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지난 2026년 5월 15일 629돌 세종대왕 나신 날을 맞아 제45회 세종문화상 한국어 및 한글 부문 수상자로 뽑혀,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세종문화상은 세종대왕의 창조 정신과 애민 정신을 기려 우리 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개인과 단체에 주는 상이다. 올해는 이건범 대표와 함께 류현국 일본 쓰쿠바기술대 교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박수남, 헝가리-한국 문화예술재단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요즘 광화문 한글 현판 달기 운동으로 바쁜 그를 8월 3일 한글문화연대 사무실에서 만나, 다섯 가지를 묻고 다섯 가지 답을 들었다.
하나. “언어는 인권이다” ... 왜 ‘우리 것이니 지키자’를 넘어섰나
- 대표님의 25년을 한 줄로 줄이면 “언어는 인권이다”라는 말로 모입니다.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자는 운동은 오래됐지만, 그 까닭을 ‘민족’이 아니라 ‘인권’에서 찾은 것은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생각에 이르셨습니까.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야 하는 까닭을 ‘우리 것이니까’라는 민족적 당위에만 머무르게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보니 어려운 공공언어가 국민의 알 권리를 가로막고, 외국어와 한자 능력에 따라 사람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쉬운 우리말과 한글 쓰기를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종대왕이 한자 모르는 백성도 제 뜻을 펼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드신 그 마음이 바로 오늘의 ‘언어인권’ 정신 아니겠습니까. 그 생각을 갈무리한 책이 2017년에 펴낸 《언어는 인권이다》(도서출판 피어나)입니다. 고맙게도 이듬해 사회과학 부문 세종도서로 뽑혔지요. 국어학을 전공하지 않은 시민운동가의 책이라 더 뜻깊었습니다.
둘. 논쟁의 한복판 ― 한자병기 저지와 헌법재판소 변론
- 대표님의 공적은 책상 위 주장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저지, 국어기본법 위헌심판 변론처럼 늘 논쟁의 한복판에 서 계셨는데, 그 현장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논리를 세우는 일과 거리에서 서명받는 일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습니다. 2014년 교육부가 초등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국회 토론회와 거리 서명운동, ‘한글교과서 장례식’ 같은 상징 행사를 잇따라 벌였습니다. 주장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서울대 심리학과 연구진과 함께 한자 표기가 낱말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해 논문으로 냈습니다. 결국 그 정책은 2017년 말 폐기됐습니다.
2016년 국어기본법 한글전용 위헌심판 때는 문화체육관광부 쪽 참고인으로 헌법재판소 공개 변론에 섰습니다. 200여 쪽에 이르는 청구서를 다 분석해 120쪽짜리 참고인 의견서를 써냈고, 시각장애인 당사자로서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진술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그해 11월 청구를 모두 기각하면서, 헌법의 이름으로 한글 시대가 확인된 셈입니다.
부산시의 ‘영어상용도시’(2022~23년), 인천시의 ‘영어통용도시’(2023년) 정책과 맞선 싸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전국 국어단체와 지역 시민사회단체를 모아 기자회견과 여론조사, 서명운동을 이끌었더니, 부산시는 정책 이름을 ‘영어 잘하는 도시’로 슬그머니 바꾸었고, 인천시는 선언에 그쳤습니다.“
셋. 생활 속에 남은 말 ― 공공언어를 바꾼 발자취
- ‘승강장 안전문’, ‘자동심장충격기’, ‘누리집’, ‘도로살얼음’… 대표님이 손을 댄 말들이 우리 생활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공공언어 개선 운동은 어떻게 해 오셨습니까.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를 ‘승강장 안전문’으로, ‘자동제세동기’를 ‘자동심장충격기’로, 기차역의 ‘Kiss & Ride’를 우리말 안내로 바꾸는 일들이었습니다. 정부 보도자료를 날마다 살펴 국어기본법 위반 사례에 개선 권고 공문을 보내는 일을 줄기차게 이어 왔습니다. ‘홈페이지’ 대신 ‘누리집’, ‘블랙아이스’ 대신 ‘도로살얼음’ 같은 말이 자리 잡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었지요.
2024년에는 부산 강서구가 법정동 이름을 ‘에코델타동’으로 지으려는 것을 막아냈고, 세종시의 ‘복합커뮤니티센터’를 ‘행복누림터’로 바꾸도록 이끌었습니다. 2025년에는 대통령실의 ‘AI’·‘이니셔티브’ 같은 외국어 남용에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공공언어는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거리 이름 하나, 보도자료 한 장이 다 인권의 문제라고 봅니다.“
넷. 한글날 공휴일, 그리고 다음 세대
- 2012년 한글날이 22년 만에 다시 공휴일이 되기까지의 길목에도 대표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말가꿈이’처럼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도 꾸준히 해 오셨는데요.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 사무국장을 맡아 거리 서명과 온라인 서명을 이끌었습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채 ‘도끼상소 행위극’까지 펼쳤지요. 그렇게 여론을 끌어올린 끝에 2012년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로 지정됐습니다.
미래 세대를 키우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입니다. 2012년 시작한 대학생ㆍ청소년 ‘우리말가꿈이’로 지금까지 수천 명이 거쳐 갔고, 대학생 기자단과 시민강좌 ‘알음알음 강좌’도 십여 년을 이어 왔습니다. 2023년부터는 한국기자협회ㆍ방송기자연합회와 함께 ‘쉬운 우리말글 기자상’을 만들어, 쉬운 말을 잘 쓴 기자를 칭찬하는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꾸짖는 운동에서 칭찬하는 운동으로 넓혀 가는 것입니다.“
다섯. 수상 소감, 그리고 광화문 한글 현판
- 25년 동안 논문 9편, 저서 6권, 칼럼 100편을 쓰시고, 성명서와 공문만 485편을 보내셨습니다. 단독 인터뷰 45건, 토론 출연 21회, 550회가 넘는 언론 보도가 그 발자취를 증언합니다. 세종문화상 수상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을 여쭙습니다.
”한글과 한국어를 지키는 일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을 넘어 시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세계화 시대에도 우리말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국수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있습니다. 세종께서 백성을 위해 한글을 지으신 그 마음이 오늘 언어인권 정신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데, 세종대왕 나신 날에 세종의 이름이 붙은 상을 받으니 그 믿음이 다시 한번 무게를 얻은 느낌입니다.
요즘은 광화문에 훈민정음 글꼴의 한글 현판을 다는 운동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문이자 한글 창제의 산실인 경복궁 앞에 한글 현판이 걸리는 날까지, 언어인권의 길을 계속 걷겠습니다.“
두 시간 남짓한 대담 내내 그의 말은 한 곳으로 흘렀다. 말과 글은 곧 사람이고, 쉬운 말은 곧 민주주의라는 것. 세종이 580년 전 백성을 위해 낸 길을, 오늘 한 시민운동가가 ‘언어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걷고 있었다. 광화문에 한글 현판이 걸리는 날, 그 길은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