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소통] 정신은 정암 조광조로 이어져 세종의 정치는 민본(民本)의 생민정신으로 나타나 누구나 자기의 재능을 나타내 일의 보람을 통한 업 정신을 가진 생민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처지를 면하고, ‘곳곳에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끊어져서 각기 생생하는 즐거움[生生之樂]을 이루도록 할 것’을 바라는 정치를 폈다. (《세종실록》5/7/3) “노비는 비록 천민(賤民)이나 하늘이 낸 백성 곧 천민(天民)이 아닌 이가 없다.(《세종실록》26/윤7/24)는 세종의 생민 사상은 모든 사람은 다 같다는 ‘하늘 백성’ 정신으로 뒷받침 된다. 올해는 조선의 의로운 선비 한 사람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1482년 8월 10일 ~ 1519년 12월 20일)의 죽은 50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6월 18일 이를 기려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유학의 현대화 작업을 모색하는 토론회를 가졌다. 여기서 세종의 삶 철학과 정암선생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궁금히 여길 것이다. 《정암집》 속의 세종 시대 조선조가 이어지는 동안 후대 여러 임금과 사대부들이 세종시대를 정치의 본보기로 삼았다. 조광조 선생은 그의 문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 정신은 사람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옛 문헌과 자료를 조사하고 다음으로 토론과 현장조사로 이어진다. 토론 토론은 먼저 경연관이 강론한 후에 경연청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종일 토론 : 경연에 나아가니 동지경연 탁신이 아뢰기를, 근래에 경연관(經筵官)이 번(番)을 나누어 나아와서 강(講)하는데, 모두 다른 사무를 맡은 관계로 많은 글의 깊은 뜻을 강론할 여가가 없어서, 나아와서 강할 즈음에 상세히 다하지 못하게 되오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합하여 한 번으로 하여, 나아와서 강한 후에는 경연청(經筵廳)에 물러가서 종일토록 토론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고, 또 점심밥을 주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12/17) 시간에 쫓겨 토론이 부실하니 종일 토론하게 해 달라 하자 이를 들은 세종은 점심을 제공하라고 배려한다. 이런 토의 주제 중 중요한 것이 바로 먹고 사는 일에 관련한 조세에 관한 정책이다. 토론의 대상이 되는 문제는 찬반과 득실이 따르기 마련이다. 당연히 공법(貢法)에 관해 신하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조선의 토지 제도는 조선 건국 1년 전 과전법에서 출발하여 다시 공법의 개정 준비를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살아있는 지혜를 중히 여긴다 사맛[소통]은 현장의 소리를 잘 듣는 데서 출발 사맛은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마지막에는 사상도 교환하게 된다. 사상은 지식과 지혜로 구성되고 이런 사맛은 개인이 스스로 대화하는 곧 생각하는 활동까지를 포함한다. 안다는 것에는 지식과 지혜가 있다. 세종조 당시 사대부는 지식인으로 문자를 알기에 경전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익히고 이를 논리화 하고 현실 실천으로 옮기려 한다. 지혜는 인간 본연의 앎에 대한 반응으로 실생활 현장의 노인, 기술자들이 경험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생활 속의 경험을 통한 발견이 지혜로 쌓이게 되는데 이를 세종시대에는 ‘경험방’이라고 불렀다. 전국 각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여러 생활 현장에서 얻는 ‘생업의 앎[정보]’으로서 바로 삶의 지식이다. 이는 경험적 지식이기도 하고 스스로 깨우쳤기 때문에 지혜의 측면도 있다. 경험적 지식에는 의방 · 경험방 등이 있다 경험적 지식으로 세종 시대 세종실록에 ‘의방’이나 ‘경험방’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ㆍ의방 : “임금이 말하기를, 의술은 인명을 치료하므로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으나, 그러나 그 심오하고 세밀한 것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사맛은 잘 듣고 묻는 일에서 출발한다 세종의 사맛[소통] 정신은 어떤 일에 대하서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세종은 의문을 가지고 잘 듣는[以聞] 임금이었다. ‘이문(以聞)’은 《조선왕조실록》 원문 전체 4,211건 가운데 세종 862건이다. 조선의 임금이 27명이니 세종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듣고 또 들었다. 충녕이 세자가 될 때 태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묻고 신하는 태종의 마음에 달렸다 하고, 태종은 충녕[세종]이 현명하다고 의견을 제시한다. 듣기 위해 묻고 의논하는 절차가 원만하다. “태종이 말하기를, ‘그러면 경들이 마땅히 어진 이를 가리어 아뢰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기를, ‘아들이나 신하를 알기는 아버지나 임금과 같은 이가 없사오니, 가리는 것이 성심(聖心)에 달렸사옵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충녕 대군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고, 또 정치에 대한 대체(大體)를 알아, 매양 국가에 큰 일이 생겼을 제는 의견을 내되, 모두 범상한 소견이 의외로 뛰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사맛’으로 먼저 옛 일을 조사한다 정치에서의 사맛은 주제를 가지고 사람들과 토의하는 일이 기본이다. 일반적으로 말이란 의미 있는 말과 의미 없는 말로 크게 나뉜다. 요즘 봄철이어서 철쭉이며 이팝나무며 예쁜 꽃들이 많다. 꽃을 보고 “저 꽃 참 예쁘다.”하면 이는 의미를 전달하는 게 아니고 감탄해 내는 소리고 표현이다. 감정이 말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연인끼리 있으면서 남자가 ‘저 꽃 예쁘다.“ 하면 여자가 옆에서 ’나보다 예뻐‘ 하면 그때 가벼운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감성을 담은 이야기 외에는 자기 마음이나 자기주장을 담는 경우가 많게 된다. 세종의 사맛[소통]의 규칙에서 먼저 사람을 만나는 일 다음으로는 주제에 맞추어 그에 대해 지난 시대의 사례를 찾아보는 일이 뒤따른다. 정치란 전에 없던 일을 하는 경우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옛일[古事]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이 조사를 곧 계고제(稽古制, 稽계 머물다, 쌓다)라 한다. 이런 자료의 수집은 다른 말로는 의고제(依古制), 고고제(考古制) 등이 있고 유사어로 고고제개지(考古制改之)가 있다. 계고제, 의고제 외 세종은 일을 해나감에 있어 명나라의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내가 인물을 잘 모르니 의논하려고 한다.’ 세종은 사람을 고르는데 있어서 개인의 판단에 의지하지 않으려 했다. 즉위하자 스스로 사람을 알지 못함을 고백하고 의논할 것이라고 말한다. 의논 : 임금이 하연(河演)에게 이르기를,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ㆍ우의정과 이조ㆍ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欲與左右議政)’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 (《세종실록》 즉위년/8/12) 8월 11일 즉위하였으니 다음 날의 이야기다. 이 말에 하연은 “이제 전하께서 처음으로 정치를 행하심에 있어, 대신과 함께 의논하심은 매우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그 임금에 그 신하의 응답이다. 변계량이 이미 세종의 학문은 문형[文衡, 대학자]이라고 말하고, 부왕 태종도 세종은 정치의 대체(大體, 큰 줄거리)를 안다고 인정한 터에 세종은 처음 출발을 ‘잘 모르니 의논하자.’고 한다. 아직 부왕의 신하들과 어울려 나가야 한다는 점진적 계획과 겸양을 보이고 있다. 정치는 집단 구성원들의 미래의 삶이 풍부해지도록 모임을 꾸려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잘 한다는 것은 우선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의견을 모으고 이를 잘 실천해 가는 일이다.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생각하는 정치를 펴는 세종을 따라 지난 몇 회 세종의 생각과 실천 사이의 관계를 보았다. 그 주요 이념은 무엇일까. 큰 틀에서는 즉위교서에 나타난 첫 말씀 곧 ‘시인발정(施仁發政)’으로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베푸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 즉위년 8월 1일) 세종의 ‘시인발정(施仁發政)’ 세종의 ‘시인발정(施仁發政)’은 맹자의 ‘발정시인’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세종은 맹자를 보았을 것이고 이를 응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발정시인’은 BC 300년 무렵의 정치 체제 미완의 시대에 먼저 바른 정치를 앞세우는 일이고, 세종의 ‘시인발정’은 ‘사랑[仁]의 실천’으로서 힘을 갖는 일이다. 맹자의 ‘말’과 세종의 ‘일’[실천] 사이에는 시대적, 상황적 차원의 변화가 있다. 이렇게 보면 맹자와 세종은 별개의 것이 된다. 세종의 판단은 세종의 사유와 시정 철학의 결과라 할 것이다. ‘시인발정’의 구체적 사상은 다음과 같다. 가)하늘을 공경하고 : 경천(敬天) 나)백성을 사랑하며: 애민(愛民) 다)충성이 천자에 이르고: 충성(忠誠) 라)효하고 공경함이 신명에 통하여: 효제(孝悌) 마)예(禮)가 일어나고 악(樂)이 갖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희생과 불윤 세종은 신하들에게 백성을 위해 헌신하라고 요구했다. 신하들이 사직하겠다는 데 대해 그 대답은 ‘허락하지 아니하다’의 ‘불윤(不允)’으로 나타난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직이 아닌 업의 정신을 가지도록 요구했다. 직은 역할로 직무나 직책이다. 그러나 관직이 높은 사람들은 사직을 청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프면 이따금 나와도 된다 하고, 또 약을 주었다. 자신은 온 몸이 종합 병동이 되어 있어도 일을 한다. 누가 자신과 견줄 수 있겠는가. 정승은 헌신이 아니라 희생을 요구하는 정도였다. 세종 13년에 이조 판서 권진이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한다. 불윤(不允) : “신은 나이 75살로 늙어 행동이 둔하고 정신도 맑지 못하여, 하는 일마다 실수하고 움직일 때마다 허물만 얻으므로 청의(淸議)에 부끄럽사온데, 더구나 농사철을 당하여 한재가 심하오니 실로 불초한 신이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진 이의 등용을 막습니다. 청컨대 신의 벼슬을 거두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세종실록》 13/5/17) 세종 18년 북방의 군무를 맡고 있던 김종서가 상제를 마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신이 어머니가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은 생각하며 정치를 한 임금이었다. 세종의 정치는 제도를 고치고 새로운 사업을 펼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자연스레 신하들의 희생도 따르게 된다. 이는 바로 업정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종은 때로 업정신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하들은 일이 힘들어 좀 쉬고자 청하나 세종의 대답은 ‘불윤(不允)’이다. 한 예로 황희는 75살 되는 때인 세종 13년에 전에 이어 사직서를 내지만 역시 허락받지 못한다.(세종 13/5/17) 여기에서 관리에게는 국가적으로 ㉮효보다 의(義)가 중요하고 ㉯재상의 임무는 서민보다 크고 ㉰ 대부는 효보다 충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효이지만 정승의 효는 국가에 대한 충과 그 비중이 같다. 효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다. 이것이 군신으로 확대되면 나라 일이 바로 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백성과 사대부의 업 백성과 사대부의 다른 점을 생활 속에서 살펴보면 백성은 고통스러운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사대부는 이곳을 벗어나 더 편한 조건의 임지를 찾아보고 싶어 한다. 두 신분이 추구하는 바는 같다. 그러나 백성은 자의적으로 이동할 수 없다. 관리 사대부도 조건은 마찬가지이지만 관리는 나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지난 2월 20일부터 8일 동안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벡)에 한국 ‘문화미디어포럼’ 회원들과 우즈벡 국립저널리즘대 공동주관의 미디어 문화 세미나를 위해 타슈켄트와 유네스코 유적 도시인 사마르칸트를 다녀왔다. 느닷없이 세종과 우즈베키스탄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의문이 들 것이다. 먼저 요약하면 나의 발표는 세종이 옛 사람이 아니라 세종이 행한 과학적 변역(變易) 정신이 오늘날 4차산업 시대에도 통하는 정신임을 예증했다.(이에 대한 글은 후에 소개) 이 발표 이외에 얻은 소득으로는 우즈벡 역사에서 세종과 비슷한 시기에 세종처럼 우즈벡 역사의 획을 긋는 인물이 어문학 그리고 천문학에서 있었던 것을 확인한 일이었다. 어문학의 알리셔 나보이(Alisher Navoiy)와 천문의 미르조 울르그벡(Mirzo Ulugbek)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우즈벡은 현재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궁전 터에서는 고구려 사람이 조우관(깃털모자)을 쓴 벽화가 발견된 바도 있어 예부터 한반도와 거래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세종과 우즈벡의 역사적 인물을 비교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