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의 차인(茶人)을 말할 때 사람들은 대개 원광, 자장, 충담을 먼저 떠올린다. 이들은 차를 수행과 공양의 삶 속에서 실천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차를 직접 기록하지 않았으면서도 우리 차문화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신라의 구법승 혜초(慧超)다.
혜초는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고, 해로를 거쳐 인도에 도착, 당시 오천축국을 둘러보고 다시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순례한 뒤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정은 오늘날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중앙아시아를 거쳐 다시 장안으로 돌아오는 장대한 구도의 길이었다.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우리 민족 첫 세계여행기자, 동아시아 불교문화사에서 매우 귀중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1908년 프랑스인 펠리오에 의해 돈황 장경굴에서 발견되어 1909년 금석학자 라진옥에 의해 고증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 긴 여행기 어디에도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의아한 일이다. 당시 당나라는 이미 차문화가 널리 퍼지고 있었으며, 불교 절에서도 수행 중 차를 마시는 풍습이 점차 자리 잡고 있었다. 혜초가 지나간 장안과 실크로드의 여러 오아시스는 동서 문명이 만나는 교역의 중심지였고, 차 또한 그 길을 따라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혜초는 차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의 관심은 차 자체가 아니라 부처의 가르침과 각 나라의 불교 풍속, 그리고 수행의 실상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왕오천축국전》은 원본이 온전히 전하지 않고 일부가 유실되어 있어, 사라진 부분에 차와 관련한 기록이 있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록이 없다고 해서 인연마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혜초가 걸었던 길은 곧 차가 동서로 전해진 길이었다. 불교의 길과 차의 길은 하나였다. 절이 있는 곳에는 수행이 있었고, 수행이 있는 곳에는 차가 있었다. 차는 졸음을 쫓는 음료를 넘어 마음을 맑게 하고 수행을 돕는 공양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혜초는 비록 차를 논하지 않았지만, 차문화가 살아 숨 쉬는 문명권 한가운데를 몸소 걸어간 첫 신라 승려였다. 이 점에서 그는 '차를 기록한 사람'이 아니라 '차의 길을 걸은 사람'이었다.
순례는 길을 걷는 일이지만, 수행은 마음을 걷는 일이다. 혜초는 국경을 넘어 세계를 보았고, 세계를 지나 다시 자기 마음을 돌아보았다. 그의 여행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확장이었다. 심물철학은 마음과 세계를 둘로 보지 않는다. 마음이 세계를 만나고, 세계가 다시 마음을 비추어 존재는 더욱 깊어진다.
혜초가 걸은 실크로드는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문화와 종교, 사상과 차가 함께 흐르던 생명의 길이었다. 그러므로 혜초의 발걸음은 곧 문명의 발걸음이었으며, 차문화의 발걸음이기도 하였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중국으로 돌아온 뒤 장안에서 역경사업을 돕고 오대산에서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대산은 훗날 우리 불교와 차문화가 함께 꽃피는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혜초는 차를 논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은 차의 정신과 멀지 않았다.
차는 말이 없고, 구도 또한 말이 없다. 맑은 물에 찻잎이 스스로 향기를 내듯, 구도자의 삶도 조용히 세상을 향기롭게 한다. 혜초는 차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차의 길을 걸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은 신라의 정신을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당나라를 거쳐 다시 우리 역사 속으로 이어 준 위대한 순례의 발자취였다. (26.7.8. 발해를 건너며 라석)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북경대학 미학ㆍ철학전공 철학박사/시인
물파공간화랑 서울ㆍ북경 관장 역임
《라석심물시》, 《손병철시전집》 등 9권 시집 펴냄
국제복희역학회 회장, 한국불한선차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