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MoW) 사업은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 이 물음을 놓고 9월 1일과 2일 이틀 동안 경북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 국제포럼’이 열렸다. 부제는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미래 구축: 거버넌스, 포용성 및 지속가능성”이다.
경상북도가 주최하고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교육연구소위원회(SCEaR)가 공동으로 준비하고 세계기록유산 아시아ㆍ태평양지역위원회(MOWCAP)가 후원해 11개 나라 전문가가 자리를 함께했다.
필자는 미래엔역사박물관과 세종시가 함께 추진하는 월인천강지곡(1447)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박병천 추진위원장, 김동래 부위원장, 강순애·김선희 추진위원, 김동준 세종시 문화유산과 팀장)와 함께 참가했다.왜 지금, 왜 안동인가포럼에는 두 개의 좌표가 있다. 하나는 한국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KMoW KC) 설립 10돌이다. 지난 10년은 등재된 기록을 ‘목록에 오른 문서’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지켜 다음 세대에 넘겨줄 ‘공동의 기억과 지식’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2025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미래에 관한 국제회의’다. 그 결과보고서는 “세계적 포용성 강화”와 “협력 확대”를 첫머리 권고로 내걸었다. 충분히 대표되지 못한 지역, 여성과 소수 집단, 대중문화·토착 언어·구전 전통을 끌어안으라는 주문이었다. 안동 포럼은 그 권고를 선언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자리였다.
장소가 안동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한국의 유교책판’(2015)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2017)을 세계기록유산 국제목록에, ‘한국의 편액’(2016)ㆍ‘만인의 청원, 만인소’(2018)ㆍ‘내방가사’(2022)를 아시아ㆍ태평양지역 목록에 올렸다. 국가가 아니라 문중과 서원, 곧 민간이 만들고 지켜 온 기록이 세계의 기억이 된 드문 사례들이다.
첫날: “세계의 기록유산은 모두의 것”
얀 보스 국제자문위원회(IAC) 의장의 발표 제목은 도발적이었다. “엘비스 팬 5천만 명이 틀릴 리 없다”. 국제목록에는 바흐와 베토벤은 있지만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는 없고, 각국 국립도서관은 해마다 나오는 이케아 카탈로그를 보존하지 않는다. 교과서ㆍ요리책ㆍ만화ㆍ음반ㆍ팟캐스트까지 대중문화의 기록으로 규정한 그는 “많이 존재했던 것일수록 남아 있는 것은 적다”라고 했다. 가장 흔했던 것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는 역설이다.
로타르 요단 교육연구소위원회 위원장은 학계와 시민사회로 넓어진 협력망을 짚었고, 김귀배 MOWCAP 의장은 지역위원회와 지식센터를 국제 정책과 현장을 잇는 ‘가교’로 규정하며 지식센터 간 협력 네트워크, 소외 지역 맞춤형 상담제, 기후위협에 대비한 디지털 재난 예방 아카이브를 제안했다.
메고 피난디토 인도네시아 국가기록원장은 ‘판지 이야기 필사본’ 등재 뒤 8개 도시를 도는 국제 축제로 이어진 사례로 등재 이후가 더 중요함을 보여줬고, 앙 밍 치 말레이시아 조지타운 세계유산관리기구 총괄책임자는 세계유산ㆍ무형문화유산ㆍ기록유산으로 갈라진 제도가 오히려 유산을 삶에서 떼어놓는다고 지적했다.
구 페이 중국 항저우 서령인사(西泠印社) 회원은 1904년 전각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이 예술단체가 무형문화유산(2009년 ‘중국 전각’)과 세계유산(2011년 항저우 서호 문화경관)을 잇는 매듭이 된 과정을 소개했다. 이날 한국국학진흥원과 중국 런민대학교 정보자원관리학원의 양해각서 체결식도 함께 열렸다.
둘째 날: 국가가 아니라 관계로
둘째 날 논의는 국가 간 공동 등재(Joint Nomination)로 수렴됐다. 미쓰루 하가 MOWCAP 부의장(일본 도호쿠대 교수)은 관계적 존재론을 끌어와, 실체가 아니라 관계가 일차적이며 기록유산도 본질적으로 어느 국민국가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일이 함께 올린 ‘조선통신사 기록물’과 ‘수평사와 형평사’를 들며, 공동 등재는 기술적 절차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 대화와 화해에 이바지하는 철학이라고 했다.
부 티 민 흐엉 MOWCAP 부의장은 역대 일반지침을 통해 유네스코가 공동 등재를 일관되게 장려해 왔음을 확인하고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의 잠재 주제들을 제안했으며, 아이자킨 코조베코바 MOWCAP 등재소위원회 위원은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를 넘어 “누구의 경험이 기록되고 있는가”를 물었다.
논의는 구체적 기획으로 이어졌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원총괄실장은 진흥원이 소장한 지도ㆍ연표ㆍ역대도 자료군을 지식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재해석된 증거로 보아 한중 공동 등재를 제안했다.
이병훈 연구위원은 1592~1598년의 전쟁을 명이 깊이 연루된 근세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으로 규정하고, 진흥원에 소장ㆍ기탁된 《징비록》ㆍ《운천선조 호종일기》ㆍ《군문등록》ㆍ《당장서첩》 등을 중국 국가당안국의 명대 당안 자료와 연결할 가능성을 검토했다. 임진전쟁을 갈등의 기억이 아니라 전쟁ㆍ협력ㆍ생존ㆍ반성이라는 동아시아의 공유 경험으로 읽자는 시도다.
지식센터의 역할과 디지털 전환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헬렌 이엉 마카오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교수는 400년 넘게 동서양 문화가 교류해 온 마카오의 교회 기록ㆍ행정 문서ㆍ지도 자료를 현지 학교 교육과정에 통합해 온 실험을 보고했다.
펑 후이링 베이징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교수는 13년 동안의 디지털 기억 연구를 결산하며, 인공지능을 적극 활용하되 가치 판단과 의미 부여, 감정의 표현에서는 인간의 주체성과 우선성을 확고히 지켜야 한다고 못 박았다. 기술이 기억을 대신 쓰는 시대에 대한 분명한 선 긋기다. 이틀째 오후에는 헬렌 자비스 MOWCAP 등재소위원회 위원장과 서경호 위원(서울대 명예교수)이 공동좌장을 맡아 두 시간 반에 걸친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등재에서 실천으로, 국가에서 관계로
이번 포럼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목록에서 실천으로”다.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오랫동안 어느 나라가 몇 건을 올렸는가로 계산됐지만, 안동에서 오간 이야기는 그 셈법 바깥을 겨눴다. 등재 이후 무엇을 했는가, 유산을 나누는 제도가 오히려 유산을 삶에서 떼어놓고 있지 않은가, 누구의 기억이 빠져 있는가, 국민국가라는 등재의 기본 단위 자체를 다시 물어야 하지 않는가.
한국은 1997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시작으로 세계기록유산 강국의 자리를 지켜 왔다. 내년은 《해례본》과 《조선왕조실록》이 등재된 지 30돌이다. 그러나 등재 건수는 목적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국민이 그 가치를 일상에서 체감하고, 젊은 세대가 기억의 상속자임을 자각하며, 이웃 나라와 공유할 기억의 목록을 함께 만들어 가는 일이 남았다. 한국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 10돌의 다음 10년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