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어제 묵은 라마호텔은 너무나 열악했다. 나무판자 벽 틈과 유리창으로 찬 바람이 들이치고 계곡 물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설쳤다. 다른 트레커들에게는 도저히 추천하기 어려울 듯싶다. 차라리 30분쯤 아래에 있는 ‘림체’ 롯지가 훨씬 따뜻하고 아늑하다. 이곳에는 롯지가 여러 채 있지만, 그저 모진 바람이라도 피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수준이다.
아침을 대충 먹고 라마호텔을 출발해 우리가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본격적인 하산길에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림체 롯지의 산상 카페에서 따뜻한 드립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젊은 주인이 원두를 직접 갈아 내려주었는데, 그윽한 커피 향이 지친 몸에 스며들자, 며칠 동안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눈 녹듯 풀리는 것 같았다.
이곳까지는 길 상태가 좋아 내리막길을 빠른 속도로 걸어 내려갔다. 하지만 출렁다리를 지나면서부터 밤부(Bamboo) 롯지를 거쳐 도맨(Domen) 롯지에 이르는 구간은 곳곳에 산사태 지역이 널려 있는 데다,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쉴 새 없이 이어져, 발을 디딜 때마다 체중이 앞으로 쏠려 발가락에 통증이 밀려왔다.
점심 무렵 파이로(Pairo) 롯지를 지나갈 때였다. 한국인을 본 주인이 신라면을 판다며 발걸음을 붙잡았다. 달걀을 탁 풀어 넣고 푹 끓여내 온 라면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전부 비워내고 나니 온몸에 다시금 힘이 솟구쳤다. 배가 든든해지니 다시 걷는 내리막길이 한결 수월했다.
밤부 롯지에 들러 여주인에게 올라갈 때 그녀가 안고 있던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화면 속 아이의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는 주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도맨 롯지에 도착하기 전 갈림길에서 고싸인쿤드로 향하는 대원 5명과 서로의 안전을 기원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되돌아보니 랑탕 계곡의 80km 트레일 코스는 인간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험로였다. 최소 일주일은 꼬박 걸어야만 비로소 거대한 설산의 품에 안겨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거룩한 산이었다. 이 길은 단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길 가운데 하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압도적인 비경을 눈에 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다.
거대한 산사태 지역을 통과할 때는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종이 한 장 차이로 랑탕 계곡 트레킹을 이어가게 된다. 눈앞에 펼쳐진 길은 위태롭기 그지없었으나, 그 위험함 자체마저도 대자연이 가진 숭고한 아름다움의 일부로 다가왔다. 계곡 아래로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소리가 귀청을 세차게 때리는 통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위험천만한 길을 신속히 통과했다.
길은 자연석을 얼기설기 쌓아 만든 불규칙한 돌계단이 많아 여간 걷기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해발 3,000m 미만 지역으로 내려오자, 주변에 대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마치 옛 민화나 문인화 속에서 보았던 은은한 대나무의 기품을 쏙 빼닮아 무척 인상적이었다.
속세를 떠나 깊은 산속에 머무는 동안 문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니, 이 깊은 두메에서 세상 소식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오직 롯지에서 돈을 내고 와이파이를 구매하는 방법뿐이었다. 게다가 세상 소식을 알게 된다 한들, 결국 내 두 발로 걸어 나가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이곳에서는 돈이 없으면 소통조차 사치였다. 그렇다고 연결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어서 아주 느릿느릿 세상과 연결될 뿐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사를 보지 않으니, 마음만큼은 더없이 홀가분했다. 우리가 느리게 걷는 동안 세상은 또 바쁘게 변해 있었을 것이다. 천천히 걸어가는 내 발걸음도 그 속도에 맞추어 조금씩 변해갈 따름이다.
계곡을 내려오며 하늘을 둘러보니 해발 5,000~6,000m의 거대한 고봉들이 머리에 하얀 백설을 이고 호위하듯 서 있었고, 귓가에는 계곡의 우렁찬 물소리가 노래로 들려왔다. 이곳에서는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고, 세수할 필요도 없었다. 어느덧 사람이 산이 되고, 산이 곧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랑탕 계곡은 진정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걸어보아야 할 명소임이 틀림없다. 길을 걷는 동안 수십 곳에 달하는 산사태 지역과 추모비를 지나치며 사람들은 이곳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나만 괜찮으면 돼'라고 안일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연의 재해는 언제 어디서든,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그러니 지레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란 그저 용기를 가지고 묵묵히 새로운 도전에 나서면 되는 것이다.
길 위에서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젊은이들을 여러 명 만났다. 한 가지 마음 한구석이 아렸던 것은, 네팔 사람들이 조금 더 풍요롭게 잘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셰르파와 포터의 수가 무려 2만 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의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겨우 낡은 슬리퍼나 운동화를 신은 채 이 험준한 산길을 날아다니듯 오르내렸다.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이롭고도 애잔한 모습이었다. 숭고한 노동을 이어가는 모두에게 따뜻한 축복이 내리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한편, 이번 트레킹 동안 현지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양 섭취가 부실하다 보니 체력 저하가 빠르게 찾아왔다. 귀국한 뒤 몸무게를 재보니 평소 유지하던 체중에서 5kg이나 빠졌으니, 내 몸으로 버텨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다음 원정에는 반드시 한식 조리장과 동행하여 먹는 문제만큼은 확실하게 해결해야겠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결국, 나는 이러한 체력 저하를 생각해 고사인쿤드(4,380m) 방향으로 무리하게 추가 등반을 이어가지 않기로 결단했고, 그렇게 다른 대원들과 헤어지고 혼자 하산길을 택하였다.
마침내 6박 7일 동안에 걸친 랑탕 계곡 80km 대장정을 안전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완주해 냈다. 산에서 내려오며 내 가슴속에는 또다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도전할 수 있다는 뜨거운 용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일정 변경에 따라 네팔 카트만두에서 출발하는 귀국 항공권을 나흘 앞당겼다. 일주일에 두 번 운항하는 탓에 48만 원의 추가 수수료를 내야 했지만, 다행히 토요일(11월 29일) 저녁 7시 30분 비행기로 예약을 마칠 수 있었다.
꼬박 6시간 20분을 걸어 내려온 끝에 마침내 이번 트레킹의 출발지였던 샤브루베시(1,420m) 마을에 도착했다. 올드나마스테 호텔에 방을 잡고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으며 여장을 풀었다. 내일은 이곳에서 카트만두까지 지프차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다. 랑탕의 푸른 하늘과 하얀 설산, 계곡의 물소리가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