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차 한 잔에도 역사가 흐른다. 차는 산사의 선방이나 문인의 서재에서만 향기를 피운 것이 아니다. 전쟁으로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묶고, 잊힐 뻔한 조상을 다시 불러들이는 제단 위에서도 말 없는 역사가 되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넘어 삼국을 통합해 가던 격동의 시대, 그 중심에 김유신과 문무왕이 있었다.
두 사람은 군신(君臣)이면서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가 문무왕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더 깊이 거슬러 올라가면 그 혈맥은 모두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닿는다.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세손이었고, 문무왕은 어머니 문명왕후를 통하여 수로왕을 자신의 15대 시조로 받들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통일은 신라가 가야ㆍ백제ㆍ고구려를 정복한 승자의 역사만이 아니었다. 가야의 혈맥이 신라 안에서 다시 살아나 통일을 이루고, 마침내 그 조상을 차향으로 기린 생명의 역사이기도 했다.
김유신은 595년 신라에 귀속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이었고, 할아버지 김무력과 아버지 김서현은 신라의 장군이 되었다. 그의 집안에는 가야의 멸망과 신라로의 귀속, 차별과 수용, 전쟁과 화합의 역사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열다섯 살에 화랑이 된 김유신은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다. 화랑도는 무예만 익히는 군사집단이 아니라 산천을 유람하며 몸을 단련하고, 풍류와 신의, 절제와 공동체 정신을 배우던 청년 수련집단이었다.
611년, 열일곱 살의 김유신은 고구려ㆍ백제ㆍ·말갈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현실을 보고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갔다. 그는 재계하고 하늘에 맹세하며 나라를 구할 힘을 구하였다. 나흘 뒤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에게 비법을 전수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듬해에는 열박산 골짜기에서 다시 몸을 정결히 하고 기도하였으며, 하늘의 빛이 보검에 내려앉았다고 한다.
그가 산에서 벼린 것은 칼날만이 아니었다. 싸움에 나가기 전에 뜻을 세우고, 바깥의 적을 이기기에 앞서 자신의 두려움과 욕망을 다스렸다. 차가 마음을 맑히는 한 잔의 수행이라면, 김유신의 산천수련은 온몸으로 마시는 무언의 차와 같았다. 다만 김유신이 실제로 차를 마셨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그를 음다인(飮茶人)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에게서 찾아야 할 것은 찻잔의 기록이 아니라 훗날 신라의 차정신과 만나는 수행의 바탕이다. 절제ㆍ청정ㆍ신의ㆍ자연과의 감응은 화랑정신과 차정신이 서로 만나는 자리였다.
김유신은 가야 왕족의 후손이면서 신라의 장군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가야와 신라의 결합이었다. 그는 660년 태종무열왕을 도와 백제를 무너뜨렸고, 이듬해 문무왕이 즉위한 뒤에도 통일전쟁을 이끌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통일은 칼만으로 완성될 수 없었다. 성벽은 군사로 무너뜨릴 수 있어도 갈라진 사람의 마음은 예(禮)와 신뢰로만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로왕의 제사를 되살린 문무왕 661년 즉위한 문무왕은 김수로왕의 제사를 정비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어머니 문명왕후가 가야 왕실의 후손임을 밝히고, 김수로왕을 자신의 15대 시조라고 하였다. 가야는 이미 멸망했지만, 수로왕의 묘가 남아 있으므로 그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조서를 내렸다. 문무왕은 수로왕의 옛 궁터에 사자를 보내 무덤 가까이에 좋은 밭 30경을 정하고, 이를 왕위전(王位田)이라 하여 제사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賡世)가 그 밭을 관리하면서 해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ㆍ밥ㆍ차ㆍ과실과 여러 음식을 진설하여 제사를 받들었다.
기록은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해마다 때에 맞추어 술과 단술을 빚고 떡ㆍ밥ㆍ차ㆍ과실 등을 진설하여 제사를 지내니,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는 이를 “향기로운 효사(孝祀)”라고 칭송하였다. 사료의 뜻은 정확히 살펴야 한다. 문무왕이 직접 차를 따라 수로왕의 제단에 올렸다고 기록된 것은 아니며, 차만을 특별히 제물로 지정한 것도 아니다. 문무왕은 끊어져 가던 수로왕의 제사를 국가적으로 복원하고, 토지와 제도를 마련하여 제례가 지속될 기반을 세웠다. 그 제례의 진설물 가운데 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록은 문무왕 시대의 차가 사적인 음료에 머물지 않고 조상을 받드는 공식 제의의 물품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이른 사례이다. 《삼국사기》는 차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으며, 828년 대렴이 당에서 가져온 차 종자를 지리산에 심은 뒤 크게 성행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661년 무렵 제례에 차가 등장하는 것은 당시 신라 사회에 이미 차가 존재했다는 기록과도 시간상 부합한다. 다만 현전하는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 때 편찬된 자료를 일연이 《삼국유사》에 초록한 것이므로, 이를 7세기에 작성된 동시대 기록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문무왕의 조서로 복원된 수로왕 제사의 전승 속에 차가 제물로 명시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제례차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문헌적 근거이다.
정복한 나라의 시조를 자신의 조상으로 신라는 532년 금관가야를 병합하였다. 정치적으로 신라는 승자의 나라였고 가야는 사라진 나라였다. 그러나 문무왕은 가야의 역사를 지우지 않았다. 김수로왕을 자신의 조상으로 밝히고, 끊어질 위기에 놓인 제사를 국가의 제도 안에서 되살렸다.
수로왕은 정복당한 나라의 옛 임금이기 전에 문무왕의 외가 조상이었으며, 통일의 중추였던 김유신 또한 가야 왕실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수로왕 제사의 복원은 가야의 기억을 신라의 역사 밖으로 밀어내지 않고 더 큰 통일국가의 뿌리 안으로 받아들인 행위였다. 그 제단에 오른 차는 승자가 패자에게 베푸는 시혜의 잔이 아니었다. 가야의 조상과 신라의 후손, 멸망한 나라와 통일된 나라가 한자리에서 만나는 화해와 감통(感通, 느낌이나 생각이 상대방에게 통함)의 차였다.
칼은 나라의 경계를 하나로 만들었지만, 차는 서로 다른 기억을 한 향기 속에 머물게 하였다. 김유신의 칼이 전쟁을 끝낼 길을 열었다면, 문무왕이 복원한 제례의 차는 전쟁 뒤에 남은 마음의 경계를 허무는 상징이 되었다. 《삼국유사》가 수로왕의 제사를 “향기로운 효사”라고 부른 것은 제물의 향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끊어졌던 기억을 다시 잇고, 사라진 나라의 시조를 조상으로 받드는 그 마음이 향기로웠기 때문이다.
심물(心物)이 된 제례의 차
차는 물(物)이고, 차를 올리는 공경과 추모는 마음(心)이다. 마음이 깃들지 않은 차는 식어 버린 물에 지나지 않지만, 정성이 깃든 한 잔의 차는 산 자와 죽은 자, 조상과 후손,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살아 있는 심물(心物)이 된다. 심물철학에서 제례는 죽은 과거를 반복하는 형식이 아니다. 후손의 마음이 제물이라는 물을 통하여 조상의 마음과 감응하는 생명의 만남이다. 심(心)이 물(物)에 깃들고 물이 다시 마음을 일깨울 때, 제례는 활물(活物)이 된다.
수로왕의 제단에 오른 차 한 잔에는 김해 들판의 흙과 물, 차를 마련한 사람의 수고, 조상을 잊지 않으려는 후손의 마음, 가야와 신라를 하나로 잇고자 한 통합의 뜻이 함께 담겨 있었다. 한 잔의 차가 하나의 역사며, 여러 세대를 잇는 생명의 그릇이 된 것이다. 김유신과 문무왕의 차문화적 의미는 서로 같지 않다. 김유신에게서 찾아야 할 것은 화랑도의 산천수련과 재계, 절제와 청정의 수행정신이다. 그는 차를 마신 차인이라기보다 차정신이 뿌리내릴 사람의 마음을 닦은 인물로 읽어야 한다.
문무왕에게서는 제도의 차를 볼 수 있다. 그는 수로왕의 제사를 복원하고 토지를 마련하여 제례가 지속될 물적 기반을 세웠다. 그 제례에 차가 진설됨으로써 차는 개인의 음료를 넘어 조상과 국가공동체를 잇는 공적 상징이 되었다. 김유신이 닦은 것은 통일을 감당할 사람의 마음이었고, 문무왕이 세운 것은 통일을 오래 지켜 갈 나라의 예였다. 외삼촌은 통일의 길을 열었고, 조카는 그 길 위에 조상과 후손이 함께 걸을 수 있는 예를 세웠다.
오늘날 우리는 그 시대의 통일을 곧바로 현대의 민족통일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저항도 이어졌다. 그럼에도 멸망한 가야의 시조를 자신의 조상으로 밝히고 그 제사를 다시 일으킨 문무왕의 태도에는 오늘날 남북통일을 앞둔 우리가 되새길 뜻이 담겨 있다.
진정한 통일은 상대의 역사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기억을 존중하면서 더 큰 공동의 역사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다. 승자의 이름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패한 이의 눈물과 조상의 이름까지 함께 기억하는 것이다. 그 기억의 제단에 차 한 잔을 올릴 때, 통일은 영토의 결합을 넘어 마음의 통합이 된다. 칼이 지나간 자리에는 상처가 남지만, 차가 지나간 자리에는 향기가 남는다.
김유신이 칼로 삼국의 길을 열었다면, 문무왕은 차향으로 조상의 길을 다시 이었다. 그 향기는 가야의 옛 궁터에서 신라의 제례로, 조상의 마음에서 후손의 마음으로, 천삼백 년의 세월을 건너 오늘 우리의 찻잔에까지 흘러온다. 차 한 잔을 올린다는 것은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이다. 차 한 잔을 나눈다는 것은 갈라진 마음을 한자리에 앉히는 일이다. 차 한 잔을 함께 마신다는 것은 서로 다른 역사를 지우지 않고 더 큰 생명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이다. (2026. 8. 25. 북경 왕푸징(王府井)에서 라석)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북경대학 미학ㆍ철학전공 철학박사/시인
물파공간화랑 서울ㆍ북경 관장 역임
《라석심물시》, 《손병철시전집》 등 9권 시집 펴냄
국제복희역학회 회장, 한국불한선차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