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2년 4월 26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생후 8개월 된 황손 진을 순종에게 보이고 혼인보고도 할 생각으로 동경에서 귀국했습니다. 이들 영친왕 부부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인 5월 11일 8개월 된 아기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여 독살일 거라 했지만 일제는 배앓이로 죽었다고 공식발표를 했지요.
이에 대해 일본의 피가 절반 섞인 황손을 인정할 수 없다 해서 독살했다는 설과 일제가 황실의 손을 끊으려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순종은 이를 슬퍼하고 애석히 여겼고, 어린 아기지만 왕실의 전통을 깨고 특별히 왕자의 예를 갖춰 장례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8개월의 짧은 생을 살다간 어린 아기 진은 5월 17일에 할머니 명성황후(홍릉)의 곁 숭인원에 묻힌 것입니다.
을미사변으로 비참한 최후를 당한 명성황후에 이어 독살이 유력한 아기 진(晉)의 슬픈 생을 보면서 나라를 빼앗긴 왕조의 비참함과 일제의 간악함을 다시 되새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