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일 수가 있지만, 그럴 적에는 한쪽 어깨에 하나씩 따로 맡겨야 메었다고 할 수 있다.우리가 어릴 적에는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학교에 다녔으나, 요즘은 유치원생에서 대학생까지 모두 책가방을 등에다 짊어지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책가방을 지고 다닌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메고 다닌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가 말뜻을 올바로 가려 쓰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메느냐 지느냐 하는 것은 책가방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깨에만 맡기느냐 등에다 맡기고 어깨는 거들기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메다’는 어깨에다 무엇을 걸치거나 올려놓는 노릇이다. 이때 ‘무엇’이란 장대나 통나무, 보따리나 보퉁이를 비롯하여 어깨에 얹혀 있을 만하면 가릴 것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한 쪽 어깨에만 맡겨야 메는 것이라 한다. 굳이 두 쪽 어깨에 맡겨도 메는 것일 수 있지만, 그럴 적에는 한쪽 어깨에 하나씩 따로 맡겨야 메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나 하나를 두 쪽 어깨에다 걸치면 그 무엇은 어쩔 수 없이 등허리 쪽에다 맡기는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면 메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다’는 본디 ‘짊어지다’에서 ‘짊어’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또는 산조(散調)음악에 쓰이는 장단형 가운데 가장 느린 형태가 <진양 장단>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진양 1장단의 길이를 6박으로 볼 것인지, 6박×4장단으로 해서 24박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진양 장단>의 완성은 동편제(東便制)의 명창, 송흥록이 그의 매부(妹夫)인, 중고제(中古制) 명창, 김성옥으로부터 진양조를 처음 듣고, 그것을 여러 해 갈고 닦아 완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였다, 송흥록은 1780년대 태어나서 1800년대 중반까지 활동한 판소리 동편제의 중시조(始祖)로 알려진 대명창이다. 특히 그가 진양조를 완성했다는 기록은 1940년,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비치고 있는데, 구체적인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맹렬’이라는 여인과 만나게 된 배경과 헤어짐 속에서 이루어졌던 이야기이다. 명창, 송흥록이 대구 감영에 소속되어 있는 명기(名妓)로 노래와 춤이 뛰어나다는 맹렬로부터 ‘미진한 부분이 있다’, ‘더 연습해야 한다(피를 더 쏟아야 한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 곧 수긍하기 어려웠
[우리문화신문=오사카 이윤옥 기자] “이 지역은 이카이노(猪飼野)라고 불리어 고대로부터 일본과 조선반도의 사람들이 교류해 왔습니다. 약 1600년 전 미유키모리신사(御幸森神社)의 제신(祭神)인 닌토쿠왕(仁德天皇)의 즉위를 축하하여 백제(百濟)에서 도래한 왕인박사(王仁博士)가 ‘나니와즈노우타(오사카의 노래)’란 와카(和歌: 일본 시)를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일본과 조선의 선린·우호의 사절단인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12회(오사카에는 11회) 왔습니다. 이 통신사의 방문을 축하하여 쓰시마번의 통역관인 운메이(雲明)가 고대 왕인박사가 쓴 ‘나니와즈(오사카)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매화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지은 시를 한글로 써서 조선통신사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이 자료는 1994년 조선통신사 연구가 신기수(辛基秀)에 의해 효고현 다츠시의 구가(舊家) 야세가(八瀬家)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조선과의 우호·공생시대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이 가비(歌碑)를 오사카 이카이노 땅에 건립합니다.” -2009년 (평성 21년) 10월 길일, 왕인박사 ‘나니와즈(오사카)의 노래’, 일본어·한글 노래비 건립위원회- 이는 오사카 츠루하시 코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토박이말은 우리 겨레가 이 땅에 살아오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마음의 집이다. 우리 몸에는 우리 겨레의 유전 정보가 들어 있듯이, 토박이말에는 마음 정보가 들어 있다. 몸에 들어 있는 유전 정보는 쉽사리 망가지지 않으나, 말에 들어 있는 마음 정보는 흔들리는 세상에 맡겨 두면 단박에 망가진다. 지난 백 년 동안 우리는 무섭게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토박이말을 지키고 가꾸고 가르치지 못했다. 흔들리는 세상을 타고 일본말이 밀려와 짓밟고 미국말이 들어와 휘저어 뒤죽박죽되었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오며 갈고닦아 마련한 겨레의 마음 정보를 온통 망가뜨린 셈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네 마음, 우리네 느낌과 생각과 뜻과 얼은 토박이말과 함께 뒤죽박죽되어 버린 것이다. 토박이말 ‘무섭다’와 ‘두렵다’의 쓰임새도 그런 보기의 하나다. 이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모습도 속살도 서로 다른 낱말이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이들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가려서 쓸 수 있는가? · 무섭다 : 어떤 대상에 대하여 두려운 느낌이 있고 마음이 불안하다. · 두렵다 : 어떤 대상을 무서워하여 마음이 불안하다. 《표준국어대사전》 《표준국어대사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일처리에 앞서 문제점을 조사하고 옛 문헌과 자료를 살피고, 여러 사람에게 물으며, 관계자와 토론하며 더 좋은 방안을 찾으려 했다. 답을 찾은 후에는 항식(恒式, 항상 따라야 하는 형식이나 정해진 법식)으로 법제화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옳고 그른 것인지 널리 물었다. 여기 세종 4년에 한증소의 이익과 무익에 대해 논의한 예가 있다. 예조에 전지(傳旨)하기를, "병든 사람으로 한증소(汗蒸所)*에 와서 당초에 땀을 내면 병이 나으리라 하였던 것이, 그 탓으로 죽은 자가 흔히 있게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널리 물어보아(廣問便否)’, 과연 이익이 없다면 폐지할 것이요, 만일 병에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가서 보도록 하되, 환자가 오면 그의 병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기운이 약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4/ 8/ 25) * 숯이나 도자기를 굽고 남은 가마 속 열기로 땀을 내 몸의 독소를 배출하던 곳 또 다른 예로 세종 17년 좌의정 최윤덕이 국경방비에 따른 군사시설정비, 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진양조와 중몰이의 장단형에 이어, 지난주에는 중중몰이, 자진몰이, 휘몰이 장단형들을 소개하였다. 각기 다른 4각(刻)이 1장단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은 앞의 진양이나 중몰이와 같다는 점, <각>이라 함은 장단형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인데, 판소리 장단에서는 큰 형태의 개념보다는 작은 단위, 정확하게 말해, 부분적인 장단형을 의미하는 단위로 쓰이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는 진양 장단에는 6박형과 24박형, 두 종류가 쓰이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이어가 보기로 한다. 이미 이야기했던 것처럼 진양 1장단을 6박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있는가 하면, 한 장단을 24박으로 인식하는 쪽도 있다. 박의 수(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장단형이 일정하게 반복하느냐 아니면, 각기 다른 형태로 짜여 있느냐 하는 점을 더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24박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작은 장단형(6박) 4개의 복합구성에서 제1각은 밀어주는 장단이어서 <미는 각>이라 부르고, 제2각은 달아 간다는 의미에서 <다는 각>, 제3각은 맺어 준다는 의미로 <맺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말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며, 세상을 받아들이는 손이다. 사람은 말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이라는 손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말이 흐릿하면 세상도 흐릿하게 보인다. 천수관음보살처럼 손이 즈믄(천)이면 세상도 즈믄을 받아들이지만, 사람처럼 손이 둘뿐이면 세상도 둘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치에서 중국말이나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얼마든지 끌어다 써야 한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들은 우리 토박이말로는 눈과 손이 모자라서 지난날 중국 한자말로 눈과 손을 늘렸다고 여긴다. 그 덕분에 이름씨 낱말이 얼마나 넉넉하게 되었는지는 국어사전을 펼쳐 보면 알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참말이 아니고 옳은말도 아니다. ‘산’은 마치 토박이말처럼 쓰이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끌어다 쓰기 전에는 우리에게 ‘산’을 뜻하는 이름씨 낱말이 없었을까? 이것이 들어와서 비로소 ‘산’을 뜻하는 낱말이 생겨나 우리가 산을 처음 바라보고 세상을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사실은 거꾸로다. ‘산’ 하나가 들어와서 이미 있던 토박이 이름씨 낱말 셋을 잡아먹었다. ‘뫼’와 ‘갓’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에 쓰이는 여러 형태의 장단 가운데서 가장 느리게 짜인 <진양 장단>과 진양보다 조금 빠른 <중몰이 장단>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에는 중몰이 장단보다 더 빠른 중중몰이 장단형과 이보다 더더욱 빠르고 경쾌한 잦은몰이 장단, 그리고 더 빠르게 휘몰아치는 장단형에 관해 소개해 보도록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장단(長短)이란 “길고 짧은 시간의 조합”이라는 뜻이다. 판소리나 남도민요, 또는 민속 기악인 산조(散調) 음악의 경우, 가장 느린 형태는 진양 장단이다. 특히 산조음악의 경우, 느린 형태의 진양으로 시작해서 점차 빠른, 장단으로 몰아가는데, 그 빨라지는 느낌을 쉽게 느낄 수 있도록 각 장단의 명칭도 <중몰이>, <중중몰이>, <잦은몰이>, <휘몰이>, <닫몰이> 등, 00몰이, 00몰이로 그 변화를 짐작하게 만든다. 느린 형태의 <진양> 장단형과 중간 빠르기의 <중몰이> 장단형은 앞에서 악보로 살펴보았거니와 그 이후의 중중몰이 장단형, 잦은몰이 장단형, 그리고 휘몰이 장단형을 악보와 함께 소개해 보도록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비석 형태로 다듬은 돌에 불상과 상을 조성한 기록을 새긴 불비상(佛碑像)은 중국에서 북위시 때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습니다. 특히 불비상에 새겨진 글자는 조성 시기와 발원(發願)한 사람, 조성 당시의 역사·사상적 배경까지 알 수 있어 학술 값어치가 큽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그 예가 매우 드문데,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7구(軀)의 불비상이 동일 지역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은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몸체[비신부(碑身部)]ㆍ받침돌[대석(臺石)]ㆍ지붕돌[옥개석(屋蓋石)]이 잘 남아있어 비상 형식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백제 유민들이 발원하여 만든 불비상 1960년과 1961년에 충청남도 세종특별자치시[옛 연기군] 서광암(瑞光庵), 비암사(碑巖寺), 연화사(蓮花寺)와 인근 지역인 공주시 정안면에서 모두 7구의 비상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불비상들은 모두 흑회색 납석(蠟石) 계통의 돌을 사용하였고 조각 기법과 양식도 같아 같은 조각가 집단에 의해 제작됐을 것으로 봅니다. 이 가운데 4구의 비상에는 연대가 기록된 글씨가 새겨져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16년 전에 경남에서 열린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 가운데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준 생태 관광지로 첫손 꼽힌 데가 바로 창녕의 ‘우포늪’이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는 창원의 ‘주남저수지’도 거기에 못지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관광지의 이름이 하나는 우리 토박이말 ‘우포늪’으로 람사르 정신에 잘 어우러지지만, 다른 하나는 ‘주남저수지’라는 한자말이어서 아쉽고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주남저수지’는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때에 바꾸어 쓴 이름일 터이고 본디는 틀림없이 ‘주남못’이었을 것이다. ‘못’은 쓸모 있을 적에 쓰려고 사람이 땅을 파고 둑을 쌓아서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이다. 못에 가두어 두는 물은 거의 벼농사에 쓰자는 것이라 논보다 높은 산골짜기를 막아서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 못은 거의 벼농사에 쓰자고 물을 가두어 두지만, 바닥의 흙이 좋으면 연을 길러서 꽃도 보고 뿌리를 캐서 돈을 벌자고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연을 키우려고 만든 못을 ‘연못’이라 부른다. 그리고 연못은 집 안에 뜰을 꾸미느라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뜰 안의 연못에 키우는 연은 꽃을 보자는 것일 뿐 뿌리를 팔아서 돈을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