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 쪽은 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논밭은 본래 척박해서 물난리와 가뭄이 가장 먼저 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항산(恒産, 늘 있는 수입)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운데 줄임)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는 실정이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모아야 연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거의 파산 상태의 고을을 다시 일으키고자 임금에게 올린 진폐소의 일부이다. ▲ 금게 선생의 철학과 청빈한 삶이 담긴 금계집(退溪集) 그의 글은 이어진다. 그리하여 역사(役事)를 못하고 도망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일족과 인근 이웃에 책임을 분담시켜 부세를 징수하려고 하니 이들이 어떻게 배를 채우고 몸을 감쌀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물고기를 끓는 솥에서 키우고 새를 불타는 숲에 깃들게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자애로운 부모라도 자식을 잡기 어려운데 임금이 어떻게 백성을 끌어안을 수 있겠
▲ 이하복 선생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충남 서천 이하복 종가를 찾아가는 날, 서둘러 용산에서 무궁화 열차를 탔다. 얼마 만에 기차를 타보는 것인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들판이 시야에 들어오기도 전에 나는 오늘 방문하는 청암 이하복(靑菴 李夏馥, 1911~1987) 선생에 대한 자료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청암 선생의 삶의 발자취를 떠나는 길은 미리 친절하게 교통편을 알려준 종부 이옥진 여사 덕에 헤매지 않고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취재를 요청하느라 전화를 건 기자에게 종부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서천역에 내려 택시를 탔다 그리곤 이내 동강중학교로 방향을 잡았다. 학교 행정실장님의 안내로 아담한 학교 전경을 찍었다. 이곳은 청암 선생이 세운 학교이다. 50여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학교지만 교정에서 만난 학생들은 기자를 보자마자 너나없이 해맑은 인사를 한다. 이하복 선생의 철학이 전해졌을까? 학생들에게 설립자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자세한 설명은 주저했지만 설립자가 이하복 선생님으로 대단히 훌륭한 분이었음은 알고 있었다. 취재의 시작이 정말 기분 좋다. 10대 때 소작인 아이들에 야학 어른들 반대에도 여동생 몰래 소학교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11) ▲ 2013년 4월 정부표준영정 제91호로 지정된 장계향 선생 영정 시집 와서 시아버지와 함께 병자호란에 굶주린 주민 보살펴 내가 이루지 않은 재산 상속 받을 수 없다 맨몸으로 분가 분가 뒤 도토리숲 만들어 빈민 구제, 아들을 7현자(七賢者)로 키워내 동아시아 최초로, 한글로 쓴 여성조리서 ≪음식디미방≫ 펴내 ▲ 늙이 이의 딱한 사정을 표현한 장계향 선생인 쓴 학발시((鶴髮詩) 백발 늙은이가 병들어 누웠는데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보내네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보내니 어느 달에나 돌아올 것인가? 백발 늙은이가 병을 지니고 있으니 서산에 지는 해처럼 생명이 위급하네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서 하늘에 빌었으나 하늘은 어찌 그렇게도 반응이 없는고 백발 늙은이가 병을 무릎 쓰고 억지로 일어나니 일어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네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아들이 옷자락을 끊고 떠난다면 어찌 할 것인가 이 시는 조선시대 유일하게 여성군자로 불렸던 장계향 선생이 쓴 것으로 백발노인의 딱한 사정을 표현하는 시(鶴髮詩)라는 제목인데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에 있는 시이다. 이런 시를 쓴 이는 과연 어떤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만취당, 김사원 선생이 1584년 지은 건물로 한번도 해체 복원되지 않았다. ▲ 한석봉이 쓴 만취당 현판 송은공의 어진 자손이요 퇴계의 문도였네 만취당을 짓고 수양을 쌓았으니 옛날 만년송 언저리라 나를 알아주는 이 드물어도 품은 생각 손상되지 않았다네 후손에게 은혜 베풀었으니 그 성광 지금에 빛나도다 위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만취당 김사원(金士元, 1539(중종 34)1601)의 묘갈명(墓碣銘, 묘비에 새겨진 죽은 사람의 행적과 인적 사항에 대한 글)이다. 대학자 채제공이 김사원 선생의 묘비에 새긴 글을 보면 김사원 선생이 어떤 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교통편도 불편한 경북 의성 사촌마을의 만취당(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만취당길 17)에 가는 날은 막바지 더위가 숨을 헐떡이게 했다. 하지만, 이웃에게 베푸는 마음이 하늘같았던 어른의 체취를 맡으러 가는 길을 더위 정도가 막을 수는 없었다. 김사원의 14세 종손 김희윤(金熙允) 선생은 온화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아준다. 경북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된 만취당(晩翠堂)은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 만취당 김사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논산의 명재(윤증)고택을 찾아가는 날, 비는 오락가락하고 더위도 제법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대문이 없는 집안에 들어가면서 만난 아름다운 정원과 붉게 핀 배롱나무는 불쾌지수를 깨끗이 씻고도 남음이 있었다. 누마루 같이 탁 트인 사랑채에 오르면서 고택이 주는 편안함 그 이상의 운치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사랑채 앞 정원 의전과 의창제도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 종가는 나눔을 실천한 집으로 유명합니다. 어떤 나눔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사랑채에서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이는 명재의 12대 후손인 윤완식(尹完植·1955~) 선생. 그는 서울에서 사업하다 15년 전 모든 걸 접고 귀향했다고 한다. 원래 종손은 형님이었지만 몇 년 전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현재 봉사손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 종가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명재의 12대 후손인 윤완식(尹完植·1955~) 선생 “명재 할아버님의 큰아버지 윤순거(尹舜擧) 할아버님 이후 우리 집안은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해서 의전(義田)과 의창(義倉)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윤순거 이후 윤씨 노종파는 다시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통천댁이라 불렸다는 강릉 선교장을 찾아가는 날은 비가 매섭게도 내렸다. 언론은 이런 비를 호우라 부르지만 우리 겨레는 무더기비나 억수, 채찍비로 불렀다. 이런 비속에서 사진은 제대로 찍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선교장 이강백 관장과 어렵사리 잡은 약속을 깰 수는 없었다. 다행히 강릉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자 비도 잦아들었다. 선교장의 이웃사랑을 많은 이에게 알리라는 하늘의 도움일까? ▲ 아름다운 선교장 전경 터미널에서 택시로 5분 거리라지만 10분은 족히 될 것 같다. 아니 빨리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 속에 청청하게 자리 잡은 선교장을 빨리 만나고픈 마음이 조바심을 낸 것일 게다. 선교장은 효령대군 11세손으로 가선대부를 지낸 이내번(李乃蕃1703~1781)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300년을 이어온 집이다. 기자를 기다리고 있던 이강백 관장은 인상이 우선 선하고 소박하다. 차분하고 기품이 있는 생활한복 차림에 말투도 가식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이웃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통천댁 먼저 이웃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통천댁 이야기를 해주시죠. 나는 대뜸 본론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실 통천댁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순창의 양사보 집안을 찾아가던 날은 제법 무더위가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완주순천간 고속도로 완주에서 순천 방향으로 가다가 오수나들목(I.C)에서 빠져나간다. 완주에서 오수나들목까지 무려 10여 개의 굴(터널)이 이어지며 두메(깊은 산골)에 왔음을 실감케 한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사통팔달이 되어 서울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순창의 양사보 집안을 찾아가던 날은 제법 무더위가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완주순천간 고속도로 완주에서 순천 방향으로 가다가 오수나들목(I.C)에서 빠져나간다. 완주에서 오수나들목까지 무려 10여 개의 굴(터널)이 이어지며 두메(깊은 산골)에 왔음을 실감케 한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사통팔달이 되어 서울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이어서 전북 순창의 동쪽 지역을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 줄기를 따라 동계면 구미리에 이르면, 고려 공민왕 4년(1355년) 무렵부터 이어져 온 650여 년 내력의 한 명문가 남원 양(楊) 씨 집안이 터를 잡고 있다. 이 집안은 대대로 욕심을 버리고 베풀며 살았던 아름다운 선비 정신의 산실로 알려졌다. (사)옥천향토문화연구소(예전 순창은 옥천현이었다.) 양완욱 사무국장의 소개로 거북이마을 농촌체험학습 추진위원장인 양 씨 가문의 29대 후손 양병완 선생을 회관으로 찾았다. 손말틀(휴대폰)에서 판소리 춘향가 한 대목이 울려나왔던 양 선생은 기자를 환한 웃음으로 맞아준다. 알고 보니 양 선생은 얼마 전까지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분이다. 전공과는 무관하게 판소리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公은 흉년 배고픈 시절 황금을 털어 가난을 규휼했네 주민들 송덕비 세워 1920년대 기근 때 연못과 12假山 만들어 마을사람들에게 일자리 마련해줘 춘궁기 소작인들에게 받은 토지세 돌려주고 돈 빌려준 채권 장부도 불태워 용호정원도 담장 밖 마을 어귀에 지어 '개인정원' 아닌 '만인의 정원'으로 ▲ 박헌경 선생이 기근 구제 차원에서 취로사업으로 만든 용호정과 연못 공의 높은 덕은 자비와 사랑으로 공평하고 균등했네 힘을 다하시어 조상을 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황금을 덜어내 가난을 구휼했네 흉년 배고픈 시절에 고달픈 사람들을 구제하여 백성을 편케 했네 바다와 같은 은혜요 산과 같은 자비심이네 집집마다 기리는 소리 넘치고 사람마다 입을 모아 이 비를 만들었네 온 마을이 정성과 감격으로 돌을 세워 이웃으로 만들었네 이는 진주 박헌경(朴憲慶) 선생 송덕비에 적힌 글이다.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 가면 용호정(龍湖亭)이란 정자와 연못 그리고 한국식 정원 용호정원(龍湖亭園)이 있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입구)에는 크고 작은 송덕비 7개가 나란히 정원을 찾는 이를 반갑게 맞이한다. 이 송덕비는 포악한 지방 수령의 눈치를 보다가 마지못
[그린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 한국사람 치고 경주 최부잣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최부잣집은 한국 종가 가운데 나눔을 실천한 가장 대표적인 종가로 꼽힌다. 하지만, 최부잣집을 아는 사람들도 진정 그 속내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좀 더 깊이 있는 나눔의 삶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곳을 취재하려면 경주와 서울 두 곳을 찾아야만 한다. ▲ 경주 최부잣집 12대 종손 최준 선생(1884 ~ 1970), 나눔정신을 확실히 실천한 분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자금을 댔으며, 해방 뒤엔 영남대학교에 전 재산을 기부했다. ▲ 경주 최부잣집 종택 전경(경주 최부잣집 제공) 원래 최부잣집 종택은 경주시 교동에 있으며, 주손(이 종가는 특히 종손이 아니라 주손이라 한다) 최염(81) 선생은 수도권에 살고 있고,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사무실(경주최씨중앙종친회 회장)이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 먼저 종택을 찾아 사진을 찍고 종택을 관리하고 있는 최용부 선생을 찾아보기로 했다. 찾아간 날은 여름 기운이 완연한 6월 1일이었다. 기다렸다 반갑게 맞아주는 최용부 선생은 자신을 종택 관리인이면서 경주광광지킴이로 소개한다. 경주를 아끼는 시민으로 경주 관광의 문제점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