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문화편지=이윤옥 기자]
저는 할아버지와 조은애 할머니의 아들 김진동의 차녀 수옥입니다. 할아버지가 나라의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시다 납북되어 세상을 떠나신지 어언 65년이 지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때 저는 겨우 만 일곱살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들, 딸을 둔 어머니입니다
나라를 잃었을 때는 독립을 위해, 일제의 패망 뒤에는 통일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점점 잊혀 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이 여기신 고 송남헌 비서실장님이 고 김재철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과 함께 1989년에 “우사 김규식 연구회”를 창립하셨습니다. “우사 김규식 연구회”는 할아버지의 생애와 사상과 업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지금까지 모두 9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저는 김재경 회장, 서중석 교수, 심지연 교수, 김준상 총무, 손장선 서기등과 함께 이 연구회에서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 1월에 개회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러 출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라 안에서 궐기를 촉구하여 3.1 혁명의 동기를 부여하였으며 강화회의에 가서는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대한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또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가하면서 외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또 할아버지는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 국무의원, 부주석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해방 후에는 극우극좌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치고 남북협상을 이끌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생애는 온통 조국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바친 고난의 길이였습니다. 불꽃같은 삶과 태산과 같은 위업이 독립운동사와 해방정국연구사에서 당당한 주역이 아닌 조역으로 인식되어 온 것과 소수연구자들 외에 일반적으로 덜 알려지고 갈수록 망각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시대 그 누구도 할아버지를 대신 할 수 있는 분은 없었다고 자부 합니다.
할아버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거쳤던 발걸음은 미국, 중국, 만주, 몽골, 소련, 프랑스에 이르렀으며, 해방 후에는 김구, 이승만과 함께 “3영수”의 일원으로 추앙 되었습니다. 뛰어난 정세 판단과 해박한 지식은 미-일, 중-일 전쟁을 예견하고 극동문제가 일본이 전쟁에 들어가기 전에는 해결되기 어렵다고 내다보면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겸양과 지성, 정직한 처신으로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항상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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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식(1920년 장가구에서) |
망명기에는 틈나는 대로 학자적 열정을 다하여 상해복단대, 천진북양대, 남경중앙정치학원, 사천대 등 중국의 명문대에서 강의를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만큼 명문대 교수로 세익스피어 연구에 능통한 영문학자로 인정받으며, 외교력을 겸비한 빛나는 지도자는 흔치 않았는데 그렇다고 문약한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시던 지팡이로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책상을 두드리며 분노를 터트릴 만큼 호기 있는 혁명가였습니다. 그때 하지가 권총을 빼 들었다는 비화가 전해집니다.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연고가 있어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미국을 마다하고 생사를 예측하기 힘든 항일독립투쟁의 제일 전선인 중국을 선택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으로 정세가 굳혀지던 1948년 4월 남북협상론을 제기하고 북측에 “북행5원칙”을 제시, 북측이 이를 수락한 연후에 북행길에 나서는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백범도 이에 동조하여 두 김 씨의 공동제안이 되었습니다. 북행길에서는 38선 푯말을 붙잡고 “이제 내가 짚고 있는 푯말을 뽑아버려야 하겠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힘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다. 온 겨레가 합심만 한다면 곧 뽑아 버릴 수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4길 회담”을 갖고 이미 제시했던 “5원칙”과 안중근 의사 유해봉환 등을 논의 하여 부분적으로 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남북 양측의 분단세력과 외세에 밀려 성사 되지는 못했지만, 이 회담은 해방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좌, 우익과 중도 계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외국군을 철수 시키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회담이었습니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서로 화해하고 화합하고 합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해, 좌도 우도 아닌 중립노선을 확고히 견지해야만 나라의 진정한 독립도 보장되고 통일도 이룩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뿌린 합리적이고 온건한 통일정부수립노선은 남북 화해 협력의 밑거름이 되었고, 결국은 우리 민족이 가야 할 방향이고 현실적인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결코 반쪽정권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일관된 노선을 고집하고 추구하시다가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되었습니다. 그 뒤 12월 10일 만포진 부근에서 혹독한 추위 속에 병고에 시달리면서 변변한 치료도 못 받으시고 곁에 사랑하는 가족 하나 없이 외로이 혼자 돌아가셨습니다.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후손이 힘이 있으면 조상의 키가 한 뼘 더 커진다는데 그렇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 동안 많이 외로우셨을 텐데 그래도 할아버지를 기억해주시고 그 생애와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애쓰시는 여러 학자님들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일 우리나라가 좀 더 정의롭게 발전되고 통일된 국가가 된다면 할아버지께서는 덜 조명 받아도 괜찮다 하 실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인물도 아주 근사하셨던 할아버지의 손녀라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고, 주셨던 큰 사랑에 감사하며 행복합니다. 이제 편안히 쉬십시오.
김 수 옥
김규식선생의 손녀
우사 김규식 연구회 부회장
제11기 독립정신 답사단 의료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