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무게, 견뎌내거나 무너지거나

2021.06.28 11:25:42

《조선 임금 잔혹사》, 조민기, 책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치열했다. 고단했다. 그리고 잔혹했다.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투쟁이었다. 한 나라의 군주가 된 후에는 무궁한 영광과 환희에 가득 찬 나날이 이어질 것만 같지만, 실상은 가혹한 왕관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왕은 왕실 어른과 왕비, 후궁, 세자와 같은 가족에서부터 사관, 신하에 이르기까지 안팎으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사생활 역시 국가대계와 직결되는 공적인 영역이었기에 감시 어린 눈길이 따라다녔고, 성리학 군주의 이상에 따라 언제나 완벽할 것을 요구받았다.

 

왕도 결국 인간이다. 그런 중압감을 오랜 시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좋은 음식과 약재에도 조선왕의 평균 수명이 약 47살로 그다지 길지 않았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저자 조민기는 《조선 임금 잔혹사(책비)》를 통해 왕들이 겪어야 했던 잔혹하리만치 거센 압박감을 묵직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서사로 풀어낸다.

 

 

저자는 특히 조선의 왕들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에 주목한다. 왕위에 오르게 된 경위 자체가 재위 중의 치세나 후계 선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에서 왕과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되고, 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를 이어받는 ‘정상적인’ 승계 과정을 거친 왕은 극히 드물었다.

 

태어날 때부터 왕의 운명이 예정되어 있었던 극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엉겁결에 왕이 되거나, 살벌한 투쟁을 거쳐 왕위를 쟁취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왕이 되고자 했으나 끝내 왕이 되지 못한 채 세자로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저자는 조선왕조를 수놓은 27명의 왕들 가운데 9명의 왕과 3명의 세자를 뽑아, ‘왕으로 선택된 남자’,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왕으로 태어난 남자’, ‘왕이 되지 못한 남자’의 4부로 나누었다.

 

1부 <왕으로 선택된 남자>에서는 세종과 성종, 중종을 다룬다. 이들은 모두 차기 왕으로 일찌감치 제왕학 수업을 받던 인물이 아닌, 주변의 정치적 결단으로 갑자기 왕이 된 인물들이었다. 왕으로 선택된 이들은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고, 재위 기간 내내 갑자기 떠맡게 된 왕의 소임을 다하느라 고군분투했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세종과 성종은 훌륭히 그 역할을 해냈으며, 중종 역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2부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에서는 선조, 광해군, 인조를 조명한다. 조선왕조 개국 이래 최초로 방계 혈통으로 왕위를 이은 선조는 사실 ‘왕으로 선택된 남자’기도 하지만, 왕이 되고 나서도 진짜 ‘왕이 되고 싶었던’, 군주로서의 권위를 갈망한 임금이었다. 광해군은 피난 가버린 부왕 선조를 대신해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치러내고, 형제와 왕위를 다투는 처절한 투쟁 끝에 왕이 되었으나 성군의 자질은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스러져갔다. 인조는 반정을 스스로 기획할 만큼 왕의 자리를 갈망했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쟁취해 낸 인물이었으나, 저자는 ‘단언컨대 가장 완벽한 최악의 군주’로 그를 기록하며 실패한 왕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3부 <왕으로 태어난 남자>에서는 비교적 탄탄한, 혹은 완전무결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던 연산군, 숙종, 정조를 다룬다. 그러나 이들이 확고한 정통성으로 가지게 된 높은 자존감은 때로는 비극을 잉태해냈다. 연산군은 그의 시대가 가진 많은 장점을 태평성세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왕관의 무게 속에 파멸해갔다. 숙종은 강력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환국을 되풀이하면서 협치의 기반을 무너뜨렸고, 정조는 말 그대로 초인적인 노력으로 살아남아 조선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정조 사후 조선은 사실상 내리막길이었다.

 

4부 <왕이 되지 못한 남자>에서는 군주로서의 삶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끝내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세자 3인방, 소현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를 다룬다.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취약한 정통성으로 열등감에 시달렸던 부왕 인조와 영조의 희생양에 가까웠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리청정을 할 만큼 부왕과의 관계도 좋았고,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릴 정도로 성군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나 불과 22살의 나이로 숨지며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꺼뜨렸다.

 

이렇듯 힘겹게 왕위에 오르고, 보위를 지키기 위해 고뇌하고, 원만한 왕위 승계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모습을 보노라면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나라의 수장이었던 이들의 인간적인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지며 과연 왕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되 현실에서는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어찌 보면 가장 모순적인 구조 속에서 살아야 했던 불행한 인생이었다.

 

타고난 천성이 왕과 맞지 않아, 본성과 환경의 괴리로 망가진 임금도 많았다. 대표적인 임금이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차라리 광대로 태어났다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최고의 예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대간들의 공세에 연산군이 응수한 기록을 보면, ‘이게 진짠가’ 싶을 정도로 자못 웃기기까지 하다. 저자가 보여주는 연산군 막말 어록은 마치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느낌이다.

 

자신들의 고귀한 소임과 명분에 도취된 언관들이 ‘대간의 말은 약과 같으며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하자 연산군은 ‘대신 마시라’고 답했다. 또한 새로 임명된 감사가 술을 많이 마시므로 관리로 적당하지 않다고 언관들이 비난하자 ‘물만 마시는 사람을 뽑으면 되겠느냐’고 대꾸했다. 그 외에도 임금이 눈병을 핑계로 경연에는 나오지 않고 밤새 연회에서 술을 마신 일을 추궁하자 ‘술을 눈으로 마시느냐’고 반문했고 상소의 말을 곡해했다고 변명하자 ‘그 말이나 이 말이나 다 똑같으니 술과 고기나 먹고 빨리 돌아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입만 열면 ‘연산군 어록’이라고 할 만한 막말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p.201)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났고 왕위에 오른 이상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하건만, 특권은 모두 누리면서 책임은 회피하는 못난 모습을 보인 왕도 많았다. 전란이 일어나자 백성은 팽개치고 도성을 버린 선조, 그리고 그 못난 모습을 또 되풀이한 인조는 왕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참 나쁜’ 사람이었다.

 

저자는 무척 진중하고도 흥미진진하게 각 왕의 서사를 꼼꼼히 담아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조선 후기 붕당의 전개 과정 역시 자연스럽게 습득될 것이다. 중간중간 토막 상식으로 ‘조광조, 홍국영의 출세로 알아보는 조선의 관직 및 벼슬’ 등 참신한 꼭지를 넣어 흥미를 더했다. 조선시대 왕들의 명멸을 한 편의 대하사극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읽고 싶은 독자라면, 바로 이 책을 권한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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