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지 포크가 1884년 11월 1일 서울을 떠나 남도 여행길에 올랐을 때 가장 궁금한 일 가운데 하나는 얼마 전에 미국 군함 앨러트(Aler)t호가 금강에서 좌초되었을 때 어디에서 누가 도와 주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11월 공주에서 앨러트호 좌초 사건에 관해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 실망했다. 그의 11월 5일 자 일기가 말해준다.
11월 5일
이곳 사람들은 감사나 아랫사람이나 앨러트호가 금강에 다녀간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이는 조선 정부의 일 처리와 정보 전달 실태를 보여준다.
전라도 용안에 이르러 비로소 진실을 알았다. 김노완 용안 현감이 바로 그 은인이었다. 그런데 포크는, 앨러트호가 금강에서 좌초된 일이 있었고, 조선인들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게 의문인 까닭은 조선 및 미국 측의 자료에 전혀 그 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앨러트호가 금강을 다녀간 사실조차 포크의 일기 외에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포크는 어디서 이 정보를 얻었을가? 이 의문을 풀 단서가 그의 부모님 전 상서(1884년 7월 22일)에 보인다.
일주일 전쯤에 1873년 졸업생 앨러트호의 사관(士官) 월머(Wilmer)가 와서 하루이틀 저희와 함께 지냈답니다. 어머님도 만나 보신 적이 있는 그 윌머입니다. 한양을 구경시켜 주었지요. 긴 이야기를 나누면서 옛날 사관 학교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매우 건강해 보입니다. 아직 미혼이랍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약혼한 거 같아요.
에섹스(Essex)호가 곧 이곳에서 미국으로 출항할 겁니다. 그편에 소포 두 박스를 보냅니다. 하나에는 조선 부채가 들어 있고 다른 자그마한 상자에는 호랑이 발톱이 들어 있습니다. 그건 조지 포크 아저씨에게 전해주세요. 에섹스호는 11월 전에는 미국에 도착하기 어려울 거예요. 부채는 Miss Sallie Reid, 할머니 그리고 엠마 숙모 몫입니다. 조선 부채는 미국제 같은 깃털부채가 아니랍니다.
(…)
이 편지에 따르면 1884년 7월 15일 무렵 앨러트호의 사관 윌머가 한양의 포크를 방문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하루 남짓 시간을 같이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때 윌머가 앨러트호의 금강 좌초 사건을 포크에게 말해 준 듯하다. 윌머는 조선인들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를 자세히 말했을 것이다. 감명받은 포크는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이번 여행에서 꼭 예를 갖춰 정중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리라 마음먹었다. 김노완 현감을 만났을 때 그가 얼마나 반갑고 감사해했을지 안 보아도 알 듯하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김노완은 포크의 절친 서광범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평안도 출신의 김노완(金魯莞)은 15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과 아내를 두고 홀로 한양으로 올라왔다. 이때 명문가 출신의 핵심 개화파 인사인 서광범의 집 사랑방에 머물며 식객 생활을 시작했다. 서광범은 신분과 지역적 한계가 있던 김노완의 재능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으며, 김노완은 서광범의 전폭적인 도움 덕분에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무신 관료인 김노완은 1880년 김홍집이 이끄는 일본 방문단의 일원으로 동행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근대식 군대가 어떻게 보급받고 장교를 양성하는지 등 군사 시스템과 군사 훈련 방식을 집중적으로 시찰하고 돌아왔다. 1881년 조선 첫 신식 군대인 별기군(교련병대)이 창설될 때 우부령관(부령관)에 임명되어 조선 군대의 체질 개선과 군사 훈련을 직접 통솔했다.
1882년 6월, 신식 군대(별기군)에 대한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 문제로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김노완은 구식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치명적인 수난을 겪는다. 당시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등은 피살되었으나, 김노완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뒤 군란이 진압되면서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군란의 수난을 겪은 후 1882년 지평현감을 거쳐, 1884년 1월 전라도 용안현감(현 익산시 용안면 일대)으로 부임했다. 1884년 11월 7일 김노완은 뜻밖에도 은인인 서광범의 동지인 포크를 만나 환대한다. 김노완은 1899년 기록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복수를 도모했던 용의자로 나타나며 말기까지 개화파와 근왕파 성향의 행보를 보였다.
역사 서술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본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 역사일진대 우리의 역사서술은 박제된 죽은 지식으로 엮어져 있는 것도 적지 않아 보인다. 지나치게 정치사 중심인 데다 결과론적이며 관념과잉이다. 무언가 범주(카테고리) 속에 사람을 집어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제나라 제 민족의 얼과 넋은 없고 일본인이나 미국인의 얼과 시각으로 제 나라 역사를 쓰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테스(Procrustes)는 지나가는 사람을 자신의 침대에 눕혀 침대보다 길면 잘라내고, 짧으면 억지로 늘려 침대에 맞췄다. 한국 근대사 서술은 이 신화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살아 있는 인간은 사라지고, 범주에 맞춘 박제된 인형만 남는다.
근대사 서술은 “결과가 원인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조선은 결국 망했으니, 그 이전의 모든 선택은 ‘실패의 원인’으로 재단된다. 그 속에 흐르는 값어치는 모두 잘려 나간다.
침대의 표준 규격 자체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었고, 우리는 그 침대에 우리 자신을 눕혀 스스로 마름질했다. 이 침대 속에서 우리는 더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침대를 위한 존재가 아니다.
전직 외교관(외무고시 14회),
《1402강리도》 지은이

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