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번 주말이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그다음 날 일요일이 크리스마스다. 우리말로는 성탄절이라고 하는데 웬일인지 성탄절이라고 하면 너무 딱딱하고 엄숙한 것 같아 신세대들은 크리스마스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성탄절 즈음해서 많이 듣는 말이 '할렐루야'일 것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그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난 날이니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가? 그야말로 구세주이신 신의 영광을 찬양해서 마땅한 날이기에, 할렐루야라는 말로 기쁨을 표현한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기도하면서도, 또는 심지어는 거리에서 전도를 강요하는 분들에게서도 이 말은 자주 듣는다. 할렐루야(Hallelujah)는 고대 히브리어에서 ‘찬양하다’를 뜻하는 ‘hallel’과 유태교의 신 ‘Yahweh’의 준말인 ‘yah’가 합쳐진 말이라고 하니 글자 그대로 신을 '찬양하다', '찬양하라'의 뜻이 된다. 필자는 기독계인 대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는 한 해에 한 번씩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회를 하며 그때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에 나오는 '할렐루야' 합창곡을 꼭 불렀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 2년여 동안 집 뒤편 둘레길을 돌면서 하루하루 신경을 쓴 것이 있다. 바로 둘레길 입구에 세워져 있던 작은 돌탑의 존재였다. 굵은 돌 10여 개 남짓을 위로 쌓아 올린 돌탑이 하나가 서 있다가 어느 날 보면 누군가가 무너뜨려 놓았다. 돌탑은 두 개일 때도 있었지만 역시 세워지면 곧 무너졌다. 그렇게 세우고 무너트리는. 말하자면 돌탑 전쟁이 일 년 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대 계곡은 큰비가 오면 물이 넘치고 토사가 휩쓸려가 이에 대해 계곡의 바닥을 파고 굵은 돌로 물길을 새로 만드는 사방작업이 2년 전 봄 여름에 있었는데 그 공사가 끝난 뒤 가을 계곡 옆 언덕배기에 누군가가 작은 돌탑을 처음 만들어 세웠다. 그런데 며칠 뒤에는 그게 무너져 있었고 이에 다시 세워졌다가 며칠 뒤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해가 바뀌면 무너뜨리는 분이 참고 넘어가 줄까 했지만, 여전히 세우고 부수고 하는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돌탑을 쌓는 분은 남이 일껏 힘들게 만들어놓은 돌탑을 왜 그렇게 부수려 하느냐고 경고성 글을 쓴 종이를 달았는데 부수는 분은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수는 바람에 종이도 땅에 떨어졌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2월이 되니 일 년이란 시간이 거의 다 가는구나. 열두 달을 거의 다 보내고 이제 한 달도 안 남았구나. 어영부영 일 년을 다시 마감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해본다. "올해 무엇을 했지?" 뭐 특별한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데... 무슨 기억 나는 일이 있으리오. 올 한 해 즐거웠던가? 지루했던가? 힘들었던가? 재미있었던가? 그런데 이런 질문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질문이다. 그때 옛날에 본 어느 말이 생각난다. "세상은 증오로 살기엔 기나긴 권태요, 사랑으로 살기엔 짧은 환희다" 이 말은 2003년 10월 19일 바티칸에서 열린 시복식을 통해 성자 다음의 품계인 ‘복자’가 된 마더 테레사, 곧 테레사 수녀의 언행과 어록을 기록한 책을 소개하면서 출판담당기자가 머리말로 가져다 놓은 것이다. 테레사 수녀의 말일 것이다. 올 한해가 지루했으면 그것은 증오로 살았다는 말일 것이요, 짧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은 사랑으로 살았다는 뜻일 거다. 우리는 그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오로지 내가 편했는지, 즐거웠는지, 재미있었는지, 자기 한 몸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며 이 한 해를 살아온 것이 아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970년대 후반에 직장을 시작해 퇴직하기까지 30여 년을 텔레비전 방송국의 기자였던 필자는 일반적인 기자들보다는 대형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하는 행운을 누렸다. 기자라고 하면 사건이 일어나거나 세상이 변하는 현상 등을 취재해서 짧은 뉴스 속에 담아내는 일이 주 업무로 인식되고 있고, 그 뉴스라는 것이 보통 1분 30초를 기준으로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런 매일의 뉴스와는 달리 장기간에 걸쳐 회사 밖으로 나가서 취재해서 50분 단위로 만들어내는 큰 프로그램을 필자가 다른 기자들보다도 더 많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취재는 국내는 물론 멀리 나라 밖에도 가게 되고, 그것도 남들이 가지 못하던 곳을 처음 간 경우도 많았다. 주요한 것으로는 1987년에 우리나라 국산자동차 3대를 직접 북미대륙으로 가져가서 그 차를 몰고 넉 달 동안 2만 킬로미터를 달리면서 그 나라의 자연과 역사, 사람과 문명의 문제를 조명한 '세계를 달린다'란 프로그램의 북미편이 있었고, 지금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중국의 실크로드를 한국인 처음으로 1989년 5월 한 달 동안 수도인 베이징에서 우르무치까지 5천 킬로미터를 취재한 '서역기행 대륙회당 5천킬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늦가을 인사동 거리, 못생긴 얼굴 같은 글씨로 서예전을 알리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옵니다. 한얼 이종선이란 분의 서예전인 모양인데, '七十而已'(칠십이이)라는 전시회 이름이 특이합니다. 개막식장에서 전시회의 주인공은 '칠십이이'라는 말은 "제 나이 칠십입니다" 혹은 "칠십이 되었군요"라는 뜻이랍니다. 고희를 맞아 그동안 작품활동 한 것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지나간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는 겁니다. 전시장 안의 글씨들은, 한자 한문도 있고요, 한글 서예작품이 많은데, 뭐 글씨가 삐뚤삐뚤, 들락날락, 흐느적 흐느적... 보통의 서예글씨가 아니라 마치 글자들이 춤을 추는 그런 작품이더라고요. 요즘 사람들이 많이 언급하는 말 메멘토 모리, "언젠가는 우리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런 무시무시한 말이 뭉툭 뭉툭한 채로 눈에 들어옵니다. 흔히 세로로 쓰는 작품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읽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왼쪽에서부터 읽도록 했고, 작은 글씨도 우리가 언젠가는 인생이란 역에서 내려야 한다는 내용을 깔고 있는, 제법 의미가 있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그런 글귀를 마치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처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 늦가을 강릉의 오죽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말은 많이 듣고, 그 앞을 지나간 적도 있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기에 사실상 처음 방문이다. 오죽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자보다 더 잘 알 테니 설명은 그야말로 사족일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기념관에 갔다가 깜짝 놀란 발견을 했다. 바로 황기로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구나. 광초(狂草)로 알려진 황기로의 서예 필치를 여기 오죽헌에서 보다니. 과연 그의 필은 거침이 없다. 낙동강 물을 검게 물들이며 연습한 초서 아니던가? 이미 알려진 대로 황기로는 경북 선산 사람이고 그곳에 그의 유적이 있다. 곧 매학정이란 정자가 그것이다. 이 매학정의 사연이 꽤 가슴 아픈 얘기다. 선비들의 나라라 할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선비들이 가장 통탄하는 일은 조광조를 탄핵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일 것이다. 조선 중종에 의해 발탁된 조광조는 선비들의 이상인 도학정치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급격한 개혁에 따른 훈구공신들의 반격으로 기묘사화를 당해 능주로 귀양 가고, 한 달 만에 사사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광조를 탄핵하는 데 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상을 바로 모시고 그 유덕을 이어가는 것은 후손의 당연한 도리라고 들었습니다. 조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숨어있는 역사를 찾아내고 유적을 복원해서 조상의 생각과 일생의 업적을 드러내야 합니다. 효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대로 "세상에 나아가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까지 날리면 그것이 곧 효의 마지막이다 立身行道揚名於後世 以顯父母孝之終也" 란 귀절이 있습니다만 꼭 자손이 출세해서 이름을 날리지 않더라도 적어도 조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효도임을 부정하실 분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의 자손입니다. 조선조 중종, 인종, 명종 때 대사헌, 황해감사, 청홍도(충청도)관찰사, 한성부 우윤 등을 지내시다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분이지요. 올해가 선조 돌아가신 지 472년입니다. 그동안 선조에 견줘 선조를 알리는 일에는 후손들이 제대로 못 해 죄송스러웠습니다만 선조의 행적을 알리는 온계평전의 발간, 신도비각의 중수, 묘소 가토중수 등의 일을 올해까지 끝냄으로서 선조를 알릴 최소의 준비를 후손들이 다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에 그것을 기념해서 안동 도산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벌써 1년이 지났군요.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이 말을 사장님께 써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이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1년 전 갑자기 송혜선 대표로부터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요. 그 전부터 비록 저를 못 알아보시더라도 꼭 뵙고 손을 잡고 당부를 드리고 싶었는데 1년 반 동안 닫혀있던 중환자실의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장님이 저한테 맥주 한 잔이라도 사주시라고, 그러려면 일어나시라고 간곡히 당부를 드리면, 틀림없이 들어주실 것이란 확신이 있었지만, 그 확신을 시험해볼 기회조차 없이 사장님은 먼 나라로 가셨지요. 하얀 국화꽃으로 장식된 단 위에서 웃고 계시는 사장님, 평소에 뵙던 밝은 웃음, 싱긋하던 입모습 그대로였는데 이제 더 뵐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습니다. 그리고는 발인에 참석하지 못하고 분당 어디 유명한 공원묘지에 좋은 데를 마련해서 그리로 보내신다는 소식에 그런가 보다 하고는 좋은 데 가셨겠지 하고 사장님을 그쯤에서 보내드린 것인데 어느새 일 년이란 시간이 정말로 훌쩍 지나갔군요. 그러고 일 년이란 시간이 훅 지나면서 많이 죄송했습니다. 그동안 사장님을 잊고 있었던 것 같은 반성이 일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미 많은 나뭇잎이 옷을 갈아입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다. 10월도 마지막 주로 접어들자 곳곳의 단풍이 화려하게 물들어 눈과 마음을 취하게 한다. 마치 이들 단풍이 곧 멀리 떠날 것이라는 생각 대신에, 영원히 우리 주위에 머물어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그만큼 서울 시내 어디나 수목이 많아져 곳곳에 단풍이 황홀하게 물들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상강이란 계절의 변환점을 지났기에 이들은 곧 우리 곁을 떠날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가을의 서글픔을 말없이 대변하는 것으로 수국이 있다. 지난 5월부터 서서히 피기 시작해 청초하면서도 화려한 용모를 자랑하던 수국이 어느 틈엔가 색깔이 변해가기 시작해 이제는 완연히 누런 갈색으로 변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젊은 날의 그 기품을 생각하면 볼품이 없어진 얼굴이 불쌍해 보이는 것은, 모든 생명이 걸어가는 길이기에 새삼 서러워할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기억하는가? 5월 말 시작된 푸릇푸릇한 꽃의 잔치를? 수국이란 중국 이름 수구(繡球) 또는 수국(水菊)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보며, 옛 문헌에는 자양화(紫陽花)라는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어느새 가을이 왔구나. 이따금 찬 바람이 불고, 늦은 비라도 방울방울 볼을 때릴 때면 나도 모르게 우수에 젖게 된다. 패티 킴의 노래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런 때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성은 김이요, 이름은 우수라고 했다. 왜 이름이 우수일까? 봄을 알리는 봄비를 뜻하는 우수일까? 가을을 재촉하는 빗방울처럼 쓸쓸한 마음의 우수일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설명을 들을 수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다. 김우수라는 사람은 11년 전 9월 23일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승용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는 병원에 실려 간 뒤 25일 만인 이달 10월에 저세상으로 갔다. 1957년생이라고 하니 그때 나이가 55세, 60도 되기 전이다. 그는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우동을 배달하던 중이었다. 급히 병원에 실려 갔지만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 사람이 누구인지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부모를 모르는 고아였다. 일가친척도 없었다. 고아원에서 나와서 험한 세상에 던져지자 누구처럼 사고도 치다가 방화범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거기서 소년소녀가장들이 사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나와 오토바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