 불타버리고 석축(石築)만 남아 있어서 정확한 '제모습'을 알기가 어려웠다. 강 씨는 우선 석축만 남은 잔해의 실측을 시작했다. 석축(石築- 삼예 통문) 위에는 옛기와 조각, 지붕에서 무너져 내린 흙이 30트럭이나 쌓여 있었다. 

흙을 치우고 나니 문루(門樓) 기둥의 주춧돌이 나타났다. 넷씩, 세줄, 12개의 주춧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또 상층 우주(上層隅柱)의 주춧돌도 그대로 있었다. 이 주춧돌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상측 정간(正間, 네 기둥 중 가운데 두 기둥 사이)28.13(), 양협간(兩夾衣間, 정간을 뺀 바깥쪽 기둥과 바깥쪽 기둥 사이)21.63, 편간(鞭間(?), 측면 세 기둥의 기둥과 기둥 사이)12.13척였다. 이 실측에서 지금 남아 있는 주춧돌은 원래의 자리에서 3~10'밀리'가량 물러난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기능과 구조가 다른 3예문(三霓門)과 문루(門樓)를 구분했다. 또 이 실측 자료야 말로 복원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 "콘크리트를 찰떡처럼 주무른 사나이" <센데이서울> 1968년 12월 8일

그뿐만 아니라 선데이서울 196812월 8일 치에 보면 공사현장 기술주임 구일옥(具一鈺) 씨의 대담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는 콘크리트를 찰떡처럼 주무른 사나이,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는 26라는 제목이다. 또 경향신문 201082일 치 기사에는 당시 광화문 공사의 대목장 도편수의 증언이 실려 있다.  

한국전쟁 때 불탄 뒤 1968년 중건 때 콘크리트로 지었던 문루를 금강송 목재로 되살렸어요. 일제 조선총독부 청사에 맞춰 비뚤어졌던 위치도 바로잡았어요. 목조 건물의 웅장함과 힘차게 뻗어 올라간 처마 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증과 실측, 그리고 경험이지요. 한 번 고치려면 자재와 인력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완벽하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라면서 고증과 실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건춘문 북평으로 옮겨진 1927 무렵 광화문의 삼예문의 모습. 비례가 절묘해 보인다.

   
▲ 콘크리트로 복원한 광화문 - 1968 12월 11일


콘크리트 복원 설계자와 시공자의 정신마저
지워선 안 된다

글쓴이는 조선목수의 공법과 소질은 믿고 있다. 개인적으로 피난시절 목수이셨던 중부님이 지은 바라크 집 굽은 상량목이 60년이 지나도 아직도 성성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목장은 처지는 것을 감안해 약간 올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비례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고증과 실측에서 중요한 자료가 빠트려진 심증을 지울 수기 없다. 목조문루와 석출 3예문으로 복원된 광화문은 어쩐지 어색하다. 헤벌어지고 졸렬해 보이기도 한다.


   
▲ 어쩐지 어색한 목조 문루로 복원한 광화문 (사진 조판형 기자)

미래의 보수와 수선과 그리고 추가물 설치가 필요하다. 자료 확보를 위해 3D 레이저 측량은 필수적이다. 지적 공사에서는 문화재에 대해 이미 23건의 3D 측량 사례가 있다. 따라서 공사 뒤 감리를 위해서도 그리고 가치평가를 위해서도 정밀 측량이 필요하다. 특히 3D 측량으로 건물 전체의 비례를 살펴야 한다. 아래에 그 그림은 그 원리를 나타낸다 


   
▲ 3D 레이저 측량과 비례 파악 개념

 

다음은 문루에 설치했던 인경종[人定鍾]과 오고[午鼓]에 대하여 기술하려고 한다. (140908 술봉)

  목조 문루는 언젠가는 보수와 수선과 그리고 추가물을 설치해야 한다 이러 추가 지료 확보를 위해서도 3D 레이저 측량은 필수적이다. 지적 공사에서는 문화재에 대해 이미 23건의 3D 측량 사례가 있다,

콘크리트 복원 건물을 무조건 철거 하는 것은 승자의 역사 지우기 일 수 있지만 치열했던 콘크리트 복원 설계자와 시공자의 정신마저 지우려 해서는 아니 된다. 독재자의 흔적을 지우려고 콘크리트 복원 건물을 갈가리 찢어 놓고 규격미달 복제 현판을 걸어 놓은 것도 문제지만 설계 기술자들의 장인정신을 무시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고려자기의 기술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장인들을 기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분의 자료를 발굴해서 기록하고 평가해야 하며 보존 초치도 취해야 한다. 설계와 시공 기술자들의 흔적과 실측 자료를 발굴하여 보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독자들의 제보가 필요하다. 실패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래 콘크리트로 복원한 광화문을 보면 단아하고 고졸한 맛을 풍기는 모습이다. 이는 설계자와 시공자의 각고의 노력 끝에 재창조된 결과일 것이다. 또 위 삼예문 사진과 견주어 보면 매우 닮았다. 정확한 실측의 결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