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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그리고 우리말

훈민정음 해례본 한 번도 안 읽고 교단에 서는 나라

교육부 장관님과 전국 시도교육감님들께 드리는 공개편지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교육부 장관님, 그리고 전국의 시도교육감님들께.

 

저는 마흔아홉 해째 우리말글 연구와 운동을 함께 해 온 사람입니다.

2014년 12월 17일, 저는 간송미술관의 각별한 배려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570년 세월을 견뎌 온 종이와 먹빛 앞에서 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학술 책임을 맡아 2015년 10월 9일, 역사상 처음으로 해례본 복간본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교보문고). 2023년에는 세종 시대 언해본의 첫 복간본도 펴냈습니다(가온누리).

 

원본을 보고 복간본을 만드는 일에 여러 해를 쏟으면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끝내 떨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을 이렇게 애써 되살려 놓았는데, 정작 우리 아이들에게 이 책을 가르칠 선생님들은 이 책을 읽어 보신 적이 있을까. 오늘, 이 편지는 그 물음에서 나왔습니다. 학자로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을 길러내는 일에 책임을 진 분들께 학자로서 드리는 간곡한 부탁입니다.

 

1. 2026년, 우리는 무엇을 기념하고 있습니까?

올해는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80돌, 한글날을 처음 정한 지 100돌이 되는 해입니다. 전국에서 기념식이 열리고 학술대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 자리들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물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이 기념의 뿌리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초ㆍ중ㆍ고 교사가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 아니, 교사를 길러내는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에서 그 책을 원문으로 통독하게 하는 곳이 한 곳이라도 있을까?

부끄럽지만, 저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2.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인데, 정작 가르치는 이는 읽지 않았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습니다. 인류 문자 역사에서 문자를 만든 사람과 만든 때와 만든 원리와 만든 뜻을 모두 밝혀 놓은 책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세계 어느 문자에도 이런 해설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원 양성 교육과정 어디에도 ‘해례본 강독’은 필수 과목이 아닙니다. 국어교육과에서조차 개론 시간에 몇 장면을 스치고, “상형의 원리로 만들었다”라는 요약 몇 줄로 지나갑니다. 1급 정교사 자격연수에도, 대부분의 직무연수에도 없습니다. 그 결과가 교실에서 아니 초중고 12년 국어교육 받은 국민 사이에서 이렇게 나타납니다.

 

•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오류가 해마다 되풀이됩니다.

• “세종이 백성을 사랑해서 만들었다”라는 감성 서사만 남고, 왜 그 사랑이 하필 문자로 표현되었는지, 어떤 원리로 스물여덟 자가 나왔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 학생이 “왜 ㄱ은 하필 ㄱ 모양인가요”라고 물으면 교사의 답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은 모양을 본떴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장 간결한 직선만으로 추상화했다는 것입니다.

• 창살 모방설, 외국 문자 기원설 같은 근거 없는 주장이 인터넷에서 되살아나도 원전을 근거로 반박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교사 개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배울 기회를 주지 않은 제도의 잘못입니다.

 

3. 왜 요약본이 아니라 원문이어야 합니까?

해례본은 요약으로 대신할 수 없는 책입니다. 그 자체가 완결된 한 권의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제자해는 왜 그렇게 만들었는가를 밝히고, 초성해ㆍ중성해ㆍ종성해는 각 소리를 어떻게 쓰는가를 밝히며, 합자해는 어떻게 모아쓰는가를, 용자례는 실제 낱말로 어떻게 쓰이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정인지 서문이 왜 만들었는가를 매듭짓습니다. 이만큼 짜임새 있는 문자 해설서는 인류 역사에 없습니다.

 

특히 용자례에 실린 94개 낱말은 한글로 적힌 첫 우리말입니다. 감, 콩, 파, 벌, 손, 뫼(산), 노로(노루), 고티(고치), 두텁(두꺼비), 어름(얼음) — 15세기 백성의 살림살이가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궁중의 말도, 사대부의 문자도 아닙니다. 훈민정음이 누구를 위한 문자였는지는 이 낱말 목록이 증명합니다. 이것을 읽지 않고 어떻게 “백성을 위한 문자”라는 말을 자신 있게 가르치겠습니까. 남의 요약을 옮기는 것과, 원문을 자기 눈으로 읽고 확신을 갖는 것은 교실에서 전혀 다른 수업이 됩니다.

 

4. 이렇게 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첫째, 교육대학ㆍ사범대학 교육과정에 ‘훈민정음 해례본 강독’을 넣어 주십시오.

국어교육과는 2학점 이상 전공 필수로, 다른 학과는 교직 소양 또는 교양 필수 과목으로 최소 한 학기, 어렵다면 15시간 집중 과정으로라도 개설해 주십시오. 교사가 되려면 우리 문자의 원전을 평생 한 번은 통독하게 하는 것 — 이것이 지나친 요구입니까?

 

둘째, 임용시험 출제 범위에 해례본 원문 이해를 명시해 주십시오.

중등 국어과는 물론, 초등 임용의 국어 교과 내용학 영역에도 넣어 주십시오. 냉정하게 말해 시험에 나오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지 않으면 배우지 않습니다.

 

셋째, 1급 정교사 자격연수와 직무연수에 해례본 강독 과정을 두십시오.

자격연수 필수 이수 시간 안에 최소 4시간, 직무연수로는 15시간에서 30시간짜리 심화 과정을 개설해 주십시오. 이미 교단에 계신 선생님들께 다시 배울 기회를 드리는 일이 급합니다.

 

넷째, 교육부는 표준 강독 교재와 연수 콘텐츠를 만들어 보급해 주십시오.

한문 원문과 현대어 옮김 그리고 언해본을 나란히 놓은 표준 교재, 그리고 중앙교육연수원 원격연수 콘텐츠를 만들면 전국 어느 학교의 교사든 배울 수 있습니다.

 

다섯째, 시도교육청은 교사 연구 모임과 지역 강좌를 지원해 주십시오.

한글날 100돌인 올해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예산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5. “어렵다”라는 말은 핑계입니다

해례본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전체 분량은 33장, 문장으로 세면 366문장입니다. 저는 지금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이 366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강좌를 스물세 번째 열고 있습니다. 매주 두 시간씩 열두 번, 모두 스물여덟 시간이면 완독합니다. 한문학 전공자도 국어학자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해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 돈과 자기 저녁 시간을 들여서 말입니다.

 

스물여덟 시간입니다. 스물여덟 자를 배우는 데 스물여덟 시간. 4년의 교원 양성 과정과 수십 시간의 연수 가운데 스물여덟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아끼고 있는 것입니까.

 

맺으며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바꾸는 일, 세계기록유산에 우리 문헌을 올리는 일, 기념사업을 크게 여는 일 — 모두 소중합니다. 저 또한 그 일들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기념은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읽는 것입니다. 교사 한 분이 해례본을 통독하면 그분이 만나는 수백, 수천 명의 학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기념식도 이만한 힘을 갖지 못합니다.

 

“교사가 되려면 《훈민정음 해례본》을 한 번은 읽는다.”

이 한 줄을 교육과정에 넣어 주십시오. 580년 전 스물여덟 자를 만들며 세종이 품었던 뜻에 대한, 가장 정직한 응답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2026년 8월

                                          김슬옹 드림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겸임교수 /

                                          훈민정음학, 한글학, 국어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