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절은 2000년 전에 들어온 외래문화가 한국의 문화로 수용되어 정착되는 과정이 구석구석에 스며있다. 오랜 외침에 의한 전란과 화재로 정성들여 지었던 건축물들이 무상하게 사라진 뒤에도 우리 선조들은 없어진 전각들에 대한 아쉬움을 한탄하지 않고, 또 다시 힘을 내어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지었고, 건축물에 들어가는 문에도 아름다운 문살을 마치 조각품처럼 장식하였다. 그리고 그 정성이 작품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 절의 건축물에는 건물의 정면에 빛을 받아들이고 또 사람이 드나드는 문을 아름답게 꽃살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건물의 내부를 밝히기 위하여 빛을 받아들이고, 사람이 드나드는 문의 의미를 넘어서 부처님의 앞에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꽃을 오래도록 공양하기 위하여 꽃 무늬로 새겨넣은 것이다. 사찰의 주요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고, 그 주변에는 화려한 난초꽃 화분들을 올리는데, 난초는 얼마지 않아서 시들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꽃살문으로 새겨놓으면 부처님은 건축물이 살아있는 한 언제나 화려한 꽃을 공양받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절에는 화려한 꽃살문양을 새겨놓는 것이다. 꽃살 무늬는 발전하여 문짝을 화려한 연꽃밭으로 바꾸기도 하였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절의 전각들은 대부분 돌로된 기단 위에 지었다. 절의 건축물의 주 재료는 나무로 되었지만, 나무는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직접 땅에 닿으면 쉽게 썪게된다. 따라서 썪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둥이 흙과 닿는 부분에는 돌로 된 주초석을 깔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를 대들보와 도리를 둘러서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서까래를 얹은 뒤 기와를 이어서 집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집을 짓기 위하여 습기를 방지하고, 또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하여, 대지 보다 한단 높게 기단을 만들었는데, 한국 절의 기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장식하여 아름답고 격조있게 만들었다. 이는 건물의 격을 높이기도 하지만, 그 건물에 모셔진 부처님을 정성으로 떠받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절을 대상으로 사진을 담아온 불교사진작가들의 모임 심상(心像)의 33번째 작품전으로 어려운 코로나19의 시절에도 변함없이 촬영에 임하여 얻은 작품들을 엄선하여 선보이는 것이다. 한국 절 건축의 아름다움 가운데서도 돌로된 기단과 계단의 옆에 있는 소맷돌만을 주제로 열리는 사진을 통하여 우리 조상들이 이룩하고자 했던 건축의 미를 새롭게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위 사진들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 전시중인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하 반가사유상)이다. 국보 제83호는 국보 제78호와 매우 흡사한 반가사유상으로 연꽃의자에 앉아 오른손을 오른발 무릎 위에 괴고, 괸손은 오른쪽 볼에 지긋이 댄채 가늘게 눈을 뜨고 입가에는 그윽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명상에 잠겨있다. 이러한 모습은 두 반가사유상이 비슷하지만 국보 제83호는 보살의 몸에 걸친 옷이 완전히 몸에 밀착되어 옷을 입지 앉은 모습처럼 보이고, 머리에 쓴 삼산관(三山冠) 보관 형태 등이 국보 제78호 보다 훨씬 간략화되어 있어 확연히 다르다. 윗몸에 걸친 옷은 몸의 윤곽이 다 드러난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얇은 천상의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앉은 의자는 연꽃이 뒤집혀진 복련의 연잎이 바닥에 엎어진 모습으로 활짝 피어있고, 치마처럼 두른 하의가 보살의 다리를 감싸고 앞부분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복련의자를 감싸내리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국보 제78호와 흡사하지만, 그보다 더 세련된 모습이며, 머리의 뒷편에는 광배를 달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뾰족한 뿔이 나있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뒤 수많은 불상들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하 반가사유상)은 2기가 있다. 2기의 반가사유상 중 먼저 국보 제78호가 된 것이 오늘 소개하는 반가사유상이고 뒤이어 국보 제83호가 된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세상에는 국보 제83호가 더 많이 알려져있다. 이 2기의 반가사유상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실에서 함께 볼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불상만큼 조형감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러한 반사사유상의 조성시기는 주로 6∼7세기로 보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무릎 위에 걸치고, 왼손으로 오른쪽 발목을 감싸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발 무릎 위에 받치고 손가락 2개를 펴 얼굴 볼에 대고 있는데, 얼굴은 부드럽고 둥글며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으며 눈은 가늘게 뜬채 발 아래를 응시하고 있다. 그 모습으로 반가사유상을 만든 까닭은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하여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반가사유상은 용광로에 청동을 녹여서 미리 만든 조형틀에 부어 만들었는데, 머리부분과 몸통부분은 별도로 주조하여 만든 뒤, 두부분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끝나가는 날 잔설이 남아있는 용인시 한 야산에 고려시대 마지막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를 찾았다. 선생은 1337년 태어나 1392년 정적에 의하여 생을 마친 고려시대 최후의 학자로 자신의 부귀영화 보다는 당대의 의인으로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구걸하듯 살지 않고 자신이 살았던 나라를 위하여 당당히 죽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또 협조하면 부귀영화가 보장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정의로운 삶을 살다간 것이다. 혼란의 고려말 덕망있는 학자로 조선에 참여하지 않은 3인의 유학자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호(號)에 은(隱)을 썼기에 고려3은으로 볼리운다. 이들은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가 있다. 정몽주선생은 고려후기 몽골간섭기에 태어나 고려 공민왕 9년(1360), 과거시험에 3회에 걸쳐 연속으로 장원급제하여 두루 관직을 역임하며 대사성문호찬성사,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호시중 등 당시 최고위 관료가 되었으며 그 공이 커 안사공신의 휘호도 받았다. 선생은 후진양성을 위하여 오부학당을 세우고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교의 믿음에 있어서 관세음보살은 부처님보다도 더 많이 불리우고 있으며, 그만큼 많고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조각되어 불전에 모셔져 왔다. 부처님은 진리를 깨친 분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목표라면, 보살은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존재들을 부처님처럼 깨달음으로 인도하거나, 세상살이에 힘들고 고달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로 부처와 사람의 중간자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불교의 수많은 보살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불리우는 대표적 보살로 대승불교를 따르는 한국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오로지 관세음보살만을 모시고 기도하는 절들도 많이 있다. 관세음보살의 기도처로 유명한 한국의 절들은 다음과 같다. 양양 낙산사, 양양 휴휴암, 남해 보리암, 강화도 보문사, 여수 향일암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전국에는 수많은 관음사들이 있고, 대부분의 한국절에는 관세음보살이 별도의 전각에 모셔져 있다. 그만큼 친숙한 대상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의 불교적 의미는 어떤 어려움 어떤 소원도 한량없이 넓은 마음으로 받아준다고 하여 대자대비의 상징이다. 이와 같이 친숙한 관세음보살은 소승불교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인년(壬寅年) 검은호랑이 해를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한국인의 삶속에 함께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호랑이들을 선보이고 있다. 지금은 한반도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백수의 왕 무서운 호랑이이지만, 옛 선조들은 호랑이가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우리의 삶속에 함께해 왔다는 것을 그림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의 삶속에 나타난 호랑이는 실제의 모습 보다는 해학적으로 재미나게 표현한 게 많다. 실제는 무섭기 그지없는 호랑이를 어리숙하고 친숙한 모습으로 변형하여 마치 친구처럼 여기며 살아왔음을 느끼게 한다. 호랑이는 고양이과 동물 가운데 가장 큰 동물로, 그 길이가 1.8m 꼬리길이는 90cm 에 이르며, 걸을 때에는 뒷발이 앞발을 되밟는 습성이 있다. 호랑이는 뛰어오르는 힘이 좋아서 4m에 이르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때에는 10m도 뛰어내린다. 몸은 황갈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 털이 온 몸에 두른 모습으로, 그 수명은 15~20년을 살아간다. 호랑이의 임신기간은 비교적 짧은 100~110일 정도로 보통 2~4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겨울에 임신하여 봄에 새끼를 낳아서 기르며, 새끼의 크기는 고양이만 하지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리에는 요선정(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과, 그 옆에 무릉리마애여래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74호)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 있는데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차츰차츰 낮아지는 산지이지만 평야지역까지는 매우 멀고 먼 굽은 산길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백두대간에서 가까운 동쪽지역은 첩첩산중으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많다. 첩첩산중, 사람이 살것 같지 않고 신선들이 살것 같은 곳인지라 마애불이 있는 이곳은 예부터 무릉도원으로 불려왔고 근래 이곳은 아예 행정구역명을 무릉도원면(2016.11.14, 수주면'水周面'에서 무릉도원면으로 변경) 으로 바꾸었다. 마애불이 있는 곳은 영월의 천년고찰 법흥사에서 가까운 곳이다. 1400여년 전부터 불국토를 이루고자 평생을 바쳐온 자장율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법흥사는 한국 불교의 계율의 수행정신과 부처님 진신사리를 간직한 성지로 이름 나있는 절이다. 마애불은 강가 언덕 위에 크고 평탄한 바위 위에 또 하나의 자연석이 마치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올라 앉아 있는데 여기에 마애미륵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의 형상은 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가보물 제87호와 제84호로 지정된 강릉시 범일로 신복사터 삼층석탑과 석조공양보살좌상이다. 강릉 신복사는 고려시대 신복사 절터다. 신복사는 조선시대에 발간된 불교관련 문헌에는 전혀 기록이 없어, 창건역사 및 폐사에 대하여는 그 내력을 알수가 없다. 다만 1933년 발간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따르면 신라 문성왕 때 명주 사굴산문을 개창한 범일국사(810~889)가 굴산사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신라시대 후기에는 선종이 유행하였는데, 이때 신라땅에는 9개의 선종가문이 있었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당시 구산선문을 열었던 절 중에 하나가 바로 이곳 강릉 굴산사에 본거지를 두어 굴산산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개창한 스님은 범일국사였다. 불교사를 돌아보면 경전위주로 성장하던 시대를 교종불교라하며, 이때는 화엄경을 위주로 공부하고 수행하였다. 한편 선종은 방대한 경전보다는 마음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종파인데, 이때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주로 선수행을 위주로 하였다. 따라서 선수행을 위주로 한 종파라 하여 선종이라고 한다. 신복사는 1936년 일제강점기에 절터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편에 쓰여진 글자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에 있는 보물 2107호로 지정된 건물 이지당(二止堂)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1544∼159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조헌은 임진왜란 당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성공하여 육지에서 첫 승리를 이룩한 의병장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이지당(二止堂)은 처음에는 각신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이라고 하였다. 그 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이 고장의 영재를 모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의 끝자인 지(止)를 따서 ‘이지당’이라 서당의 이름을 고치고 현판을 써서 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월이 흘러 퇴락한 것을 광무 5년(1901)에 옥천의 금씨·이씨·조씨·안씨 네 문중에서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집은 뒤로는 낮은 구릉이 뒤를 받쳐주고 있으며, 건물은 바위를 펑퍼짐하게 다듬은 곳에 세운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앞으로는 금강상류인 서화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서화천 건너편에는 기름진 논밭이 있어, 배산임수로 전형적인 풍수의 명당터에 지어진 서당이다. 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