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부부라 가부장적이라고?

2022.05.05 11:08:55

고난과 역경을 존중과 신뢰로 이겨내는 지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5월 21일 부부의 날을 맞이하여 지난 1일 “조선판 부부의 세계”라는 주제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5월호를 펴냈다.

 

조선 사회를 가부장적 사회로 볼 수 있으나 그 시대에도 믿음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해야 부부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은 지금과 같았다. 믿음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즐거운 일에 같이 기뻐하고, 고난의 시간을 함께 이겨냈다. 한편 배우자의 죽음으로 백년해로하지 못한 경우 절절한 심정으로 그리워하는 글 구절이 지금 읽어도 애절하기만 하다. 이번 호에서는 한평생 자신의 짝이 되어 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 선조들의 기록을 통해 부부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현존 유일 재치와 지혜를 주고받은 조선시대 부부의 해로연

 

박지애 교수의 [2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전해진 부부의 지혜, <노부탄>과 <답부사>로 들여다본 조선시대 부부의 삶]은 해로연(偕老宴)을 앞둔 노부부의 마음과 삶을 알아본다. 아래 가사(歌辭) 작품은 김약련(斗庵 金若鍊, 1730~1802)이 그의 아내 순천김씨(1729~1799)가 쓴 <노부탄(老婦歎)>에 답을 쓴 <답부사(答婦詞)>이다. 초혼하여 40여 년을 지나 함께 회갑을 맞는 일이 쉽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해로연(偕老宴)을 앞둔 이들 부부의 모습에서 소박하고 아름다운 노년의 행복이 읽힌다.

 

   

   우리ᄂᆞᆫ 이럴만졍

   結髮夫婦 아니론가

   궂즌 일 됴ᄒᆞᆫ 일을

   마조 안자 지나 잇고

   今年의 님재 回甲

   明年이 내 나ᄃᆞᆫ ᄒᆡ

   이 일도 쉽지 아녀……

   婦人도 내 말 듯고

   싱그시 웃노매라

   어우와 浮世人生이니

   이렁구러 즐기리라

 

 우리는 이럴망정

 처녀와 총각으로 만나 초혼한 부부가 아니던가

 궂은 일 좋은 일을

 마주 앉아 지내왔고

 올해에는 당신의 회갑

 내년이면 내가 났던 해

 이 일도 쉽지가 않아

 부인도 내 말을 듣고

 싱긋이 웃는구나

 어우와 덧없는 인생이니

 이렇게 저렇게 즐기리라

 

이렇게 서로 주고받은 아내와 남편의 가사 작품은 김약련이 남긴 문집 《두암제영(斗庵題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치 편지글처럼 주고받은 가사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이렇듯 주고받은 대상이 부부인 경우는 현재까지 <노부탄>과 <답부사>가 유일하다.

 

<노부탄>에는 ‘늙은 아내의 탄식’이라는 이름값이 무색하게도 자탄과 원망의 표현은 거의 없고, 끊임없이 남편과의 다름을 보여주면서 아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조선이란 사회를 생각해 보면 그 사회가 만들어 낸 관계에 종속되어 관계에 억눌려 살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자신을 드러내면서 끊임없이 의사를 조율하고 부부관계를 새롭게 구성해나가는 방식, 이것이 〈노부탄〉에서 보여준 부부관계에서의 아내의 지혜다.

 

<답부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내의 생각에 동의하며 그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 그러나 내 생각을 올곧게 표현하고 끝까지 설득하는 의지, 그 사이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율하면서 다시 만들어가는 부부간의 관계가 보인다. 우리는 200여 년 전에 지어진 두 부부의 글을 통해 변하지 않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기생에게 흔들렸던 마음도 부인과의 의리로 제자리 찾다

 

박영서 작가는 [공처가 김 생원의 콧바람 든 날]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부부가 기생을 두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이야기를 소설로 전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심혈을 기울인 양봉이 실패한 뒤 김생원은 한동안 상심하여 술에 젖어 지냈다. 그러다 과거 합격 동기인 송 목사(牧使)가 이 고장 목사로 부임한 뒤 생긴 과거 합격 동기 모임이 그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본래 빈한했던 김생원은 30년 전 혼인하고 처가에 들어와 산 이후 처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 돈다는 아내의 말에 출타하기에 눈치가 보여 몇 달 동안 모임에 갈 수 없었으나, 오늘은 아내가 고을에 사당패 구경을 나선 것이다. 실로 오랜만의 밤 외출에 김생원은 설렜다.

 

모임에서 대놓고 자존심 긁는 목사를 피해 잠자리에 들려던 김생원은 마음 한쪽에 애타는 심정을 품고 있던 기생 종기가 권하는 밤 시중 이야기에 심히 내적으로 갈등하다가 어려운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한 아내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 거절했으나 이미 함정에 빠져버린 뒤였다.

 

자다 깨 부인이 집에 오기로 한 시간에 맞추기 위해 헐레벌떡 집에 도착한 김생원은 부인의 통곡과 서슬 퍼런 말을 맞닥트려야 했다. 밥도 거르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부인 덕에 쫄쫄 굶으며 고생하던 김생원은 찾아온 기방 행수를 반색하며 맞았다. 기방 행수에게 자신의 곡절을 설명해달라 부탁했고, 기방 행수는 기생과 정을 나눈 적이 없다고 대변했다. 믿지 못해 계속 되묻는 부인에게 김생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중용(中庸)》에서는 도(道)의 단서가 부부관계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소. 내 비록 고관대작에 나아가지는 못하였으나, 군자의 덕을 잃고 살지는 않을 것이오. 나의 도는 당신에게 있소.”

 

제사상에 올린 커피 한 잔 소중한 이를 그리워하다

 

서은경 작가의 [스토리웹툰 - 생일 제사]에서는 시어머니 제사상에 생전 좋아했던 커피를 올린 시아버지의 쓸쓸한 모습을 보고, 막내며느리가 떠올리는 김광계(金光繼)의 《매원일기(梅園日記)》 속 이야기를 웹툰으로 담았다.

 

김광계는 아내의 부재라는 슬픔 속에서 장례를 졸곡제(삼우제를 끝낸 뒤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까지 치른 뒤, 장례를 함께 해준 모든 친지, 지인들이 모두 떠나자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에 사무친다. 아내의 생일날 아내가 좋아했던 떡, 국수, 과일 등의 음식으로 다시 상을 차리며 바빠서 자주 함께하지 못했던 아쉬움과 아내의 소중함을 더욱 깨닫는다.

 

 

 

같이 하는 시간이 만들어주는 떨리는 ‘소울메이트’ 보다는 애틋한 ‘조율메이트’

 

시나리오 작가 홍윤정은 [미디어로 본 역사 이야기-조율메이트]에서 드라마 속 부부의 모습을 살펴보며 부부는 ‘소울메이트’라기 보다는 이렇게 ‘같이하는 시간’을 통해 만들어지는 ‘조율메이트’라고 이야기한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과 <공주의 남자>에서는 홍심이와 원득이, 경혜공주와 정종은 서로를 채 알기도 전에 혼인부터 한다. 혼인 뒤 여러 사건을 ‘같이’ 해결하고, 희로애락을 ‘같이’ 겪으면서 그들은 ‘진짜 부부’가 된다. 이 모습은 ‘현실 부부’인 것이다. 함께 하는 시간은 그들이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 속에서 그들에겐 ‘동지애’가 싹텄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에서는 새끼도 못 꼬고, 장작도 못 패는 주제에 고급음식만 해내라 요구하는 ‘아쓰남(아주 쓰잘데기 없는 남정네)’이었던 원득이 티격태격했던 홍심이와 지내면서 울고 웃고, 싸우고, 서로를 위해주는 진짜 부부로 살았다. 기억이 돌아와 궐에 돌아갔지만 쇼윈도였던 세자빈과의 관계를 버티지 못했고 오로지 머릿속에는 홍심이 뿐이었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쇼윈도 부부에서 진짜 부부로의 변화를 담은 이야기였다.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은 극에서는 한눈에 반했지만, 실제로 공주와 혼인한다는 것은 집안에 아내라기보다는 상전을 들이는 것과도 같았고, ‘부마’라는 허울만 있을 뿐, 실질적 권력은 가질 수도 탐낼 수도 없기에, 야망 있는 사내라면 부마가 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문종의 죽음, 단종의 비극을 거치며 부부 사이는 굳고 단단해진다.

 

부부는 ‘소울메이트’라기 보다는 이렇게 ‘같이하는 시간’을 통해 만들어지는 ‘조율메이트’라고 이야기를 맺는다.

 

 

 

이문영 작가는 [정생의 혼례일기]에서 배 정승댁의 혼례에 갈 채비를 하던 정생이 꿈속에서 가야국 허왕후의 혼례를 겪고 깨어난 뒤 부인과 주고받는 혼례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다.

 

배 정승댁의 혼롓날에 참석하기 위해 바삐 준비하던 정생은 배정승댁 손자 배진구의 부탁을 받게 된다. 한 달 전에 미리 얘기해두었던 혼례를 주관하는 수모(首母)가 병판대감댁 일가친척의 혼례 때문에 퇴짜를 놓은 것이다. 마침 정생의 여종이 혼례 경험이 많아 수모로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고, 귀한 청나라 가흥에서 담근 소흥주를 내놓으며 부탁하니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다.

 

혼례가 있을 시간까지 기다리기 지루한 정생은 술을 마셨고, 취해 잠이 들었다.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옥이 만난 때로 꿈을 꾸게 된 정생은 수로왕이 산 아래에 장막을 쳐서 배를 타고 온 장래 왕비의 거처를 만든 것을 보았다. 이는 조선의 경우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 혼례를 치르는 것과 정반대였고 사흘째 되는 날 수로왕은 허왕후와 함께 궁으로 들어갔다.

 

이때 잠에서 깬 정생은 부인과 혼례에 대하여 입씨름을 하게 된다. 여종 버들네가 수모로 가버려 다른 여종에게 치장을 받은 부인은 머리 손질이 엉망이라며 투덜대자 정생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르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라며, 신부가 첫날 바로 신랑을 따라 친영(親迎)을 하면 번거로운 일이 없었을 것이라 한다. 이를 듣고 부인은 여자 혼자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면 신혼생활이 즐겁겠냐며 차차 얼굴을 익히는 좋은 전통이라고 받아친다.

 

이처럼 시대마다 나라마다 각자의 형편에 따르는 혼례의 방식은 모두 모양새가 다르지만, 같이 늙어가자는 ‘해로(偕老)’의 약속은 모두 같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진충보국(盡忠報國)의 길 위에 선 화목(和睦), 칠인정(七印亭)을 소개한다.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려의 유신으로 은둔생활을 했던 장표(張彪, 1349~?)는 마지막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키며, 자손들에게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어 정치적 격동기를 슬기롭게 이겨내고 집안의 화목(和睦)을 이끌었다. 지금의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에 있는 칠인정의 ‘칠인’은 ‘일곱 개의 인수(印綬)’를 뜻하는데 인수는 관직에 나아가면 임금이 하사한다. 장표의 수연 때, 네 아들과 세 사위, 곧 7명이 모두 조선에 출사하여 정자 앞 쌍괴수에 인수를 걸게 된 것을 기념하여 부른 것에서 연유하였다.

 

이번 호 웹진 편집장을 맡은 조경란 교수는 “관계를 맺고 유지한다는 게 참 어렵다”라고 하며 “사회가 만들어내는 관계에 계속 억눌려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게 된다고 말한다. “해로한 부부들에게서 배운 ‘존중과 신뢰’라는 지혜로, 나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어렵게만 느껴졌던 관계들을 다시 돌아봐야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011년부터 운영하는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에는 기록 자료를 문화예술 기획ㆍ창작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선시대 일기류 250권을 기반으로 한 6,710건의 창작 소재가 구축되어 있으며, 검색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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