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편지 뭉치를 받은 날
6월 어느 날, 두툼한 봉투 하나가 왔다. 열어 보니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들이 쏟아졌다. 파도와 게와 불가사리가 그려진 편지지, 해바라기가 활짝 핀 편지지, 아무 무늬 없는 흰 종이에 연필로 또박또박 쓴 편지까지. 보개초등학교 5학년 1반 어린이들이 보낸 것이었다. 지난 6월 17일, 그 학교에서 《하마터면 한글이 없어질 뻔했어.》(김슬옹 글, 한울림어린이) 저자 특강을 한 뒤였다. 김기태 사서 선생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였다.
편지 마지막 장에는 담임 김재환 선생님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음악 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이 40분, 온전히 수업 1시간을 꽉 채워 가며 편지를 썼습니다. 특수반 학생도 썼고요. 다문화 학생도 연필 꾹꾹 눌러 가며 썼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마흔아홉 해 동안 한글을 붙들고 살아왔지만,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순간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열두 살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답장이자, 어른들에게 보내는 보고서다.
내가 보낸 1차 답장은 이러했다.
보개초 5학년 1반 친구들에게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슬옹 할아버지 선생님이에요.
편지를 받고 한 통 한 통 정말 여러 번 읽었어요. 음악 시간 40분을 꼬박 채워서, 연필을 꾹꾹 눌러 가며 써 준 마음이 글자마다 그대로 느껴졌거든요. 선생님이 온다고 새벽 2시까지 잠을 설치고 심장이 120까지 뛰었다는 친구, 책을 미리 사서 읽고 온 친구, OX 퀴즈를 맞히려고 눈을 반짝이던 친구들 — 그 얼굴들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여러 친구가 "65세인데 목소리도 크고 춤도 추셔서 깜짝 놀랐어요!" 하고 적어 주었지요? ^^ 사실 한글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면 나이도 잊어버리고 신이 나거든요. 여러분도 정말 좋아하는 것을 만나면 그렇게 될 거예요. 퀴즈를 많이 틀려서 속상했던 친구도 있을 텐데, 괜찮아요. 선생님이 가장 좋아한 말이 바로 "내가 한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구나!"였어요. 모른다는 걸 아는 순간이 진짜 공부의 시작이거든요. 여러분은 오늘 이미 그 문을 활짝 열었답니다.
한국말보다 영어가 더 익숙해서 책 읽기가 조금 어려웠다는 친구에게도 꼭 말해 주고 싶어요. 두 가지 말을 다 아는 건 아주 멋지고 귀한 힘이에요. 천천히, 좋아하는 책부터 한 권씩 읽다 보면 한글도 금방 친해질 거예요. 선생님이 응원할게요.
그리고 "저도 김슬옹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 "제 꿈이 국어 선생님이에요" 하고 적어 준 친구들 — 그 글자를 읽을 때 가장 기뻤어요.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 갈 다음 세대가 바로 여러분이니까요. 정말 든든했답니다. 《하마터면 한글이 없어질 뻔했어》라는 책 제목처럼, 한글은 늘 누군가의 사랑으로 겨우겨우 지켜져 왔어요. 이제는 보개초 5학년 1반 친구들이 그 사랑을 이어 줄 차례예요. 책도 천천히 읽어 보고, 부모님께도 오늘 배운 걸 알려 드리면 더 좋겠지요?
기회가 닿으면 꼭 다시 찾아갈게요. 그때까지 모두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내요. 편지 정말 고마웠어요!
2026년 6월 25일
김슬옹 할아버지 선생님이
〈보개초등 한글〉 6행시
보개초 교실에 햇살처럼 모인 아이들
개구쟁이 웃음 속에 한글 사랑 자라나니
초롱초롱 그 눈빛이 세종임금 닮았구나
등불 하나 마음에 켜고 또박또박 써 내려간
한 글자 한 글자가 오백 년을 이어 온 보물
글로 피어난 너희가 바로 다음 세대 한글꽃이란다
김재환 선생님은 말하기 수업시간에 내가 지은 책 10여 권을 반 아이들 전원이 발표하는 동영상도 보내왔다. 어찌 저자로서 울컥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순다섯 살 아저씨의 목소리가 놀라웠다는 아이들
편지를 읽다가 여러 번 웃었다. 아이들은 강연 내용보다 먼저 나의 '몸'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65세인데 목소리도 크시고 고와서 대단하세요."
"60대인데도, 목소리도 크시고 동작도 크게 하시는 게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요."
"선생님이 아까 막춤도 추시고 퀴즈도 만들어 주셔서 몰랐던 것도 알게 되었고, 원래 알고 있었던 내용도 한 번 더 자세히 알게 되어 확실하게 이해했어요!“
부끄럽지만 고마운 기록이다. 나는 강연장에서 늘 뛰고 춤춘다. 한글 이야기는 결코 근엄하게 전할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세종이 만든 문자는 백성이 쉽게 익혀 날마다 편히 쓰라고 만든 글자다. 그 글자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딱딱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종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다.
한 어린이는 이렇게 썼다.
"생각보다 100배, 1,000배 더 잘생기셨어요."
이 문장은 앞으로 내가 받을 어떤 상보다 오래 간직할 상장이다.
"한글 상식 10문항을 많이 틀렸지만“
김재환 선생님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아이들의 강의 뒤 소감을 물어보니, 한글 상식 10문항을 많이 틀렸지만 기분 나쁘기보다는 자신이 한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는 걸 깨달아서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의 강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지요? 정확하게 목표를 이루셨습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강연 때마다 한글 상식 열 문제를 낸다. 어른들도 평균 서너 개를 넘기지 못한다.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조차 헷갈리는 이가 많다. 한 어린이도 편지에 그 대목을 정확히 짚어 두었다.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만든 게 아니고 한글을 만들었는데 헷갈려서 조금 당황스러웠는데, 이해하니까 재미있었어요.“
한 어린이는 열 문제 가운데 하나만 맞혔다고 썼다. 그러고는 이렇게 이어 썼다.
"10문제에서 1개밖에 안 맞았는데, 퀴즈 덕분에 한글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어요."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배움이다. 우리는 한글을 '안다'라고 착각하며 산다. 날마다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마다 숨 쉰다고 해서 허파를 아는 것은 아니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 진짜 배움의 첫 자리다. 열두 살 어린이들이 그 자리에 정확히 섰다.
새벽 두 시까지 잠 못 든 아이
가장 오래 붙들고 읽은 편지는 전민협 어린이의 것이었다.
"김슬옹 선생님 오신다고 하셔서 바로 집 가서 구글로 확인해서 대단한 분이라고 한 번 알아봤습니다. (…) 4일 뒤에 오신다고 하셔서 책도 사고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습니다. 1일 전, 김슬옹 선생님이 오신다고 하셔서 16일 밤에 설레서 새벽 2시까지 잠을 안 자고 6시에 일어나서, 2교시에 김슬옹 선생님이 오신다고 하셔서 심박수가 120이 넘었습니다.“
담임 선생님 편지에도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아침에 집에서 심장 박동이 120까지 뛰었다는 아이가 있었다고. 나는 이 대목에서 나 자신을 반성했다. 학자가 강연 한 번을 대충 준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어느 교실에는, 그 하루를 위해 밤을 새운 아이가 앉아 있다.
배현아 어린이의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제 꿈이 국어 선생님인데, 선생님 강의 보고 국어 선생님이 더 되고 싶어요."
김채은 어린이는 "2026년의 최고의 날은 김슬옹 선생님을 만난 것"이라고 썼고, 내년이면 6학년이라 마지막이라며 아쉬워했다. 또 다른 어린이는 "김슬옹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적었다.
나는 이 아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생겼다.
"치매 안 걸리는 방법을 부모님께 알려 드릴게요“
강연에서 나는 한글을 읽고 쓰고 손으로 짓는 일이 머리를 얼마나 활발하게 만드는지도 이야기했다. 어린이들은 그 대목을 놓치지 않았다.
"부모님께 치매 안 걸리는 방법을 알려 드릴 거예요!"
"선생님이 알려 주신 치매 예방법 덕분에 저희 엄마 아빠랑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글은 세종이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려고 만든 글자다. 580년이 지난 오늘, 그 글자가 손주와 할머니를 잇는 다리가 되고 있다. 세종이 이 편지를 읽었다면 무릎을 쳤을 것이다.
한국말이 서툴러 미안하다고 쓴 어린이도 있었다.
"영어를 너무 많이 배워서 한국어를 조금 많이 까먹어서 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 좀 이해를 못 했어요. 저는 선생님이 저를 웃게 만들어서 감사합니다!"
괜찮다. 정말 괜찮다. 너는 이미 한글로 편지를 썼고, 그 편지는 내게 아주 잘 도착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글은 원래 그렇게 쓰라고 만든 글자다.
김재환 선생님께 - "다음 세대"에 관하여
선생님께서는 편지에 이렇게 쓰셨다.
"과장이 아니고 정말 헐버트-주시경-최현배 선생님의 계보를 이은 분이시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계보를 이을 다음 세대가 있어야 할 텐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앞 문장은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헐버트는 조선 사람이 한글을 업신여기던 시절에 한글로 교과서를 지었고, 주시경은 한글이라는 이름을 세워 놓고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고, 최현배는 감옥에서 나와 다시 우리말본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닦아 놓은 길 위를 걸어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다만 뒤 문장에는 분명히 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는 이미 왔습니다. 선생님 반 교실에 앉아 있습니다.
음악 시간 40분을 온전히 채워 편지를 쓴 아이들, 특수반 어린이와 다문화 어린이가 연필을 꾹꾹 눌러 가며 함께 쓴 그 교실이 바로 계보의 다음 칸입니다. 계보란 이름난 학자 몇 사람의 줄이 아닙니다. 한글을 아끼는 마음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건너가는 자리, 그것이 계보입니다. 그 건너가는 다리를 놓아 주신 분이 선생님이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쓴 어린이가 그 반에 있습니다. 강연 한 번으로 꿈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 아이 곁에 날마다 서 계셨던 분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이들이 궁금해한 저의 요즘 - 《월인천강지곡》 학술제
아이들 편지에 "요즘 뭐 하세요", "또 오세요"라는 말이 자주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의 요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환 어린이가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선생님 덕에 한글로 지은 최초의 노래, 한글을 지킨 사람들 등 많은 걸 알 수 있었어요.“
바로 그 '한글로 지은 첫 노래책'이 《월인천강지곡》입니다. 1447년 무렵, 세종이 세상을 떠난 왕비 소헌왕후를 기리며 지은 노래책입니다. 한글 활자로 찍어 낸 첫 노래책이자, 한글을 가장 크고 당당하게 앞세워 인쇄한 책입니다. 한자를 작게 두고 한글을 크게 앞세운 그 판짜기 하나만으로도, 세종이 이 글자를 어떻게 대접하려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22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월인천강지곡》 국제 학술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책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리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나라 안팎의 학자들이 모여 이 책이 왜 인류 모두의 기록 유산인지를 밝혔습니다. 여러분이 6월 17일에 만난 '한글로 지은 첫 노래책'이, 이제 온 세계가 함께 지키는 책이 되도록 어른들이 애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올해는 특별한 해이기도 합니다. 훈민정음을 세상에 펴낸 지 580돌, 한글날이 생긴 지 100돌이 되는 해입니다. 오는 10월 9일 한글날에는 한글날 100돌을 기리는 큰 학술 잔치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열두 살에 한글을 만난 2026년은, 한글 역사에서도 아주 특별한 해로 기록될 것입니다.
약속
김아현 어린이는 "2학기 때 또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면 다음 연도도 괜찮아요.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한 번 더 뵙고 싶습니다"라고 썼습니다.
하지원 어린이는 이렇게 썼습니다.
"책을 쓰시는데 많이 손도 아프시고 어깨도 아프시죠.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열두 살 어린이가 예순여섯 살 어른의 어깨를 걱정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 문장 앞에서 한참 앉아 있었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손이 아프고 어깨가 아파도 계속 쓰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개초등학교에 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졸업하기 전에, 반드시. 여러분이 준 편지들은 제 책상 앞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원고가 막히는 날, 회의가 고단한 날, 저는 그 편지들을 다시 읽을 것입니다. 한글은 임금이 만들었지만, 한글을 살려 온 것은 늘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처음 적힌 우리말 124낱말도 대부분 백성이 날마다 쓰던 살림살이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연필로 꾹꾹 눌러쓴 그 편지들이야말로, 580년 이어 온 한글 역사의 가장 최근 쪽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2026년 7월 세종국어문화원에서 김슬옹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