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조선 말기 산사와 남방의 고요한 공간 속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차는, 근대에 이르러 또 한 번 거대한 시대의 변화를 맞게 된다. 근대는 단순한 시간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오래된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문명과 일본식 근대가 밀려들며, 삶의 방식 전체가 바뀌어 가던 격동의 시기였다. 그 속에서 차 역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개항 이후 서양의 커피와 일본식 생활문화가 빠르게 유입되면서, 소위 '전통차'는 더욱 주변으로 밀려났다. 도시에서는 새로운 근대 문물이 유행하였고, 사람들은 점차 전통의 생활 방식에서 멀어져 갔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되었다. 일본은 자국의 다도 문화를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교육 속에 편입시켰지만, 조선의 전통 차문화는 독자적인 체계로 보호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식민지 조선의 전통문화는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해체되거나 주변화되기 쉬웠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시대 속에서, 역설적으로 한국 차문화의 새로운 정신적 부흥이 시작된다. 그 중심에는 조선 후기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인물,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있었다. 초의는 단지 차를 마시는 방법을 전한 승려가 아니었다. 그는 흩어져 가던 한국 차의 정신을 다시 하나로 묶어낸 존재였다. 그의 책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은 단순한 차서(茶書)가 아니라, 한국 차의 정신과 자연관을 정리한 하나의 문화 선언과도 같았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은 그러한 흐름의 중심이었다. 초의는 이곳에서 차를 달이고 수행하며,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같은 당대의 대표 지식인들과 교유하였다. 차는 여기서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유교와 불교, 예술과 수행을 이어주는 하나의 정신적 매개가 되었다. 차를 사이에 둔 담론 속에서 시와 글씨, 철학과 수행이 함께 오갔고, 한국적 다도의 기틀도 이 시기에 더욱 분명하게 다듬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초의의 정신은 근대에 들어 경남 사천의 다솔사(多率寺)에서 다시 이어지게 된다. 그 중심에는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1904~1979)이 있었다. 효당은 일제강점기의 혼란 속에서도 다솔사에서 차를 가꾸고 직접 제다(製茶)하며 한국 차의 맥을 지켜낸 인물이었다. 그는 단지 차인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인이며 교육자였고, 시대의 격랑 속에서도 차를 하나의 정신문화로 지켜내려 하였다. 다솔사는 당시 항일 인사들의 은거지이자 전쟁 중 많은 학자와 예술가 들이 모였던 장소로 현대 한국 차문화 부흥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효당의 업적 중 가장 큰 의미는 끊어질 뻔한 한국 차문화를 다시 사회 속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한국의 차도》, 《한국차생활사》 등의 저술을 통해 한국 차문화의 역사와 정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차를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니라 인간의 품성과 마음가짐을 닦는 생활문화로 설명하였다. 특히 그가 말한 “다도용심(茶道用心)”은 차를 마시는 기술보다 차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더 중요하게 여긴 사상이었다.
1960년대 이후 효당은 제자들과 함께 다솔사 죽로지실에서 ‘한국차도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차문화를 교육하고 보급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한국 첫 전국 단위 차문화 단체로 평가되며, 이후 한국차인회와 여러 현대 차문화 단체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 차문화의 흐름 속에는 초의선사의 정신과 더불어, 효당이 다솔사에서 되살린 근대 차문화의 숨결 또한 깊게 이어져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근대 한국의 차가 일본식 다도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다도가 형식과 절차의 미학을 깊게 발전시켰다면, 한국의 차는 더욱 자연스럽고 담박한 정신을 지향하였다. 화려한 다실과 엄격한 규범보다는, 산사의 고요함과 자연 속의 소박함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차는 인간을 꾸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맥 역시 시대의 격변 속에서 오래 지속되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차문화는 다시 한번 깊은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전쟁은 삶 자체를 무너뜨렸고,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생존이었다. 폐허가 된 시대 속에서 차를 논한다는 것은 사치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 많은 차밭이 사라졌고, 전통의 맥을 잇던 사람들 또한 흩어졌다. 그럼에도 차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남도의 산사와 일부 차인들 사이에서는 조용히 그 불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다시 전통과 정신문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빠른 성장 속에서 잃어버린 고요와 내면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서, 차는 다시 새로운 의미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해남 일지암의 복원은 한국 현대 차문화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초의선사의 정신을 기리며 복원된 일지암은 전국의 차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고, 잊혔던 한국 차문화의 뿌리를 다시 일깨우는 중심이 되었다.
이 무렵의 차는 더 이상 과거의 궁중 문화도 아니었고, 단순한 절 의식만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삶의 균형을 다시 찾기 위한 하나의 길로 받아들여졌다. 빠르게 소비되고 소모되는 시대 속에서, 차를 천천히 달이고 마시는 시간은 인간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는 행위가 되었다.
한국 근대의 차는 그렇게 단순한 전통의 복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끊어질 듯 이어져 온 맥이 시대의 상처를 통과하며 다시 자신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었다. 억압 속에서 살아남았던 조선 말기의 차가 인내의 문화였다면, 근대 이후의 차는 기억을 회복하는 문화였다.
차는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지만, 이전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궁중의 화려함도, 사대부의 과시도 사라진 자리에서, 차는 더욱 인간의 내면 가까이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조용한 향기는, 산업화와 물질문명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어떤 깊이를 말없이 일깨워 주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차는 세계 속에서 다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 뿌리에는 여전히 조선의 산사에서 이어진 인내와, 근대의 혼란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작은 불씨가 남아 있다.
한국의 차는 결국, 단순한 음료의 역사가 아니라 시대 속에서도 마음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긴 정신사(精神史)였는지도 모른다. (2026.5.13. 집안-集安 국내성에서)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북경대학 미학ㆍ철학전공 철학박사/시인
물파공간화랑 서울ㆍ북경 관장 역임
《라석심물시》, 《손병철시전집》 등 9권 시집 펴냄
국제복희역학회 회장, 한국불한선차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