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앞 줄임) 우리는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우리의 성의와 재능을 끝까지 이 신문에 바치고자 한다. 여기에서 쫓기면 저기로 가고, 산에서 쫓기면 물로 가면서라도, 한 주에 한 번 발행하지 못하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한 달에 한 번도 못하면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발행할 것이다. 이 사람이 하지 못하면 저 사람에게 이어 주고, 그 세대에 못하면 다음 세대에 전하여서라도 계속해 나가, 우리의 독립이 완성될 때까지, 그리고 독립이 이루어진 뒤에도 영원히 이 신문의 생명을 이어 가고자 한다.(뒷 줄임)” - ‘본보 속간에 임하야’ 상해 국한문판 <독립신문> 제87호 (1920.12.18.)
그제(4일)는 국립대한민국심시정부기념관(아래 임시정부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싹, 독립신문> 전시를 보고 왔다. 위 ‘독립신문 속간에 임하야’ 행간에서 알 수 있듯 독립신문 발간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였나를 여실히 입증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제나라 땅과 말을 일제에 빼앗기고 이국땅 상해에서 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뜻을 모아 독립신문을 펴낸 것은 1919년 8월 21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임시정부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함으로써 겨레를 하나로 잇는 중요한 언론 매체 역할을 했다. 창간호 제목은 <獨立>이라는 한자로 제자를 썼고 기사는 한글과 한자가 섞인 국한문판이다.
이번 전시는 창간부터 발행이 중단되기까지 <독립신문>이 걸어온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구성으로 짜여 있다. 전시 공간은 크게 1부: 독립의 뜻: 신문을 찍다, 2부 독립의 감각: 시대를 읽다, 3부: 독립의 연대 : 함께 바라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전시 공간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열악한 환경과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도 신문을 발간하기 위해 노력했던 선열들의 열정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제 독립신문 전시 관람은 방한 중인 도산 안창호 선생의 외손자인 필립 안 커디 선생과 몇몇 지인들이 함께했다. 전시물 가운데 외할아버지(안창호 선생)가 나오는 부분은 직접 필립 선생이 사진 설명을 곁들여주어 상해 임시정부 시절을 더욱 사실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아쉬운 점도 있었다. 전시물 해설 부분이 한글로만 되어 있는 곳이 많고 중요 부분에 병기한 언어는 영어가 전부다.
또 다른 하나는 이번 전시가 상해임시정부 시절 <독립신문>을 다루는 것이기는 해도 1부 전시 시작 전에 1919년 이전 나라 밖에서 발행한 신문 등을 잠깐 언급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알기로는 1919년 이전에도 우리 동포들은 열악한 남의 땅에서 신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속속 신문 창간에 힘을 쏟았는데 특히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의 기관지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축이 되어 1905년 11월 22일에 창간한 <공립신보>를 비롯하여,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1909.2.10.) 등이 있었고, 러시아에서도 해조신문(1908년, 블라디보스토크, 정순만 주도), 대동공보(1908~1910년, 최재형이 사장으로 항일 언론 활동 주도)등의 신문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재외동포 계몽과 실력 양성, 국민정신 배양을 통한 국권 회복을 위해 뛰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주제가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초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약간의 공간을 할애하여 일제강점기 나라밖에서 신문을 만들어 ‘국권회복’을 위해 뛰었던 동포들의 소식을 언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물의 전시란 긴 강물의 흐름과 같아서 처음과 끝이 없는 ‘중간 부분만 떼어 전시’하는 것은 맥을 끊은 전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상해 발행 <독립신문>은 값비싼 윤전기로 찍어 낸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찍어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전시장 해설을 보자.
“상하이에서 한글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활자를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활자 제작에는 조동호, 주요한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고국에서 가져온 한글 성경책의 글자를 하나씩 본떠 2,000여 종의 한글 자모 활자를 만들었습니다. 낯선 조판과 교정 작업으로 밤새우는 날이 태반이었지만, 이렇게 만든 활자와 수동 주조기 한 대를 갖추고 중국인 주조공 한 명과 함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인쇄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1919년 상해 상황이지만, 1915년 3월 1일 미국에서는 이미 인터타이프 한글식자기(당시 대중들은 윤전기라고 부르기도 했음)를 제작하여 신문을 찍기 시작하였다. 이 기계는 한글 25자의 기본 글자와 중모음, 쌍받침까지 포함하여 174개의 활자를 합성하여 사용하였는데 1917년 봄, 이대위 목사는 그보다 더욱 간단하고 빠른 196자 모노식 활자 발명에 성공하여 신문 인쇄에 사용하였다. 이 실물은 현재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회관 안에 전시되어 있어 누구나 볼 수 있다. 임시정부기념관에서는 <독립신문>을 찍어내는 활자 부분에 “미주에서 신한민보를 찍어내던 윤전기 사진 한 장”이라도 제시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전시장을 찾은 나채순 (43살, 종로 효자동) 씨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함께 <독립신문> 전시를 관람했다고 했다. “아들이 임시정부에 관심을 보여서 이번에 독립신문 관람을 함께 했다. 이제는 종이신문조차 구경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터넷 매체가 발달하였고, 또한 다양한 기사가 넘쳐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상해나 미주, 러시아 등에서 종이신문을 만들어 조국의 독립을 꿈꾸던 동포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아들이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 하면서 매유 유익했다고 했다.
1919년 8월 21일,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창간호의 깃발을 올린 <독립신문>은 만 7년 동안 제198호를 끝으로 1926년 11월 폐간의 길을 걷게된다. 엄혹한 시절, 나라밖에서 국권회복이라는 담대한 목표를 세우고, 나라 안팎 한인 사회를 하나로 연결한 소통의 창구 역할로 민족혼을 일깨워주던 신문인 <독립신문>이 걸어 온 발자취를 지금 우리는 국립대한민국임심정부 기념관 특별실에서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1919.8.21) 창간 이전에 서재필의 독립신문이 있었다. 이 신문은 1896년 4월 7일 창간해 1899년 12월 4일 폐간된 한국 첫 민간 신문으로 국문판을 순한글로 발행하고 띄어쓰기와 쉬운 문체를 도입해 민중 계몽과 자주독립 사상 전파에 이바지했다는 평이 있으나 상해 임시정부 발간의 <독립신문>과는 창간 목적이 다르다.
<전시 안내>
전시명: <싹, 독립신문>, 2027년 1월 17일 11일까지
전시:국립대한민국임심정부 기념관 특별실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79-24 (현저동)
전화: 02-772-8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