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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그리고 우리말

《훈민정음 해례본》, 서예학의 눈으로 다시 읽다

《훈민정음 서체연구》 펴낸 문곡 박병천 교수 만나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훈민정음학 박사]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동안 주로 국어학의 눈으로 읽혀 왔다. 그런데 해례본은 '문자에 관한 책'이기 이전에 '문자로 쓰인 책'이다. 붓끝이 지나간 자리, 점과 선과 원의 짜임 그 자체가 연구 대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낯설고 외로운 길을 55년 넘게 홀로 걸어온 이가 있다. 서예가이자 서체연구가인 문곡(文谷) 박병천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다. 《한글궁체연구》(1983), 《한글판본체연구》(1999), 《한글서간체연구》(2007), 《한글서체학연구》(2014)로 이어져 온 그의 연구 여정은 2021년, 반포 575돌 한글날에 맞추어 펴낸 567쪽의 역저 《훈민정음 서체연구》(한글ㆍ·漢字)로 하나의 봉우리에 올랐다.

 

 

이 책에서 그는 해례본 한글문자의 제자원리를 서예학적으로 재해석하고, 해례본 한자 글씨의 주인공이 안평대군임을 실증적으로 밝혔으며, 역대 영인본의 오류와 정음편 낙장 복원의 새 개선안까지 제시했다. 국어학ㆍ서예학ㆍ디자인학을 아우르는, 말 그대로 '훈민정음 서체학'의 집대성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훈민정음 해례본》 연구의 길에서 선생과 동행해 왔다. 충북 음성 한내골옛글집에서 '조경야독(造景夜讀)'의 나날을 보내고 계신 선생을 뵙고, 이 책에 담긴 55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훈민정음'이란 한글 글자는 없다“

 

김슬옹(아래 김): 선생님, 먼저 책 펴냄을 축하드립니다. 머리말 첫머리에 던지신 화두가 인상 깊었습니다. "《訓民正音》에 「훈민정음」이란 한글 문자가 있는가?" 독자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질문일 텐데요.

 

박병천(아래 박): ”많은 분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하면 당연히 '훈민정음'이라는 한글 글자가 큼직하게 쓰여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 해례본을 펼쳐 보면 책 이름도, 본문의 핵심 용어도 모두 한자 '訓民正音'으로 되어 있지요. 한글은 새 문자의 보기 글자로, 낱자와 합자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해례본을 구성하는 한글과 한자, 이 두 문자의 '발원(發源)'을 서체의 눈으로 탐구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 글씨를 누가, 어떤 원리로, 어떤 아름다움으로 썼는가를 묻는 순간, 해례본은 전혀 다른 책으로 다가옵니다.“

 

김: 국어학자들이 익히 보아온 해례본인데도 이 책을 읽으면 "마치 다른 책을 보는 것 같다"라는 고 정우영 교수님의 추천사가 떠오릅니다. 서예학적 관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는 것인지요.

 

박: ”국어학이 해례본의 '말과 소리와 원리'를 본다면, 서예학은 '꼴'을 봅니다. 글자 하나하나의 점획 굵기, 방향, 접필, 여백, 판식 안에서의 배자(配字, 글자 사이 간격과 균형을 아름답게 배치)까지 계측하고 비교하는 것이지요. 이번 책에서 해례본의 한글문자를 부분별ㆍ자모별로 전수 조사해 수량과 종류를 통계로 밝혔고, 정음편 예의부터 용자례까지 부분별 한글서체의 특징을 낱낱이 분석했습니다. 글자 한 자 한 자를 스캔해서 오려 붙이고 견주는 일은 지루한 노동이지만, 그 축적 없이는 어떤 이론도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55년 외길, '한글서체학'을 세우기까지

 

김: 선생님께서 1971년 한글서예 교육학 연구에 들어선 지 55년, 이어 한글서체학 연구에 들어서신 것이 어느덧 45년이 넘었습니다. 그 시절엔 이 분야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지요.

 

박: ”낯설고 외로운 시대였습니다. 국전 입선 작가로 창작 활동을 하다가 1975년 《한글서예》라는 첫 책을 내면서 창작을 잠시 멈추고, 서예교육과 서체연구라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대만 국립정치대학교에서 외국인 처음으로 서예교육 전공 박사학위를 받으며 한자 서체미학의 이론 틀을 세웠고, 그 방법론을 한글로 가져와 궁체ㆍ판본체ㆍ서간체 연구를 차례로 해냈습니다. 2014년 《한글서체학연구》로 방법론을 종합했고, 2015년부터 5년에 걸쳐 그 모든 것을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원천문헌에 쏟아부은 결과가 이번 책입니다.“

 

김: 궁체에서 출발해 판본체ㆍ서간체를 거쳐 마침내 '원천'인 해례본으로 거슬러 올라가신 셈입니다. 강 하구에서 발원지로 올라가는 여정처럼 느껴집니다.

 

박: ”정확한 표현입니다. 한글 글꼴의 모든 물줄기는 결국 해례본에서 발원합니다. 하류의 물줄기들을 먼저 익히고 나서야 발원지의 물맛을 제대로 알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순서가 뒤바뀌었다면 이만한 분석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해례본 한자 글씨의 주인공은 안평대군

 

김: 이번 책의 가장 큰 학술적 화제는 역시 해례본 한자 글씨의 주인공을 안평대군으로 밝히신 대목입니다. '그럴 것이다'라는 통설에 머물던 것을 정면으로 파고드셨는데요.

 

박: ”안평대군이 썼으리라는 추정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서체 실증으로 따져본 연구는 없었습니다. 저는 안평대군의 필적 가운데 해례본과 같은 해서ㆍ행서ㆍ해행서 계통 자료만 골랐습니다. 경오자로 찍은 활자본, 석각 비문, 직접 필사한 금니사경 등 12종입니다. 이를 해례본 한자와 글자 단위로 겹쳐 놓고 점획의 구조와 운필의 습관을 비교했지요. 세조가 집권하면서 안평대군의 필적을 대부분 없애 버렸기에 남은 자료가 매우 드물다는 것이 이 작업의 가장 큰 난관이었습니다.“

 

김: 서체 비교만이 아니라 전문가 설문이라는 방법도 동원하셨지요.

 

박: ”서체 판단에는 안목의 객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학자와 서예가 등 전문가 50분을 모시고 1차ㆍ2차 설문 자문을 진행해, 저 혼자만의 눈이 아니라 이 분야 집단 지성의 판단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서예론적 관계성과 문헌 기록, 곧 세종이 운회 번역을 수양대군ㆍ안평대군에게 관장하게 했고, 안평대군이 훈민정음 창제와 용비어천가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까지 함께 놓고 보면, 해례본 한자 서체의 주인공은 안평대군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김: 계유정난으로 서른다섯에 삶을 마감한 비운의 명필이 남긴 가장 큰 필적이 다름 아닌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면, 이는 서예사만이 아니라 한국 문화사 전체를 다시 쓰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박: ”그렇습니다.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면서도 실물 필적이 거의 남지 않은 안평대군에게, 해례본은 사실상 가장 크고 가장 빛나는 유산인 셈이지요.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해례본의 값어치에 또 하나의 층위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영인본의 오류, 그리고 낙장 복원의 새 제안

 

김: 이 책의 또 다른 실천적 성과는 역대 영인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정음편 낙장 복원의 개선안을 내신 것입니다. 1940년 발견 당시 이용준이 보사(補寫, 원본이 손상되거나 빠진 부분을 다시 써넣어 보완하는 작업)한 첫 두 장의 문제는 저 역시 오래 씨름해 온 주제인데요.

 

박: “해례본이 발견된 뒤 여러 영인본이 나왔지만, 원본과 다르게 처리된 기호와 자형의 오류가 적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는 역대 영인본별로 오류 실태를 조사하고 수정 방안과 수정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낙장 복원 문제는 더 무겁습니다. 정음편은 세종의 어지와 새 문자의 원형ㆍ운용 규정을 나라 안팎에 공표한 공시문입니다. 그 상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그래서 그간 나온 여러 복원안과 문화재청 정본안(2017)의 판식 구조, 문장 구성, 문자 서체를 조목조목 분석하고, 한글서체의 표준 원형, 구두점 처리, 병서행 안배 문제까지 아우른 새로운 개선안을 내놓았습니다.”

 

김: 특히 복원 난제로 남은 한자들을 해서체 대자로 복원하는 과제를 후학과의 '공론의 장'으로 열어 두신 점이 인상 깊습니다.

 

박: “복원은 한 사람의 확신으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제 안이 완결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이 개선안이 실물로 제작ㆍ복원되어, 온전한 모습의 정음편을 국민이 마주하게 되는 날을 꿈꿉니다.”

 

점ㆍ선ㆍ원의 미학, 세종 정신의 확산

 

김: 이 책은 분석에 머물지 않고 해례본 서체의 '변용과 확산'까지 내다봅니다. 한글 자형의 기본 요소를 점ㆍ선ㆍ원으로 파악하신 대목은 디자인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박: “해례본 한글은 점(ㆍ)과 선(ㅡ, ㅣ)과 원(ㅇ)이라는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요소로 짜인 문자입니다. 그 단순함이 곧 무한한 조형 가능성입니다. 이 책에서는 해례본 서체가 서예 작품, 한글 글꼴 개발, 세종대왕상 제명 도안, 대한민국 국새 제작, 한글 기념주화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응용됐는지 사례를 종합하고, 앞으로의 확산 방향을 제안했습니다. 해례본의 글씨는 박물관 유리장 안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디자인과 내일의 문화 산업 속에서 살아 움직여야 할 세종 정신 그 자체입니다.”

 

김: 안상수 선생께서 추천사에서 "한글꼴 연구를 이처럼 세세히 파헤치는 분은 처음"이라 하셨는데, 서예와 타이포그래피가 이 책에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 “한글꼴 연구는 크게 서예와 활자, 두 갈래입니다. 저는 붓의 길에서 출발했지만, 활자와 글꼴의 길을 걷는 분들과 해례본이라는 발원지에서 만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원형을 정밀하게 알아야 변용도 당당해집니다.”

 

조경야독의 나날, 그리고 후학에게

 

김: 선생님께서는 지금 출생지인 충북 음성 한내골옛글집으로 귀향해 계십니다. 머리말에 '주경야독이 아닌 조경야독(造景夜讀)'이라 쓰신 표현이 참 좋았습니다.

 

박: “낮에는 정원을 가꾸고 밤에는 책을 읽고 씁니다. 이 책은 그 조경야독 5년의 성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무를 심고 돌을 놓는 일과 글자의 점획을 살피는 일이 다르지 않더군요. 둘 다 자리와 짜임과 어울림의 일입니다.”

 

김: 끝으로, 훈민정음 연구의 길에 들어서는 후학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 “공부란 좁고 깊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저는 한 우물만 팠습니다. 해례본은 언어ㆍ문자ㆍ철학ㆍ음악이 융합된, 우리 전적 문화재의 백두요 한라입니다. 그 망망대해에는 아직 분석되지 않은 강물과 샛물이 무수합니다. 국어학의 눈, 서예학의 눈, 디자인의 눈, 그리고 김 박사 같은 훈민정음학의 눈이 함께 모일 때 해례본은 더 깊이 읽힐 것입니다. 젊은 연구자들이 두려움 없이 이 물길에 배를 띄우기를 바랍니다.”

 

대담을 마치고 해례본 정인지 서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슬기로운 이는 아침밥을 먹기 전에 깨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그 문자를, 한 서예학자는 45년에 걸쳐 한 획 한 획 다시 읽어 냈다. 《훈민정음 서체연구》는 그 45년이 응축된, 2020년대 훈민정음 연구를 대표할 기념비적 저작이다. 해례본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서가에 오래 꽂혀 있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