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사신성황당의 경당(經堂) 안에는 1889년(고종 26) 때 나무 현판으로 제작된 봉축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이는 조선 제26대 고종(1852-1919) 때 궁에서 이곳에와 고종과 왕비, 왕대비, 세자, 세자빈 등을 위해 봉축을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조선 왕실과 무속신앙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자료라 가치가 적지 않다. 사신성황당의 이와 같은 기복 의례는 고종의 비 명성황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당지기 김형순 여사가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목현판은 가로 84㎝, 세로 41㎝이다. 그러나 귀퉁이와 아래쪽 조각 장식품까지 합하면 가로 117㎝, 세로 55㎝가 되고 높이는 7.5㎝이다. 이 나무 현판은 이곳에 남아 있었던 신도(神圖)들과 함께 2005년 2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 지정되었다. 다음은 현판 원문과 이를 필자가 해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판 내용에서, 봉축(奉祝)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 올린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임금을 비롯하여 중궁, 왕대비, 세자, 세자빈, 후궁, 후궁 소생 등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이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쓰였다. 주상전하(主上殿下)는 임자년(壬子年)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조선시대 서울(경성)에는 동서남북 네 방위에 성황당(城隍堂)을 설치하였다. 그중 서쪽 방향의 성황당이 사신성황당(使臣城隍堂)이다. 동쪽은 자지성황당(紫芝城隍堂), 남쪽은 우수현성황당(牛首峴城隍堂), 그리고 북쪽은 동락정성황(同樂亭城隍)이다. 동쪽 자지성황당은 동대문 밖 창신동의 낙산(駱山, 타락산-駝駱山 또는 낙타산-駱駝山이라고도 함) 산허리에 있었고, 남쪽 우수현성황은 용산구 동자동(옛 도동 2가)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부근에 우수선생(牛首先生)이란 학자가 살았던 데서 유래한 우수재에 있었다. 그리고 북쪽 동락적성황당은 북문인 창의문(彰義門) 앞 청운동에 있었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러졌기에 이를 자하문성황당이라고도 하였다. 전통사회에서의 서울 무당들은 큰굿을 하기에 앞서 네 곳의 서낭을 돌며 성황맞이를 하였는데, 그 첫 번째 방문지가 동쪽의 자지성황당이었다. 두 번째 찾는 곳이 사신성황당, 세 번째 우수현성황당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동락정성황당이었다. 서쪽의 사신성황당(使臣城隍堂)은 서대문 무악재 너머 길가에 있었다. 사신성황당이 있었던 홍제동 인근과 구파발 일대에는 유명 만신도 많았지만, 유명 신당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한강(漢江)의 옛 이름은 큼과 신성함의 의미를 갖는 ‘아리(알)수’이다. 우리나라 중부지역인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서울특별시를 거쳐 우리나라 서쪽에 있는 서해(西海, 황해-黃海)로 흘러가는 강이다. 한강은 우리말 ‘한가람’에서 유래한 말로, ‘한’은 ‘크다’, ‘넓다’, ‘길다’이며 ‘가람’은 ‘강’을 뜻한다. 중국 문물이 들어온 이후부터 ‘漢’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도 크다는 의미를 갖는다. 한강이 전통사회에서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현대사회에서는 환경의 원천으로써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강은 오랜 시간을 거쳐 생성되고 축적된 유무형적 민속과 신앙 자료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어서 서울의 역사 문화를 안고 있는 유무형문화유산의 보고로서 역할을 한다. 얼마 전까지도 한강과 더불어 옛 정취를 풍겼던 한남동의 “작은 한강 부군당과 당굿”만을 살펴보아도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한강 유역에는 오래전부터 도(渡)와 진(津)으로 구분된 많은 나루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커다란 대로로 이어진 나루를 도(渡)라 불렀는데 한강도(漢江渡)가 네 곳 중 가장 큰 나루로 알려졌다. 곧 양화도(楊花渡), 노량진도(鷺梁津渡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김유신장군당제에서는 하주(굿에 참여할 마을 원로)들이 선임되면 의례 공간 주변에 황토를 뿌리고 관련 건축물에 인줄을 매어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황토물림’ 및 ‘인줄매기’라 한다. 인줄에는 ‘피부정’, ‘상문부정’이라는 글귀도 써서 끼워 넣는다. 하주 집에도 물론 인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선정된 하주들은 이때부터 여타의 잡인들과도 접촉하지 않아야 한다. 부정한 것을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하며 초상집이나 출산집을 삼가야 하고 부부합방도 금해야 한다. 물론 누린 것, 비린 것 등의 음식도 삼가야 한다. 당제에 사용할 ‘술 담그기’는 당 앞에 마련되어 있는 당주 집에서 행한다. 술은 당제에 쓰이는 제물이고 또한 당제에 참가하는 마을 사람들이 새해 첫날 아침에 마시는 첫술이기 때문에 가릴 것은 가리고 드릴 것 드려 정성으로 담근다. 그래서 술 담그는 술방 주위에도 금줄을 쳐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 것이다. 2000년, 술 담그기는 1월 23일(음력 1999년 12월 17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3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참여자는 당주 이군자 무녀를 비롯한 명화회 고문 김정해(당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 155번지에는 명화전(明化殿)이 있다.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는 마을 사당이다. 김유신장군사당(金庾信將軍祠堂)이라고 했던 것을 2000년 이후부터 명화전으로 부르고 있다. 당 내부 중앙 벽면에 김유신 장군이 주신으로 모셔져 있고 양옆으로 산신, 삼불제석 등의 무신들이 봉안돼 있다. 솟을문으로 되어 있는 정문 앞에는 김유신장군명화전연혁비(金庾信將軍明化殿沿革碑)가 서 있고 그 아래쪽으로 당주가 거주하는 살림채가 붙어 있다. 이 당은 원래 지금 자리보다 아래쪽 한강 변에 인접해 있었던 것인데, 1941년 일제강점기 때 경원선 철도공사가 이루어지면서 현재 위치인 높은 언덕바지로 옮겨져 온 것이다. 원래 자리보다는 높은 곳으로 올라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강을 훤하게 바라보면서 지역민들의 안식처로써 역할 하여 왔었다. 1990년 개축 및 증축이 이루어져 주신을 모신 전각 이외 하주당과 당주가 거주하는 건축물들도 덧붙여 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당 바로 앞에 높다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더 한강을 바라볼 수 없는 당이 되고 만 것이다. 명화전이 존립한 된 연유는 김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서울시 성동구 행당1동 128∼901번지에 있는 아기씨당은 2001년 성동구 향토유적 1호로 지정되었고, 당굿은 2005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아기씨당의 규모와 형태는 80여 평 터 위에 기와로 된 6평의 2칸 맞배지붕 목조 한옥이다. 당 좌측으로 당주 살림집 한 채가 붙어 있는데 여기에 방 한 칸을 당주의 개인 전안(신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기씨당은 1900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현재의 왕십리역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용산에서 청량리까지 운행하는 국철이 놓이면서 당 터에 역이 들어서자 현재의 성동우체국 뒤편으로 옮겨졌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44년 성동우체국 뒤편 일대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면서 오늘날의 위치로 재차 이전하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당을 옮겨는 왔지만 재정적 여건이 어려워 수습해온 건축물을 그대로 보관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만 3년만인 1947년이 되어서 마을 유지들이 공동으로 추렴하여 당을 현재와 같이 조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68년에 당을 부분적으로 수리하고 채색도 하게 된 것이다(서울특별시, 《서울민속대관 I. 민간신앙편》1990 343-345). 아기씨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행당동 아기씨당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상달 초하루부터 초사흘 사이 상일 하루를 골라 당굿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음력 4월 보름에는 애기씨 탄신제를 드린다. 특히 시월 상달 초순에 거행되는 당굿은 그 전승의 맥을 끈끈하게 이어 오고 있어 서울지역의 마을굿 옛 정취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당굿이 오늘날까지 대대적인 규모를 갖추고 행해지고 있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지역민들이 명복 발원은 물론 화목과 단결을 모색하면서 잔치 분위기를 만든다. 당굿을 하기 위해 약 20여 일 전부터 조라술 담근다. 조라술을 담그기 위해서는 깨끗하게 목욕재계하고 부정한 일을 삼간다. 그리고 최대한 정성을 들인다. 만약 정성이 부족하던지 깨끗하지 못할 때는 조라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제물준비, 무녀와 악사들 섭외 또한 서둘러 맞춰둔다. 굿에 쓰일 제물도 상품으로만 골라 장만한다. 당굿 사흘 전부터는 당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아 부정한 인간이나 동물들의 침입을 막는다. 당굿은 당주와 잽이 당부를 중심으로 여러 명의 무녀와 악사가 참여한다. 무녀들은 굿은 물론, 장고, 제금을 돌아가며 연주한다. 잽이는 피리,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행당동 아기씨당에 대한 역사적 유래 또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 실체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마을당의 경우와 마찬가지여서 아기씨당을 포함한 전국 마을당에 관한 역사적 실체를 명확하게 밝히는 일은 간단치가 않다. 그러함에도, 행당동에 있는 아기씨당 건축물 봉건기의 기록이라던가 3대째 아기씨당을 관리하면서 당굿 의례를 담당하고 있는 당주 구술을 토대 삼아 그 실체를 더듬어 볼 수가 있다. ① 다음은 아기씨당 건축물 봉건기의 내용이다. 이 봉건기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과거에 있었던 것으로써 현재는 사진 자료와 조사보고서로만 남아 있다. <阿祈氏堂奉建記> 本祠宅杏堂洞居民崇 拜地神之祠也奉載筆 源往昔渺然未詳正確 然祠宗少建物形態與 歷代傳言綜合則推祭 二百年前奉祠也舊祀 宗年久頹落不禁恐戄 故有意人士誠出物心爰 建新宗宣敬神之道殆 解宿念 伏願 神安保佑衆民育畜 檀紀四二八O年 丁亥 三月二日起工 同年 四月 十五日 上樑 同年 五月 二十九日 落成 總工費 二十五萬圓有志獻納 造成委 檀紀 四二八O年 四月 十五日 杏堂洞會 總成員(이문웅 ‘제2편 민간신앙’ 《한국민속종합보고서》 (서울 편) 문화관광부 문화재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복개당의 <삼불제석(三佛帝釋)>은 한지를 비단에 배접하여 조성한 것이다. 무라야마지쥰이 보고한 자료에서 삼불제석은 복개당 내부 가운데에 주신으로 모셔져 있는 세조존영 그 양측에 각각 삼불(三佛) 한 장이 걸려 있다고 한 그림 중 하나이다. 삼불이라고 말한 두 개 그림(‘삼불제석’과 ‘아미타여래삼존불’)의 좌우 배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지만 삼불이라고 부르는 무신도가 세조존영 양쪽으로 각각 모셔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복개당 삼불제석은 불화의 제석천 그림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그림이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되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무속화가 불화 기법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려진 무속화는 불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그 형식이 불화와 비슷한 경우가 아주 많다. 더군다나 복개당의 <삼불제석>은 화승이 그렸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복개당의 불교식 그림 <아미타여래삼존불>을 보면 불화 영향이 얼마나 많이 미쳤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아마타여래삼존불도 무속신앙의 부처신으로 봉안되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복개당이 헐린 지 20여년이 지난 1998년, 복개당 자료 14건이 국립민속박물관 유물 공개구매에 의해 이동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산 14건의 유물 가운데 무신(巫神) 그림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관우>, <장비> 등 모두 6점이다. 복개당이 헐리는 과정에서 무신도 이외의 여타 물건들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행방이 모연하다. 무신도를 포함한 일부가 동대문에 있는 관성제군묘(동묘)로 옮겨 갔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무신도 6점만이 복개당 무신도의 전부 인지는 의문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복개당 무신도로 분류된 6점 가운데 정확하게 복개당 것으로 확인된 것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등 4점뿐이다. 이 그림들은 불화를 전문으로 그렸던 월파(月波), 삼여(三如), 행활(幸活) 등의 화승(畵僧)들이 1868년 복개당 중수 시점을 전후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국립민속박물관 보존과학팀에서 그림에 사용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