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시사 합작시 87. 어떤 오도송(悟道頌)

  • 등록 2026.08.16 10: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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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떤 오도송(悟道頌)

 

 

   물고기가 차를 달일 수 있나 (돌)

   겹겹 산이 연꽃이 될 수 있나 (심)

   일상의 끈을 풀곤 눈부심에 (빛)

   맨발 쓰다듬고 휘파람 부네 (달)

 

                 ... 25.7.5. 불한시사 합작시

 

 

              

ㅡ바다 밑 제비집과 불 속 거미집ㅡ

[어떤 오도송]은 효봉선사(曉峰禪師)의 오도송(悟道頌)을 염두에 두고 쓴 불한시사(弗寒詩社)의 합작시이다. 옛 선객(禪客)이 화두(話頭)를 던지듯 필자가 “물고기가 차를 달일 수 있나”라는 첫 구를 발구(發句)하였으므로, 이 시의 인연과 뜻을 밝히는 주(註) 또한 필자가 쓰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효봉선사(1888~1966)는 근현대 한국 선문(禪門)을 대표하는 높이 우뚝 솟은 선승이다. 속명은 이찬형(李燦亨)으로, 일제강점기에 약 10년 동안 판사로 재직하였다. 독립운동을 한 동포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했던 시대적 모순과 양심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법복을 벗고, 한동안 엿장수 행색으로 전국을 떠돌며 참회의 길을 걸었다고 전한다. 이후 서른여덟의 늦은 나이에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의 석두화상(石頭和尙)을 찾아 출가하였다.

 

늦게 출가한 만큼 그의 정진은 더욱 치열했다. 한번 좌선에 들면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오랜 참선으로 엉덩이가 헐어 진물이 방석에 밸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움직이지 않는 절구통에 빗대어 ‘절구통 수좌(首座)’라 불렀다. 그는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편에 토굴을 짓고 들어가, 깨닫지 못하면 그곳에서 목숨을 마치겠다는 결단으로 무문관(無門關) 수행에 들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약 1년 6개월 동안 목숨을 건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정진 끝에 마침내 한 소식을 얻었으며, 그 깨달음의 경계를 즉석에서 읊은 노래가 유명한「효봉선사 오도송」이다.

 

  효봉선사 오도송(曉峰禪師 悟道頌)

 

   해저연소록포란(海底燕巢鹿抱卵)

   화중주실어전다(火中蛛室魚煎茶)

   차가소식수능식(此家消息誰能識)

   백운서비월동주(白雲西飛月東走)

 

글자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 거미집에서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의 소식을 누가 능히 알겠는가.

   흰 구름은 서쪽으로 날고 달은 동쪽으로 달리네.

 

오도송은 논리로 설명하는 이론글이 아니다. 분별하는 생각을 단숨에 끊어 깨달음의 경계를 드러내는 격외(格外)의 노래다. 더욱이 그 깨달음의 주인공이 아닌 사람이 자신의 지식만으로 뜻을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바다 밑에 제비집이 있다는 것부터 불가능한데, 그 작은 집에서 사슴이 알까지 품고 있다. 타오르는 불 속에는 거미집이 있고, 물속에 살아야 할 물고기가 그 안에서 차를 달인다. 상식으로 보면 모두 역설이며 어불성설이다. 바로 그 불가능한 광경이 굳어진 관념을 무너뜨리고, 있음과 없음, 물과 불, 동물과 새, 삶과 죽음을 갈라놓던 분별의 벽을 한꺼번에 허문다.

 

「어떤 오도송」의 첫 구인 “물고기가 차를 달일 수 있나”는 여기에서 가져온 화두다. 이어진 “겹겹 산이 연꽃이 될 수 있나” 역시 불가능을 묻는 형식을 빌렸으나, 산봉우리들이 연꽃잎처럼 피어나는 순간을 마음으로 보면 불가능은 곧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된다. 일상의 매듭을 풀어 버린 뒤 눈부신 세계 앞에 서면, 관념으로 답을 구하던 사람은 사라지고 맨발로 대지를 어루만지며 휘파람 부는 자유인만 남는다. 깨달음은 말끝의 설명이 아니라 일상의 몸짓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약관(弱冠)의 시절, 외조부의 제자를 따라 출가할 뜻을 품고 인천 용화사와 여주 신륵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비록 인연 따라 수행과 삶의 길은 달라졌지만, 그 뒤로 선승을 만날 때마다 효봉선사 오도송의 앞 두 구절을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말은 대개 같았다. “남의 깨달음을 캐묻지 말고, 그대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 보라.”

 

그 말이 선문답(禪問答)의 본뜻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때로는 그들이 답을 알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인지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는 가학(家學)의 스승인 외조부 동은공(東隱公)께 이 오도송의 뜻을 여쭈었다. 그때 들은 말씀은 무릎을 치게 하는 문명사적 해석이었다. 오십여 년이 흐른 오늘, 인연 따라 그 해석을 처음으로 독자들에게 전한다.

 

동은공은 먼저 “바다 밑 제비집”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상징으로 보았다. 제비집은 허공의 벽에 붙어 있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광대한 대륙에 붙어 바다로 길게 뻗은 반도의 형상과 닮았다. 더구나 제비는 겨울이 물러가고 새봄이 왔음을 알리는 새이다. 그렇다면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있다는 말은 생물학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서로운 생명의 씨앗이 이미 한반도의 품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리는 징조가 된다.

 

사슴은 예로부터 신선과 장수, 평화와 상서로움을 상징해 왔다. 새가 아닌 사슴이 알을 품는다는 것은 낡은 종(種)의 경계와 상식을 넘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려는 조짐을 뜻한다.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반도, 수많은 침략과 분단의 고통을 겪은 땅에서 오히려 새로운 정신과 문화의 봄이 잉태되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세계로 흐르는 한류와 K-문화, 예술, 음악, K-철학과 생명문화의 약동을 생각하면, 동은공의 해석은 먼 앞날을 내다본 예언처럼 다가온다.

 

둘째 구의 “불 속 거미집”은 이와 대비되는 서구 문명의 집이다. 거미집은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가느다란 실을 기하학적으로 엮어 허공에 세운 정교한 구조물이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을 분석하고 기술의 그물을 세계에 펼친 서구 과학문명의 교묘함을 떠올리게 한다. 바닷속의 제비집이 물과 음(陰), 동방과 생명의 품을 상징한다면, 불 속의 거미집은 불과 양(陽), 서방과 물질문명의 확장을 상징한다.

 

그러나 거미는 아름다운 그물을 만들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물에 걸린 작은 곤충의 피를 빨아 생명을 취한다. 포만의 밤하늘 높이 스타를 꿈꾼다. 동은공은 바로 이 점에서 서구 과학문명의 밝음과 그늘을 함께 보았다. 서구는 과학과 산업을 발전시켜 세계를 연결했지만, 그 정교한 그물은 때때로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수탈, 자본과 상품의 독점망으로 변하였다. 다른 민족의 토지와 자원과 노동을 그물에 가두고, 그것을 물질적 풍요로 바꾸어 누려 온 역사도 있었던 것이다.

 

“물고기가 차를 달인다”라는 구절도 그런 역설의 연장선에 있다. 물의 생명인 물고기가 불 속에서 차를 달인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뒤바뀐 모습이다. 본래 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동방의 음료였지만, 세계시장의 거대한 그물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과 소비의 대상으로 바뀐다. 서구의 산업문명은 커피와 콜라 같은 탁한 기호음료를 세계 곳곳에 퍼뜨렸고, 사람의 입맛과 생활방식까지 하나의 시장 질서로 묶어 놓았다. 달고 강한 자극, 빠른 소비와 반복되는 욕망이 정신의 맑음을 대신하면서 물질문화가 세계인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렇다고 이 해석이 서구 과학문명 전체를 배척하거나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거미줄의 정교함은 인류 지성의 위대한 성취이며, 과학과 기술은 오늘의 문명을 이루어 낸 소중한 힘이다. 다만 그 힘에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과 도덕적 방향이 따르지 않는다면, 세계를 연결하는 그물은 곧 생명을 포획하는 그물이 될 수 있다는 경계이다. 과학의 그물에 심명(心明)의 선택(善擇)을 더하고, 물질의 힘에 생명의 지혜를 결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셋째 구의 “이 집안 소식을 누가 능히 알겠는가”에서 ‘이 집’은 단지 토굴이나 수행자의 마음만을 뜻하지 않는다. 동은공의 해석에 따르면 바다 밑 제비집과 불 속 거미집, 곧 동방과 서방의 두 문명의 집을 함께 가리킨다. 한쪽에서는 상서로운 새 생명의 봄이 잉태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과학과 물질의 거대한 그물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 효봉선사는 그 두 집에서 일어날 문명 전환의 소식을 누가 알아차리겠느냐고 넌지시 묻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 구의 “흰 구름은 서쪽으로 날고 달은 동쪽으로 달린다”라는 말은 그 물음에 대한 소리 없는 응답이다. 흰 구름이 서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동방의 정신과 지혜가 서쪽 세계로 흘러가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반대로 달이 동쪽으로 달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밝음이 동방에서 떠오르는 조짐이다. 구름이 벗겨져야 명월이 온전할 수 있다. 동은공은 여기에 후천(後天)의 운도(運度)는 음(陰), 곧 달의 운기(運氣)에 해당한다는 말씀을 덧붙였다.

 

이는 동양이 서양을 대신해 새로운 패권을 차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서구의 과학기술과 동방의 생명정신이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야 한다는 문명 교차의 소식이다. 물질만 발전하고 마음이 뒤따르지 못하면 과학은 탐욕의 그물이 되지만, 마음만 말하고 현실의 물질세계를 외면하면 문명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지 못한다. 마음과 사물이 하나로 감응하는 심물합일(心物合一)이 필요한 까닭이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자리다. 오랫동안 강대국 문명이 충돌하는 변방이었으나, 앞으로는 서로 다른 문명을 잇고 화해시키는 중심의 교량이 될 수 있다. 겹겹산이 연꽃으로 피어나듯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평화의 꽃으로 바꾸고, 제비가 봄을 알리듯 세계에 새로운 생명문명의 소식을 전하는 땅이 되어야 한다. 이미 되어 가고 있다.

 

바다 밑 제비집에서는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 거미집에서는 물고기가 차를 달인다. 불가능해 보이는 두 광경이 한 시 안에서 만나는 순간, 동서 문명의 낡은 경계도 무너진다. 그때 흰 구름은 서쪽으로 날아가고, 동쪽 하늘에서는 밝은 달이 떠오른다. 이것이 유가의 동은공이 불가의 오도송에서 읽어 낸 지혜이며, 필자가 반세기 동안 마음에 품어 온 한반도의 봄소식이다.

 

그러나 이것을 효봉선사 오도송의 유일한 해답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오도송은 한 가지 해석에 갇히는 순간 살아 있는 화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외조부 동은공께서 밝혀 주신 문명사적 혜안(慧眼)을 하나의 새로운 해석으로 세상에 전하며, 독자들 또한 각자의 지각(智覺)으로 그 '두 집'의 소식을 깨달아 보기를 바란다.

 

                                                      ― 2026. 8. 15. 광복절에

                                                     인천 문학산 기슭에서 라석(羅石)

 

• 불한시사(弗寒詩社) 손말틀 합작시(合作詩)

`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 ‘불한티산방’에 모이는 벗들 가운데서 시를 쓰는 벗으로 함께 한 시모임이다. 이들은 여러 해 전부터 손말틀(휴대폰)로 서로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시형식은 손말틀 화면에 맞게 1행 10~11자씩 4행시로 쓰고 있다. 일종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이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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