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대 여성독립운동가, 투쟁을 이어가다

2021.12.10 11:30:57

경북인의 만주망명 110주년 기획 보도–경북 여성 항일투쟁기<5>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모두 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5편은 망명한 독립운동가 3세대라 할 수 있는 허은과 이해동에 대해 집중 조명한다.

 

경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은 1910년대부터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당시 어린 소녀였던 허은과 이해동 등은 만주망명 1~2세대에 의해 민족의 대들보로 자라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국땅에서 자라면서 모진 고초를 감내하며 조국 독립을 열망하였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견딘 ‘허은’ 여사

 

허은(1907~1997)은 1907년 1월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범산(凡山) 허형(許蘅, 1843~1922)이며 재종조부로 방산(舫山) 허훈(許薰), 성산(性山) 허겸(許蒹), 허위(許蔿) 등이 있다. 모두 당대 의병을 이끌거나 부민단을 조직한 독립지사들이다. 이러한 집안의 내력으로 일제 치하에서 항상 감시와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12년부터 순차적으로 만주 망명을 떠났고 1915년 9살 어린소녀였던 허은도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 망명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린 나이에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1920년대는 만주 독립군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청산리 전투의 대승 이후 일제의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22년 만주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석주 이상룡의 손자인 이병화와 혼인하면서 독립운동에 더욱 헌신하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은 남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해야하는 고난을 예견한 길이기도 했다.

 

허은은 항일투사들의 그림자가 되어 온갖 일을 감내했다. 서로군정서의 독판이었던 시조부 이상룡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시댁인 이상룡의 집은 그 자체로 독립운동 본부와 같았기에 조직원을 먹이기 위해 개인적 삶을 포기해야 했다. 음식 마련은 물론 의복 준비까지 독립운동의 후방에서 묵묵히 감당하였다.

 

1932년 시조부 이상룡이 순국하면서 고통스러운 귀국길에 올랐다. 시댁이 있는 경북 안동에 도착했으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어려운 생활을 지속하였다. 남편 이병화는 자주 감옥에 오갔고 시조모와 시부모의 상까지 당했다. 그렇게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이어진 한국전쟁 속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광복된 조국에서조차 고난의 연속이었다. 허은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딘 증인이자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였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묵묵히 보좌한 ‘이해동’ 여사

 

이해동(1905~2003)은 190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진성이씨 만화공 주손인 이강호다. 1912년 부친 이원일은 만주 망명을 결심했다. 일곱 살 어린 소녀였던 이해동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부친 이원일은 경학사 조직에 참여하여 간도지역 독립운동 기반 조성에 매진하였다. 1921년 이해동은 일송 김동삼의 아들인 김정묵(金定默)과 혼인하였다. 이해동 역시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이해동은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의 며느리로서 만주에서의 집안일을 도맡아 감내했다. 생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며 독립운동가인 집안사람들을 묵묵히 보좌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만주에서의 어려운 생활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77년이 지난 1989년에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채 열 살이 되지 않았던 어린 소녀 허은과 이해동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반평생을 이국만리 만주땅에서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집안 어른들을 도와 가족과 지역사회를 지켜내는 일을 전담하였다. 독립운동 집안과의 혼인은 이후의 삶에서도 독립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계속하게 하였다. 이들 만주 망명을 함께 떠난 여성들의 희생과 각자의 자리에서 감내한 역할이 있었기에 만주 항일투쟁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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