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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다시 찾은 월하의 본명, 김덕순(金德順)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794]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가곡 달꽃을 피우다” 발표 무대에서 <계면, 중거-中擧>, “산촌에 밤이 드니”를 불러 객석의 공감을 얻은 김윤서 가객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노래 역시, 이수대엽에서 파생된 곡이고, <중거>라는 이름은 ‘초장(初章) 중간 부분을 높게 들어 올린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허리 드는 잦은한잎>, 또는 <중허리>라고 부른다는 점, 그 이름에서 잦은=삭(數), 한=대(大), 잎=엽(葉)을 뜻한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이 노래는 산촌(山村)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개 짖는 소리를 통해, 견공(犬公)과 함께 하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의 풍류를 떠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 이 곡은 여창의 맑고, 높은 속 소리로 이어감으로써 현대사회에 엉켜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는 이야기, 그리고 김윤서와 월하 여사는 사제(師弟)관계이기도 하지만, 그가 5살 때, 월하 선생과 가족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그 뒤의 이야기로 이어간다.

 

당시, 김윤서는 처음 월하 선생을 뵈었을 때, “너무도 곱고 밝으셔서 할머니를 보고, 따라갔다”라는 추억담을 말했다. 그러나 월하 선생의 마음속은 자신의 어린 시절, 그 과거사를 되돌아보는 듯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5살 먹은 어린 김윤서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월하 여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앞에 앉아 있는 어린 김윤서를 마주하면서 여사는 스쳐 지나가는 그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의 과거사 또한, 불행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잠시, 성경린 선생의 「월하 여사의 약전(略傳)」을 참고해 보면서 월하 김덕순 여사의 고단했던 어린 시절을 잠시 더듬어 보기로 한다.

 

월하의 본명은 김덕순(金德順)이다.

어린 시절, 그는 <유정환>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고 한다.

 

월하 여사는 1918년 2월, 경기도 고양군 한진면 보광리(현,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 보광동)에서 아버지 김희문과 어머니 이(李) 씨 사이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의 고단한 인생 역정은 너무 일찍 찾아와 모두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바로, 1910년 말기에 창궐했던 호열자(콜레라)로 인해서, 그의 할머니, 어머니, 두 오빠 등, 동시에 4인의 목숨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엄마의 차가운 시신을 더듬으며 젖을 먹겠다고 울던, 김덕순.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 살배기 젖먹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졸지에 가족 4인을 한꺼번에 잃은 그의 아버지는 실성(失性)하다시피 집을 나가 밖으로 떠돌아다녔고, 고아가 된 3자매는 뿔뿔이 흩어지는 신세가 되었는데, 큰 언니는 외가로, 둘째 언니는 수원의 어느 집 민며느리로, 그리고 막내인 김덕순은 이모의 집으로 따로따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덕순의 이러한 사정은 더더욱 여의치 못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이모네 집에서 한 2년쯤 보내던 김덕순은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살고 있던 유씨 부인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유씨 부인 또한, 양어머니와 양할머니, 친정어머니 등, 4대가 함께 모여 살고 있었기에 어린 김덕순은 자라나면서 엄했던 두 모녀 밑에서 지체 있는 가정의 아녀자로 몸가짐과 법도를 배우고 익히면서 착하고 아름답게 성장하였다고 한다.

 

월하 여사의 말이다.

 

“그때, 제 이름은 <유정환>이었지요. 나 스스로 그 이름에 어떤 저항감이나 이질감을 느끼지는 않았지요.” “그렇게 지내던 중,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수원에 사는 언니로부터 연락받고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뜻밖에도 아버지가 와 계셨고, 아버지로부터 과거사를 듣게 되는 가운데, 저의 원래 이름이 <김덕순>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어요.”

 

그 뒤, 김덕순은 16살 되는 해에, 양주군청 공무원이었던 신랑과 혼례를 올렸고, 그녀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대망(大望)의 학업이 신혼 초기에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종로구 묘동에 있는《묘동교회 부설 묘동학원》야간부 고등과에 통학하는 기쁨이 컸고, 보람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그 고생 끝에 찾아온 신혼의 꿈이라든가, 학업의 보람, 등등 모두가 다, 잠깐의 시간이 되고 만 것이다.

 

1950년 6ㆍ25사변이 터졌고, 남편은 퇴각하는 공산군 잔당에 끌려 북으로 끌려가니 애통한 생이별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