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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서관 사서들은 처세술책만 읽나?

2015년 서울도서관이 함께 읽고 싶은 책 32권 선정을 보고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작심 3일이란 말이 있다. 새해 첫날 굳은 결심이 슬슬 풀리지는 않는지 단단히 자신을 점검할 시간이다. 수많은 자기 다짐이 있겠지만 책 읽기만한 것이 또 있을까? 이러한 사람들을 겨냥해서인지 서울도서관에서는 12일자 보도자료에서 새해 맞아 서울도서관 사서들이 시민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32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 보도자료에 따르면 사회과학 7, 인문과학 9, 어문학 16권을 합해 모두 32권을 뽑았으며 이 책들은 12일부터 131일까지 서울도서관에서 전시한다고 밝히고 있다. 


   
▲ “새해 맞아 서울도서관 사서들이 시민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32권”을 선정했다고 밝힌 서울도서관 보도자료

 어떤 책들이 뽑혔나? 면면을 보니 제목부터 낯설고 작가 이름을 보니 더욱 낯선 것이 많다. 먼저 사서들이 고른 책을 한국작가와 외국작가로 나눠보았다. 사서들이 고른 총 32권 가운데 한국인 작가가 쓴 것은 18권이고 외국인이 쓴 것은 14권이다. 책을 고르면서 동서양을 골고루 안배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용을 보자. 사서들이 고른 책을 샅샅이 훑어보고 나름대로 분류해보니, 심리, 처세류가 17, 역사 일반류가 6, 먹거리 1, 소설, 여행기 따위를 포함해 분류하기 어려운 기타를 합친 것이 7권이다. 이렇게 보면 단연 처세술이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처세술을 몇 권 보자. <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 리처드브로디 지음>, <적을 내편으로 만드는 유쾌한 소통 기술, 조너선헤링 지음>, <원씽, 게리겔러 지음> 같은 외국 책이 많이 눈에 띈다. 물론 <사람 vs 사람, 정혜신 지음><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혜민 지음>과 같은 국내 지은이의 책도 들어 있으나 전반적으로 사서들이 고른 심리나 처세를 다룬 책은 서양 책이 많다. 


   
▲ 서울도서관 누리집 첫화면

기타류로 분류해본 책에는 예전에 일본에서 펴내 일본인의 눈물샘을 자아내게 했던 <우동 한그릇>도 눈에 띈다. 추천사를 보면 이 책은 가족이 함께 읽기에 적당한 책이다. 19891쇄를 찍었고 200257쇄까지 출간된 스테디셀러다. 우동집 주인이 손님을 배려하는 마음, 감동 외에 배려에 대한 교훈도 얻을 수 있다. 분량도 길이 않아서 금세 읽을 수 있다.”  

일본어가 전공인 내가 <우동 한그릇, 一杯のかけそば>이란 책 이름을 보니 이 책의 원본을 교재 삼아 대학에서 강의 한 경험이 생각난다. 작가인 구리료헤이(栗良平, 60)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기대 이상의 인기몰이를 하는 바람에 영화로까지 만들어지는 등 한때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군 이 책은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큰 인기는 얻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일본의 젊은 세대는 제국주의 팽창 일로를 걷다가 1945년 패전이후 잿더미에서 부흥을 이룬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동 한그릇의 쓰디쓴 경험을 하지 않은 세대에겐 그것이 그리 슬프게 다가오지 않는 법이다. 이건 일본의 젊은이들이나 한국의 젊은이들 모두 마찬가지다.  

더구나 당시 유명 방송인이 우동 한그릇에 나오는 세모자(母子)150엔으로 우동을 한그릇 사 먹을 돈이면 인스턴트 우동을 3개 살 돈이라고 꼬집는 발언을 한데다가 뭐 이깟 일로 일본이 집단 눈물바다(のファシズム)고 힐난하는 닛칸겐다이(日刊ゲンダイ)” 보도 이후 <우동 한그릇>의 인기는 급강하했다. 물론 이런 외적인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가난 속에서 꽃핀 순애보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물씬풍기는 이런 류는 시대를 초월해서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 쌔고쌘 책 가운데 서울도서관 사서들이 고른 32권 속에 당당히 들어 있지 않은가?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동 한그릇>이 뽑혔다거나 처세술책류가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015년이 어떤 해냐? 라는 것을 짚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올해는 당장 선열들이 목숨 바친 만세의 함성이 있던 95주년 3.1절을 앞두고 있으며 광복 70, 전봉준 서거와 명성황후 시해 120, 을사늑약 110, 안중근 의사 서거와 일제 강제병탄 105, 광복군 창설 75, 한국전쟁 65, 사월혁명 55, 한일협정 50, 긴급조치 9호 선포 40, 광주 5.18시민항쟁 35년 등등 우리 겨레의 지고지난한 굴곡의 역사가 옹이 박힌 채 각 마디마다 기억해주길 기다리는 해가 아닌가?  

이러한 질곡의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우리 겨레는 굽힐 줄 모르는 용기와 불굴의 의지로 삶을 지탱해 왔으며 역사를 개척해 왔다. 그렇다면 32권 가운데는 이러한 질곡의 순간을 살아 낸 선열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어 있는 책 한권쯤은 들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련이 없음

사서들에게 애시당초 그런 주문은 무리인줄 알지만 이번 서울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32권 가운데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오월> 같은 책이 눈에 띄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제 나라 선열들이 밑바닥 삶을 살며 일제에 압제를 받아야 했던 사실은 눈감은 채 미국의 경제 대공황으로 전 세계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파리와 런던에서 경험한 접시 닦이와 부랑자 생활을 다룬작품이라며 추천사를 올리는 것이 그렇다.  

또한 <도서관의 가치와 사서직의 의미, Michael Gorman 지음> 같은 책을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더욱이 저자가 공직생활을 하면서 직접 겪은 이야기이자 학술논문 자료를 집어넣은 책이라고 추천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손정목 지음> 같은 책은 일반 독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최근에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 김자동 지음>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남의 나라 상해에 차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고난에 찬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읽기도 쉬운 편이다. 32권 속에 이런 책 한권을 추천하는 사서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제 아무리 살기가 팍팍하다고 해서 시류의 유행일 뿐인 처세술만을 좋은 책으로 꼽는 자세는 고쳐야 할 것이다. 한때 ‘웰이라해서 온갖 먹거리 관련 책이 책방을 도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웰빙의 시대가 가고 이제는 힐링의 시대라고 난리다. 거기에 처세술까지 거든다. 모두 한때 유행일 뿐이다. 

사서들은 일반인들보다 좋은 책을 많이 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책에 쏟는 열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균형있는 감각으로 책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5년 새해를 처세술투성이로 우리의 영혼을 채우길 바라는 서울도서관의 새해 읽었으면 하는 32권 책 선정은 그런 뜻에서 좀 편향된 책들로 가득 차있는 느낌이다.  

나라가 망했는데 500년 사직을 지켜온 조선에서 이에 대한 반성을 하는 사람 하나 없으면 어찌 후손을 볼 것인가라며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 1855-1910)이 지은 시를 사서들은 읽어 보기나 했는지 묻고 싶다. <매천야록>에 나오는 시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