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훈민정음학 박사]
두 권이 같은 날 나온 사연
2026년 8월 12일, 연세대학교 유현경 교수가 정년 퇴임식을 했다. 그 자리에 두 권의 책이 함께 놓였다. 하나는 저자가 홀로 쓴 학술 단행본 《한국어 주어의 통사론》(집문당)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 스물세 명이 글을 모은 《한국어 문법 연구의 교학과 상장》(유현경 편, 집문당)이다.
두 책이 나란히 나온 경위가 흥미롭다. 지은이의 머리말에 따르면 2025년 여름, 제자들이 정년 기념 논총을 준비하고 있다며 그동안 발표한 논문을 한 권으로 묶어 보자고 제안해 왔는데, 정작 저자는 그보다 앞선 2024년 초부터 이미 《한국어 주어의 통사론》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서로의 계획을 모른 채 비슷한 시기에 같은 마음으로 책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저자가 원고 일정을 늦추어 두 책을 함께 펴냈다.
우연이라기에는 상징적이다. 스승의 단독 저서와 제자들의 논총이 같은 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다는 것은, 한 학문 공동체가 어떻게 굴러왔는지를 그대로 보여 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논총의 제목에 담긴 '교학상장(敎學相長)'—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스승과 제자가 함께 자란다—은 그래서 수사가 아니라 사실의 기술에 가깝다.
《한국어 주어의 통사론》 — 서술어 중심주의를 흔들다
한국어 통사론(문장의 짜임을 다루는 문법 분야)은 오랫동안 서술어 중심으로 기술되어 왔다. 문장의 끝에 오는 동사ㆍ형용사(서술어)가 그 앞에 어떤 성분이 오는지를 결정한다는 전제다. '먹다'가 오면 주어와 목적어가 따라오고, '예쁘다'가 오면 주어만 온다는 식이다. 저자는 이 전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실제 문장을 분석해 보면 동사ㆍ형용사의 의미가 오히려 주어나 목적어 자리에 오는 명사(체언류)의 의미적 특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파고든다. 서술어와 주어의 균형을 되찾자는 것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요구다.
이 문제의식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형용사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출발해 논항(서술어가 반드시 요구하는 필수 성분)과 부가어(없어도 문장이 되는 곁가지 성분), 형용사 구문의 주어에 이르기까지 40여 년 이어 온 저자 자신의 연구 궤적이 그대로 밑바탕에 깔려 있다. 특히 2005년 형용사 구문의 주어를 다룬 논문에서 이미, 한국어의 주어를 '문장 맨 앞에 오는 주격 조사 붙은 명사구'로 정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책은 7장 500여 쪽 규모로, 참고문헌만 40여 쪽에 이르고 찾아보기까지 갖추었다.
주어의 진실 세 가지
첫째, 주어는 '있다/없다'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다. 저자는 주어를 '주어성(subjecthood, 주어다움의 정도)'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정의한다. 한국어에는 '이/가'라는 주격 조사가 엄연히 있는데도, "할아버지께서 걱정이시다"처럼 다른 조사가 붙은 성분이 사실상 주어 노릇을 하는 경우(비주격 주어)가 많다. 반대로 "코끼리가 코가 길다"처럼 주어가 아닌 성분에 '가'가 붙기도 한다. 그래서 문장에서 주어를 가려내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주어를 100퍼센트 주어이거나 아니거나로 나눌 것이 아니라, 주어다운 성질을 얼마나 많이 갖추었는가로 재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둘째, 주어성은 어순ㆍ유정성ㆍ의미역이라는 세 축으로 설명된다. 3장이 이 책에서 가장 공을 들인 대목의 하나다. 유정성(有情性)은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사람이나 동물처럼 감정과 의지를 지닌 존재인가를 따지는 개념이고, 의미역(意味役)은 그 성분이 문장이 그리는 사건에서 맡은 배역—행위를 한 쪽인지, 당한 쪽인지, 경험하는 쪽인지—을 가리킨다. 저자는 문장 맨 앞자리에 왔다고 해서 곧 주어인 것은 아님을 격틀(서술어마다 어떤 성분을 몇 개 요구하는지 정리한 틀) 분석으로 검증하고, '있다' 구문 등을 통해 유정물이 무정물보다 주어 자리를 차지하기 쉽다는 위계가 실제로 작동함을 보인다. 한국어에서 주어를 둘러싼 여러 현상이 결국 '살아 있는 존재인가'와 깊이 얽혀 있다는 지적은 특히 설득력이 있다.
셋째, 이중주어 구문은 '한국어의 예외'가 아니라 외재소유(external possession) 구문의 한 유형이다. "코끼리가 코가 길다"처럼 '이/가'가 붙은 성분이 둘인 문장을 이중주어 구문이라 한다. 6장은 이 문제만으로 사실상 독립된 한 권의 분량(100쪽 남짓)을 채운다.
저자는 먼저 이런 문장을 '서술절'로 설명해 온 관행—뒤의 "코가 길다"를 통째로 하나의 절로 보아 "코끼리가"의 서술어로 삼는 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절이라면 있어야 할 표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두 개의 사건을 나타내야 할 겹문장인데 실제로는 하나의 사태만 그린다는 점 등을 조목조목 든다.
그 대신 저자가 내놓는 답이 외재소유다. 쉽게 말해 "코끼리의 코가 길다"처럼 소유주가 명사 안쪽에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빠져나와, "코끼리가"처럼 문장 바깥의 독립된 자리를 차지한 구조라는 것이다. 이 현상은 한국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언어에 두루 나타난다. 이중주어 구문을 한국어만의 기이한 예외로 취급해 온 20세기 초 이래의 오랜 시선을 뒤집는 대목이다.
이 책의 미덕은 야심의 크기와 절제의 균형에 있다. 애초에 문장 성분 전체를 다루려 했으나 주어 하나만으로도 책 한 권이 모자랐다는 저자의 술회는 겸손한 말이 아니다. 수백 편에 이르는 이중주어 구문 선행 연구를 감당하면서도 논의가 산만해지지 않은 것은 '주어성'이라는 일관된 잣대를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로서 더 묻고 싶은 것도 있다. 주어성이 정도의 문제라면 그 정도를 어떻게 잴 것인가. 검증 기제들이 서로 어긋날 때 어느 쪽에 무게를 둘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좀 더 명시적이었다면 후속 연구가 이 틀을 이어받기 쉬웠을 것이다. 저자 스스로 "원고를 마무리한 지금도 논의해야 할 문제가 산처럼 남아 있다"라고 적었으니, 이는 흠이라기보다 다음 세대에 넘긴 과제 목록으로 읽는 편이 옳겠다.
《한국어 문법 연구의 교학과 상장》 — 스물세 편이 그리는 지형도
책 말미의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은 논문이 아니라 제자들의 회고다. 한 달에 한 번, 짧게는 2주에 한 번 시간을 내어 토론해 주었다는 대목, 논문 쓰는 과정이 산을 넘는 것과 같다고 했다는 말이 담담하게 적혀 있다. 학술서에서 이런 글은 사족이 되기 쉬운데, 이 책에서는 오히려 앞의 스물세 편이 어떤 훈련의 산물인지를 알려 주는 해설이 된다.
두 책을 겹쳐 읽으면
따로 읽어도 되지만, 겹쳐 읽을 때 보이는 것이 있다.
첫째, 주어 문제가 두 책을 관통한다. 논총 1부의 김교연 글은 제목부터 '주어성 검증 기제로서의 들'이다. "빨리들 가라"의 '들'처럼 주어가 여럿일 때만 나타나는 '들'을, 어떤 성분이 주어인지 가려내는 시험 도구로 쓸 수 있는지를 따진 글이다. 3부의 이종혁 글은 '나에게 돈이 필요하다'류의 구문을 다루고, 김상민의 상호 구문, 고희준의 대조 초점 구문 역시 주어ㆍ주제어 문제와 맞닿는다. 스승의 단행본에서 제기된 물음이 제자들의 개별 논문에서 각기 다른 각도로 되받아쳐지는 구조다. 실제로 논총 곳곳에서 유현경의 선행 연구가 인용되고, 동시에 비판적으로 검토된다.
둘째, 방법론의 가족 유사성이 뚜렷하다. 말뭉치와 실제 발화 자료, 《표준국어대사전》과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같은 사전, 고등학교 국어ㆍ언어와 매체 교과서까지—추상적 직관보다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 기대는 태도가 공통적이다. 이는 남기심 선생으로 이어지는 연세 국어학의 실증적 전통과도 겹친다.
셋째, 그래서 두 책은 한 권의 앞뒤처럼 읽힌다. 단행본이 '주어란 무엇인가'라는 종적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논총은 그 질문이 형태ㆍ상ㆍ구문ㆍ담화ㆍ교육ㆍ규정으로 어떻게 가지를 뻗는지 횡으로 펼쳐 보인다. 종과 횡이 만나는 지점에 유현경이라는 이름이 있다.
논총의 숙명이겠지만, 스물세 편의 편차는 있다. 이론적 밀도가 높은 글과 현장 보고에 가까운 글이 나란히 놓이면서 독서의 호흡이 고르지 않다. 부별 해제나 편자의 짧은 안내글이 각 부 앞에 붙었다면 독자가 지형을 잡기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또 하나. 두 책 모두 한국어 문법의 안쪽을 깊이 파고들지만, 이 논의가 한국어교육 현장이나 인공지능 언어 처리처럼 문법 지식을 실제로 소비하는 영역과 어떻게 접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은 상대적으로 아껴 두었다. 특히 대규모 언어모형이 한국어 문장을 다루는 시대에 '주어성의 정도'라는 개념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야 할 대목이겠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물에 비유했다. 한때는 거센 물살을 따라 쉼 없이 떠내려가는 작은 배 같았다면, 지금은 잔잔한 물결 위에서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고. 1980년 3월 연세대 문과대학에 입학한 이래 40여 년이다. 정년은 끝이 아니다. 《한국어 주어의 통사론》은 저자 스스로 "논의해야 할 문제가 산처럼 남아 있다"라고 적은 미완의 지도이고, 《한국어 문법 연구의 교학과 상장》은 그 지도를 이어 그릴 사람들의 명단이다. 두 권을 함께 받아 든 독자라면, 한 학자의 정년이 어떻게 한 학문의 시작점이 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