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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거리

창극의 지향점… 지기학 대본집 《꿈인 듯 취한 듯》

안숙선 명창과의 창극 시리즈의 위대한 마침표
판소리의 본질과 정체성을 향한 두 예술가의 치열한 고뇌

[우리문화신문=정석현 기자]  지기학 연출가의 창극 대본집 《꿈인 듯 취한 듯》은 한국 전통 예술계의 거목 안숙선 명창과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추며 축적해 온 작은 창극 시리즈의 위대한 마침표이자, 판소리의 본질과 정체성을 향한 두 예술가의 치열한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뜻깊은 헌사다.

 

저자는 안숙선 명창이 생전에 제안했던 오우가의 구상을 표제작의 핵심 창작 동기로 삼아 이를 극 속에 훌륭하게 녹여냈으며, 춘향과 심청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들을, 시공간을 초월해 한데 아우르는 과감하고 독창적인 예술적 실험을 완성해 냈다. 오직 무대 위에서 소리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하던 명창의 순수한 열정과, 매 순간 수행자와도 같았던 성실함은 지기학 연출가에게 창극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점검하게 만드는 거울이 되었다.

 

이번 대본집은 현장에서 가장 뜨겁고 격렬하게 부딪히며 완성해 나간 그 공동 작업의 생생한 여정과 무대 위의 공기를 단 한 줄의 대사도 놓치지 않고 활자 위로 오롯이 옮겨 담아낸 귀중한 기록물이다.

 

 

작품 속에서 안숙선 명창은 시작과 끝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깊고 긴 울음으로 삶의 온갖 희로애락을 실은 거대한 수레를 묵묵히 이끄는 하얀 소와 같은 상징적 존재로 묘사된다. 저자는 침묵의 공간에서 피어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는 소리의 무변광대함을 통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인 득음을 경외심 가득한 시선으로 찬탄한다.

 

이와 동시에 소리꾼 본연의 가창과 연희적 특성이야말로 창극이라는 장르가 절대 흔들리지 않고 고수해야 할 단단한 뿌리이자 줄기가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예술적 신념을 피력한다. 소리꾼과 연출가로서 마주한 무대의 실상을 뼈아프게 꿰뚫어 보려는 구도자적 시선이 묵직하게 머무는 이 대본집은, 서양식 연극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우리 소리만의 방식으로 동시대 관객과 독자들에게 오늘날 창극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향점과 전통 무대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명확하게 제시해 준다.

 

 

이번 출간작에는 극적 서사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받았던 표제작 ‘’꿈인 듯 취한 듯‘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아동문학을 전통의 선율로 재해석해 창극과 새판소리로 각각 독립되게 완성해 낸 ’마당을 나온 암탉‘,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탄생한 음악극 ’춘향은 살아있다!‘가 함께 수록되었다. 여기에 전통 무용의 극적 구성을 치열하게 고민한 춤극 논개, 충절지무와 사승마 뱀이다!?, 그리고 강렬한 소리의 서사를 몸짓으로 풀어낸 소리춤극 서편제에 이르기까지 지기학 연출가가 평생에 걸쳐 일구어낸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대표 극본들이 한 권에 총망라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이수자이자 국립민속국악원과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을 역임하며 평생 현장을 지켜온 저자의 생생한 대본들은, 한국 연극 평론의 거목인 서연호 고려대 명예교수와 곽병창 우석대 교수의 깊이 있고 정교한 작품 해설이 더해짐으로써 단순한 공연 기록집의 한계를 넘어 전통 예술 분야의 소중한 학술적·예술적 자산이자 사료로서 그 값어치를 견고히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