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일송정을 마주하며

  • 등록 2026.07.16 11: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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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一松亭)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정운복의 아침시평 316]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지도는 종이 위에 그려지지만, 지명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새겨집니다.

백두산에 오를 때입니다.

중국 길림성 용정을 방문했지요.

그곳에는 우리에게 선구자라는 노래로 알려진 많은 지명이 있습니다.

 

                  선구자(先驅者)

 

   일송정(一松亭)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海蘭江)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머무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이슬 내릴 때

   그리운 검은 머리 서글프게 웃는다

   그 옛날 국경을 넘던 그날의 그 노래

   말굽 소리 시원하게 들리던 그 노래

 

   비암사(琵岩寺) 쇠북소리 허공에 울려 퍼져도

   그날의 굳은 약속 어데로 갔나

   거친 들 달려가던 그 기상 어디에

   우리 님 오실 날을 기다려 보노라

 

 

선구자의 구(驅)는 말 달릴 ‘구’자입니다.

먼저 앞서서 말을 달리는 사람을 선구자라고 부르지요.

남의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외로운 일인가 하는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는 낱말입니다.

 

해란강 굽어보는 비암산 정상, 외롭게 서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독립군들이 사격 연습을 하며 지표로 삼았던 겨레의 눈동자였고

멀리서 고향을 그리며 찾아온 유랑민들에게는

'여기 우리 땅이 있다'라고 외치는 푸른 깃발이었지요.

일제가 그 기상에 겁을 먹고 소나무 뿌리에 구멍을 뚫어 죽였지만

그 뿌리가 움켜쥐었던 대륙의 정기는 지금도 우리 핏줄 속을 흐릅니다.

 

'용의 우물'이라 불리는 용정은 거친 만주 땅을 일군 우리 선조들의 개척 정신 그 자체입니다.

용두레를 저어 마른 땅에 물을 대던 그 투박한 손마디를 기억해야 하지요.

타향의 흙먼지를 씻어내며 그들은 다짐했을 것입니다.

"이 물로 자란 곡식이 우리 아이들의 뼈가 되고, 독립의 힘이 되리라."

용정은 갈증을 해소하는 물을 넘어, 겨레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젖줄이었습니다.

 

바위 모양이 비파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비암사. 그곳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했던 선구자들의 노래였습니다. 험준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절처럼, 우리 민족은 가장 척박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패배의 슬픔이 아니라,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강인한 귀환의 서사였지요.

 

일송정 푸른솔 아래 흐르던 선구자의 눈물은 이제 우리의 자부심이 되어야 합니다.

용두레 우물가에서 나누던 결의는 우리의 용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곳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어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겨레임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장소들이지요.

 

우리가 이 이름들을 다시 부를 때, 만주의 찬 바람은 온기가 되고,

잊혔던 겨레의 정기는 비로소 찬란하게 깨어납니다.

그 푸른 솔의 기상으로, 그 깊은 우물의 생명력으로

오늘을 당당히 마주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정운복 칼럼니스트 jwb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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