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김공순 여사님에게 -박용규-

  • 등록 2016.01.26 10: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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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이백서른 두번째 - 2016년 1월 26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와 맞서 언어독립투쟁을 전개한 이극로 선생의 부인되시는 김공순 여사님께 편지를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극로 선생을 연구하면서, 김공순 여사님에 대해서도 글로 쓰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여사님에 대해 쓰게 되었습니다.

이극로(1893∼1978) 선생은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1929년 1월에 귀국하여 우리 말글을 지키는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29년 10월 우리말사전을 편찬하고자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고, 위원장에 뽑혔습니다. 그해 12월 24일에 김공순(1907∼?) 여사님과 결혼하였구요. 그의 나이 37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여사님의 나이는 23살이었지요.

김공순 여사님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넘겨준 김창걸의 막내딸이었는데 김창걸은 이 일로 일제 경찰에 잡혀 희생되었습니다. 김공순 여사님은 평남 강서 진남포에서 출생했고, 평양여고와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시기 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지요.

이극로 선생은 다른 회원과 달리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만을 전담하고자 직업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한글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이극로는 아내나 자식을 위해 희생치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사회에 공헌하려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런 남편 이극로 선생을 아내 김공순 여사님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내조하였지요. 가족 부양과 자녀 양육을 김공순 여사님이 감내하였던 것입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출범은 하였으나, 사전편찬을 위한 재정은 확보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사전편찬회의 재정은 너무도 어려워 사전 편찬실 직원의 월급도 제때에 지불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자인 이극로 자신의 생활비는 있을 턱이 없었지요. 다행스럽게도 그의 부인이 보통학교의 교사로 있었기에, 가계는 전적으로 부인에게 의지하여야 했습니다.

김선기·한징·이윤재 등 사전편찬을 전담할 집필위원에게도 최소한의 생활비도 지급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1932년경에 이극로는 사진기와 망원경과 한 벌의 양복을 안국동에 있는 일본인이 운영하고 있는 전당포에 저당을 잡히고 10원의 돈을 구하여 그 달의 기근을 면할 수밖에요.

나중에는 옷 찾을 돈마저 없어 사진기와 망원경과 함께 전당포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에 있는 재산인 금비녀와 금반지와 금귀이개도 전당포에 저당을 잡혔습니다. 이로써 250원을 마련하여 굶고 있는 사전 편찬 위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위기를 모면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되찾을 돈이 없어 이것마저 전당포에 들어가 버렸지요.

 

   
▲ 이극로 선생 가족사진(부인 김공순 여사와 자녀들) 1939년 12월 24일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촬영. 이종수 님 제공

 

이극로 선생은 아내에게 너무도 미안해서 “내가 지금 하는 사업이 성공만 하면 당신 열 손가락에 금반지, 보석반지를 다 끼워주겠다.”라고 말하며 아내를 위로하였습니다. 집안 형편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1936년 3월에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추진해온 사전편찬 업무를 인계받았습니다. 이극로 선생은 같은 해 사전편찬 후원회도 조직하여 재정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였지요. 1942년 봄에 조선어대사전의 원고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조판 단계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사전 편찬을 중단시켰습니다. 일제는 사전원고와 서적들까지 전부 압수하였구요. 이극로 선생은 조선어학회의 대표여서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무실과 겸하고 있던 자택에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함흥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일제 재판부는 징역 6년형을 언도하였고 이극로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한 뒤 8월 17일에야 석방되었습니다.

1940년대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어학회의 대표인 이극로 선생은 가정 경제는 아내에게만 맡기고 오직 민족어 규범을 수립하고,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감옥살이까지 감내하였습니다. 이극로 선생이 활동한 14년간 언어독립운동 기간과 약 3년간 옥고 기간 동안, 김공순 여사님은 남편을 돕고 집안을 지키며 아이들을 잘 키웠지요.

실로 암울한 일제치하에서 김공순 여사님은 애국선열인 이극로 선생의 배필로써 훌륭한 처신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극로 선생의 빛나는 업적 배경에 김공순 여사님의 헌신적인 내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확신합니다.
 

   
 

박 용 규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한국근대사 전공) 졸업(문학박사)
현재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저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이극로 평전」, 2005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공저), 2010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2012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 2013
「조선어학회 33인」, 2014.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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