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양 낙산사 7층 석탑 시인 이 달 균 미친 듯 불기둥이 천지를 덮쳐왔다 훌훌 잿더미를 홀로 걸어 나오며 죽음이 영생(永生)의 문(門)임을 깨우쳐 주었다 설악의 끝자락이 동해에 이를 때 만나는 절이 바로 낙산사다. 수평선이 시작되는 이곳 단애에 관음보살이 계셨던가. 그 물음을 안고 의상대사는 여기까지 찾아왔으리라. 법력 깊은 기도가 통했던지 용에게 여의주와 염주를 받게 되고, “대나무가 솟아나는 꼭대기에 불전을 지어라.”라는 말씀에 따라 낙산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유서 깊은 절도 화마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2005년 4월 5일, 하필이면 식목일에 일어난 불은 홍련암 하나만을 남기고 죄다 태워버렸다. 누구도 제어 못 할 불기둥 속에서 탑은 저 홀로 걸어 나와 바다를 향해 섰다. 영생의 문은 이곳에서 비롯되는가. 이 죽음의 순간이 아니었으면 생명의 소중함을 어찌 알았으랴. 그래서인지 유난히 탑 앞에서 손을 모으는 이의 기원은 간절해 보인다. 이 7층 석탑도 조선 세조 때 낙산사 중창 당시 함께 세워진 것이다. 제아무리 석탑이라고 하나 그 화마를 온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고, 표면이 균열되는 등 상당한 훼손을 입었다. 이 탑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안성 봉업사터(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8-5) 찾아가기 전에 죽산향교 들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비봉산 자락이 유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좋은 가람 하나쯤은 있을 만한 곳이란 생각이 든다. 폐사지 근처엔 송문주 장군 동상과 라이온스 클럽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어 묘한 부조화를 이룬다. 봉업사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 절로 꼽히는 거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초겨울의 폐사지는 황량하다. 공터에 서 있는 껑충한 당간지주가 더욱 을씨년스럽다. 두 개의 당간지주 사이로 오층석탑이 보인다. 그래도 이 두 유적이 남아 있어 상호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층석탑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고려 전기 석탑이다. 탑은 높이가 6m로 여러 장의 크고 넓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단층기단을 두고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우뚝하고 늠름한 모습이 인상적인데 상륜부가 없어진 것이 아쉽다. 하지만 이만하기도 다행이란 생각으로 마음 다독이며 그곳을 떠나왔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하긴 남는다고 영원하랴. 아무리 기원이 간절한들 어찌 세월을 이길 것인가. 우리 사랑했던 한 사람을 보내고 사라진 절을 찾아 먼 길 떠난다. 강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고, 마을 있는 곳에 절이 있었다. 남한강 유역 폐사지를 오롯이 지키는 거돈사터 삼층석탑. 곳곳에 층층이 쌓여있는 석축 흔적만으로도 당시 웅장한 절의 크기와 공력을 짐작케 한다. 석탑 뒤 대웅전 터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공터엔 커다란 불상의 대좌가 놓여있다. 석탑 앞에 부서진 채 놓인 배례석엔 연꽃 모양이 선명하다. 다 사라진 가람에 견주어 쁫밖에 탑은 의연하다. 이 탑은 흔히 보던 것들과 달리, 흙을 둔덕지게 쌓아 단을 만들어 세웠으니 폐허 속에서도 자태가 늠름히 드러난다. 탑신 자체에 별다른 장식이 없어 밋밋해 보이나 오히려 그런 고졸함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연지 곤지를 찍지 않았다고 미인을 알아보지 못할 것인가. 사람을 잃고 탑을 얻었으니 크게 슬퍼할 일은 아니다. 버려진 이를 버려두고 담담히 돌아올 수 있어 좋았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양 진전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석탑도 요염한 맵시 뽐낼 때가 있다 밤이면 비단자락 날리며 하늘 오르다 낮이면 짐짓 모른 척 침묵으로 서 있다. 팔부신중 구름에 앉아 세상 굽어보고 천인상(天人像) 기단(基壇)을 나와 은하에 닿아라 서라벌 천년의 노래가 이곳까지 들려온다. 진전사터(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37번지)는 수평선 멀리 동해바다를 향한 곳에 있다. 낙산사 들러 이곳으로 향하는 길은 자연이 좋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설악이 뻗어오다 끝나는 지점에 이 진전사터가 있다. 1960년대 이전까지 절 이름이 둔전사로 알려져 왔는데 도의선사가 이 절에 주석했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이 절터는 자연 지세를 최대한 활용한 대규모 산지가람으로서 창건 때부터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축조된 가람이라 생각된다. 삼층석탑은 요염을 뽐낸다. 자세히 보면 여러 부조 형상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가히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까닭을 알겠다. 천의 휘날리며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비천들은 여러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 이 달 균 사명대사 이름을 딴 절이면 되었지 석탑 하나 선 자리가 뭐 그리 중할까 이 몸은 요사체 지키는 문지기면 족하다네 낙엽 지는 날 표충사 간다. 기실은 억새 보러 재약산 간 김에 절에 들른 것이다. 산에서 내려와 표충사 약샘에서 목을 축인 후 경내를 돌아본다. 이 절 삼층석탑은 좀 특이한 곳에 서 있다. 대웅전 앞마당이 아니고 출입문 안쪽 요사채가 있는 공간에 석등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조선후기 사명대사 모신 사당인 표충사(表忠祠)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가람배치가 크게 바뀔 때 같이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별한 생각 없이 대충 세워 둔 것이라 짐작되지만 정작 탑은 의연히 서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것치곤 상태가 양호하고 조각미도 좋은 편이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 - 이달균 뒷짐 진 채 탑은 걷고 절은 그저 못 본 척 때 이른 산천재 남명매 진다고 그래도 비로자나불 아는 듯 모르는 듯 부처는 산을 보는데 보살은 안개를 본다 물은 갇혀 있어도 연꽃을 피워내고 흘러서 닿을 수 없는 독경소리만 외롭다 벗들의 전화음도 저 홀로 길을 잃을 때, 머뭇거리지 말고 지리산 내원사 가자. 그곳에 닿기 전, 남명 조식이 기거하던 산천재에 남명매(南冥梅) 진다 하여 잠시 들렀다. 그 여정에 있어 남명매가 덤인지 내원사 석탑 구경이 덤인지 굳이 선후를 잴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내원사는 산청군 삼장면 장당골과 내원골이 합류하는 곳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되도록 여름은 피하고 봄가을 혹은 초겨울쯤이면 더 좋다. 장당골 계곡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반야교다. 비 온 뒤라면 이 다리 위에서 물안개가 피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탑은 대웅전 앞에 서 있다. 원래 흰빛이었을 화강석은 불에 타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도굴꾼에 의해 훼손 상태가 심하여 원래의 미려한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디 번듯한 탑만 탑이랴. 오면서 본, 지고 있는 매화도 꽃은 꽃이었다. 지리산 산안개에 상륜부가 감춰진 얼룩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 이 달 균 하늘은 여남은 평, 구름은 대여섯 말 빛은 딱 그만큼만 탑을 비춰주신다 길 잃은 별들도 잠시 쉬어가는 시간인 듯 연곡사의 내력이야 여기서 다 말할 필요가 없지만, 특별히 밝혀두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이 절은 우리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친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조선조 때엔 승병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07년엔 항일운동의 본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한국동란 때 다시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었다. 탑은 이런 수난사를 몸소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기단은 여러 개의 석재로 이뤄져 있고, 3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 윗면의 경사는 경쾌한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의 추켜올린 선이 우아하다.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김제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 이 달 균 버려진 날들이 서럽다면 내게 오라 눈물이 켜켜이 쌓여 옹이진 돌이 되었다면 맨발로 홍예석문 지난 금산사에 들어라 탑은 왜 이 모양으로 오늘에 이르렀나 하단과 상부는 흰빛, 몸체돌은 검은빛 앞앞이 말 못 할 사연, 차라리 묻지나 말걸 아서라 하늘 둘 가진 이가 어디 있으랴 싸락눈 내리는 모악산 저문 산사 길 잃고 동무도 잃고 범종소리에 젖는다 금산사에 이른 시각은 늦은 오후, 절집으로 산 그림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마음이 그래서일까. 그림자마저 고색창연한 빛으로 다가온다. 그 어둠은 차츰 단아한 탑을 감싼다. 밝은 화강암으로 만든 사각형의 탑이 아니라 벼루를 제작하는 검은 빛의 점판암으로 만든 둥근 육각다층석탑이어서 정감을 더한다. 대부분의 탑이 그러하듯 이 탑도 사연이 많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나 원래는 금산사에 속한 봉천원에 있던 것을 현재의 대적광전 앞으로 옮겨 놓았다. 탑신은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맨 위 2개 층에만 남아 있으며 상륜부 머리장식은 흰 화강암 조각을 올려놓아 썩 조화롭지 못하다. 삿갓이 없다고 모자를 씌운 격인데, 없으면 없는 대로 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 이 달 균 두륜산 서녘 발자국 스미듯 내려오면 남도 땅끝 지나는 새의 길을 말하리라 아직은 열반의 잠을 청할 때가 아니다 에워싼 안개엔 이끼가 묻어 있고 바위는 더 무거운 침묵으로 밤을 맞는다 잠시 전 미륵 다녀가셨나 주위 더욱 고요하다. 남도 땅끝마을 해남 간다면 맨 먼저 떠오르는 곳, 바로 대흥사(大興寺)다.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오른 명찰이다. 가람의 아름다움은 물론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유서 깊은 절이니 귀 기울이면 부처님 목소리도 들려올 듯하다. 이 삼층석탑은 두륜산 봉우리 부근의 북미륵암에 세워져 있다. 탑신은 거뭇거뭇 돌이끼가 묻어 있으나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다. 탑 구성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 네 모서리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상륜부엔 머리장식 받침과 연꽃모양 장식을 했다. 이와 함께 보물 제48호인 북미륵암 마애불좌상, 서산대사 유물이 보관된 보장각, 웅진전 앞에 선 보물 제320호 대흥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이 달 균 거기 절이 있었다 한 왕조가 있었다 무너진 계백의 하늘은 어떤 빛이었을까 아득한 역사의 성문을 여는 열쇠는 내게 없다 시방 나침반은 어느 곳을 향해 있나 낙화암의 아우성도 장수 잃은 말울음도 조용히 돌에 가둔 채 석탑은 말이 없다 탑을 우러러 본다. 정읍에도 이보다 높은 건물은 즐비하다. 그러나 천년이 훨씬 지난 6세기경, 정림사지에 우뚝 세운 이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견할까. 이런 정도라면 건립 당시 석가세존의 나라를 칭송하여 무지개라도 찬연히 걸리지 않았을까. 이 탑은 그날의 황홀과 감동, 백제의 흥망성쇠를 재는 가늠자임에 틀림없다. 안타까운 것은 신성한 탑신에다 백제의 멸망과 연관 있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글을 새겼다니…. 수난의 역사가 가슴 아프다. 분명한 것은 이 탑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 등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 잊힌 역사의 성문을 여는 열쇠는 내게 없다. 낙화암의 전설과 황산벌의 흙먼지를 떠올리며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를 걸어볼 뿐이다.(시인 이달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