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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시사 합작시 89. 밤비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밤비행

 

   인천에서 3만리 날아 뉴욕 (빛)

   철학하려면 비행하라 했지 (돌)

   철학은 순행인가 역행인가 (심)

   기러기도 날지않는 밤하늘 달)

 

              ... 25. 7. 4.불한시사 합작시

 

 

 

 

지난해 5월, 필자는 스물여덟 시간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건너 남아메리카 브라질의 상파울루에 도착하였다. 같은 불한시사 회원인 한빛 시인은 비슷한 시기, 인천에서 삼만 리 밤하늘을 날아 뉴욕에 닿았다. 나는 서쪽으로 날았고, 그는 동쪽으로 날았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떠난 두 사람은 둥근 지구의 한 하늘 아래에서 다시 이어졌다. 지구에는 동과 서가 있지만 하늘에는 본래 경계가 없다. 사람이 방향을 나누고 국경을 그을 뿐, 구름과 바람과 별빛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철학을 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한빛은 뉴욕에 사는 손자를 만나러 갔고, 나는 남미를 여행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사람은 철학을 찾아 나서지 않고도 먼 길 위에서 문득 철학과 마주친다. 익숙한 땅을 떠나 낮과 밤이 뒤바뀌는 시간을 건너다보면, 평소에는 잊고 살던 삶의 방향과 존재의 까닭을 저절로 묻게 된다.

 

이 합작시의 첫 구절은 한빛 시인이 발구(發句)하였고, 두 번째 구절은 필자가 이어 붙였다. “철학 하려면 비행하라 했지”라는 구절은 현대 중국철학자 방동미(方東美, 1899~1977)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방동미는 중국 안후이성 퉁청 출신으로, 본명은 방순(方珣)이고 동미는 그의 자(字)이다. 1917년 금릉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에서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을 연구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밟았다. 귀국한 뒤 동남대학과 중앙대학에서 교수와 철학과 주임을 지냈으며, 1948년부터 대만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주임을 지냈다. 1973년 퇴임한 뒤에는 보인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그는 유가ㆍ도가ㆍ불교와 서양철학을 폭넓게 아우르며 ‘광대화해(廣大和諧)’의 생명철학을 펼쳤다. 그의 철학은 차가운 개념의 체계에 머물지 않았다. 우주와 생명의 아름다움을 시인의 감성으로 노래하고, 그 시적 직관을 철학적 사유로 밝혔기에 세상은 그를 ‘동방시철(東方詩哲)’이라 불렀다. 시와 철학을 겸한 사람, 시로써 우주를 느끼고 철학으로써 생명을 해명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오래전, 방동미의 제자였던 도올 김용옥의 스승 김충렬 교수에게서 인상 깊은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방동미는 철학 강의의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 철학을 하려면 비행기표 한 장을 사서 운해 위의 하늘을 날아보라.”

 

이 말은 문헌에 적힌 정식 명제가 아니라,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해진 살아 있는 구전(口傳)이다. 그러나 그 뜻은 어떤 철학책의 한 구절보다 오래 필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왜 철학을 하려면 비행해야 하는가.

 

땅 위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높은 곳에서 세계 전체를 바라보라는 뜻이었을까. 눈앞의 이해득실과 일상의 분별을 넘어, 존재를 크고 넓게 조망하라는 가르침이었을까. 아니면 구름 위에 올라 인간이 절대적이라고 믿어 온 경계와 질서가 얼마나 작고 덧없는지를 깨달으라는 말이었을까. 그 말의 참뜻을 헤아리다가 필자는 오래전에「시(詩)와 철(哲)」이라는 짧은 시를 썼다.

 

철학을 하려면 먼저 비행기표 한 장을 사서

수천수만 피트 창공을 상쾌하게 날아보라!

붕새가 되라는 걸까 장자가 되라는 걸까

그는 시와 철을 겸하고 있음을 알 일이다

 

‘붕새가 되라는 걸까, 장자가 되라는 걸까.’

그 물음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방동미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처럼 세속의 분별과 속박을 벗어나 정신의 대자유를 얻으라고 한 것일까. 아니면 붕새가 구만리 창공을 날아오르듯 붕정만리(鵬程萬里)의 큰 포부를 품으라고 한 것일까. 어쩌면 두 뜻은 하나로 이어진다. 멀리 날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얽어매는 작은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면 아무리 높이 올라도 여전히 땅의 욕망에 붙들려 있고, 마음이 활연히 열리면 비록 한곳에 앉아 있어도 정신은 구만리 장천을 날 수 있다.

 

 

비행기가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운해 위로 솟아오르면, 인간이 발 딛고 살아가는 지상은 이내 흰 구름 아래로 사라진다. 산과 강, 도시와 마을, 국경과 영토가 모두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와 푸른 하늘만 남는다. 그 고요한 높이에서 보면 땅 위에서 그토록 크게 다투던 일들이 문득 작아진다. 영원할 것 같던 권세도, 목숨처럼 붙들었던 재물도, 서로를 갈라놓았던 국경도 한 겹 구름 아래 묻힌다. 인간이 세운 경계는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하늘과 하나의 지구만 남는다. 높이 오른다는 것은 남을 내려다보는 일이 아니라,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는 일이다.

 

구름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가는 순간에는 신선(神仙)이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가 문득 웃음이 난다. 옛 그림 속 신선과 천사는 희고 얇은 옷자락만 걸친 채 영하 수십 도의 찬 공기 속을 과연 날 수 있었을까. 더구나 구름 위에서 와인을 곁들여 식사하고, 아름다운 풍악을 들으며 수만 리 창공을 건너는 일을 동양의 신선이나 서양의 천사인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과거의 어느 제왕도 누리지 못한 천상의 호사를 오늘의 평범한 여행자가 누리고 있다. 인류가 오랫동안 신화와 전설 속에서 꿈꾸던 일이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된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심각한 철학적 사유에 앞서,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새삼 고맙고 행복해진다. 철학이란 반드시 어렵고 심오한 개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잔의 물을 감사히 마시고, 눈앞의 풍경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넓은 세상에서 서로를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갈 길을 찾는 일도 철학이다.

 

방동미가 말한 ‘광대화해’의 생명철학도 결국 우주와 인간, 자연과 문화, 개체와 전체가 서로의 생명을 살리며 더 큰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지향한다. 광대(廣大)는 단순히 공간이 넓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의 경계를 넓히는 일이며, 화해(和諧)는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제빛을 잃지 않은 채 더 큰 생명의 화음을 이루는 것이다.

 

석양 무렵의 운해는 더욱 황홀하다. 서쪽 하늘에서 번져 오는 붉은 빛이 구름의 봉우리와 골짜기를 물들이면, 흰 구름바다는 순식간에 금빛 산맥이 되고 붉은 파도가 된다. 하늘과 바다, 빛과 구름이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여기가 천상인지 지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창가 좌석을 예약한다.

그 장엄한 아름다움 앞에서는 생각조차 잠잠해진다. 철학은 말로 시작되지만 때로는 말이 멎는 곳에서 더욱 깊어진다.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침묵하는 순간, 인간은 지식으로 우주를 소유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비로소 우주 일부가 된다.

 

밤비행의 창밖에는 또 다른 우주가 열린다. 멀리 별빛이 떠 있고, 때로는 둥근 달이 비행기의 날개 곁을 오래도록 따라온다. 땅의 불빛은 어둠 속에 흩어진 또 하나의 별자리가 되기도 하고, 비행기는 낮과 밤, 동쪽과 서쪽, 어제와 오늘의 경계를 소리 없이 건넌다.

그때 “철학은 순행인가 역행인가”라는 합작시의 물음이 떠오른다.

 

비행기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시차를 거슬러 어제로 돌아가기도 한다. 몸은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마음은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본다. 서쪽으로 가는 것이 어느 순간 동쪽으로 돌아오는 길이 되고, 떠남은 이미 귀환을 품고 있다. 순행 속에 역행이 있고, 역행 속에도 새로운 순행이 있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듯하지만, 생명의 시간은 기억과 꿈, 과거와 미래가 서로 만나며 원을 그린다.

 

기러기도 날지 않는 높은 밤하늘을 인간은 날고 있다. 장자의 붕새도 밤비행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손바닥 안에 세계를 담고, 수만 리 떨어진 지구 반대편을 하루이틀 만에 오간다. 고대인이 꿈꾸던 신선의 세계가 어느새 오늘의 현실이 되었다. 중국의 한 지인 불자는 밤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선정(禪定)에 들었다고 한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의식을 거두어 눈을 떠 보니 어느덧 열세 시간이 흘러 있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길고 지루할 수 있는 밤하늘의 시간이 그녀에게는 한순간의 고요였던 것이다.

 

몸은 수만 리 창공을 날고 마음은 깊은 선정의 바다를 건넜으니, 과연 선녀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평소 닦아 온 수행과 공덕이 밤비행 속에서 피워 낸 고요의 꽃이었을 것이다. 바깥의 비행기가 하늘을 날았다면, 그의 마음은 시간마저 벗어난 청심(淸靜)의 창공을 날고 있었다.

 

누군가 인공지능 시대가 어떤 세상이 될 것인지를 물었을 때, 필자는 “신선이 사는 지상낙원이 될 수도 있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신선은 단지 하늘을 날고 오래 사는 신비한 존재만을 뜻하지 않는다. 착하고 어질며, 마음과 몸이 밝고 맑은 사람이 곧 이 시대의 신선이다. 과학기술과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날개를 달아 줄 수 있지만, 그 날개가 향할 곳까지 정해 주지는 않는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하더라도 마음이 탐욕과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세계는 낙원이 될 수 없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 마음의 성숙과 함께할 때라야 비로소 문명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된다.

 

스승께서는 맑은 마음에 신선이 되는 법이 있다고 하셨다. 선화(善化)가 곧 선화(仙化)인 것이다. 인간이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변화할 때 기술은 문명의 날개가 되고, 인공지능은 생명을 돕는 지혜가 되며, 지상은 신선이 머무는 곳으로 바뀔 수 있다.

 

그리하여 밤비행은 단순히 먼 곳으로 이동하는 일이 아니다. 땅의 경계를 넘어 시야를 넓히고, 좁은 마음을 광대한 생명의 세계로 이끄는 하나의 철학적 여행이다. 육신의 비행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 일이지만, 정신의 비행은 분별에서 화해로, 집착에서 자유로, 좁은 자아에서 드넓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철학 하려면 비행하라”는 말은 단지 높은 하늘에 올라가 보라는 권유가 아닐 것이다. 더 멀리 바라보고, 더 넓게 품으며, 더 자유롭게 사유하고, 마침내 더 아름답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철학은 별것이 아니다. 사람답게,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찾는 지혜이다. 그리고 때로 그 지혜는 별과 달이 동행하는 밤, 구름바다 위를 지나는 한 번의 비행에서 한 줄기 빛처럼 조용히 날아온다. (2026.8.28. 문경 불한산방에서 라석)

 

• 불한시사(弗寒詩社) 손말틀 합작시(合作詩)

`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 ‘불한티산방’에 모이는 벗들 가운데서 시를 쓰는 벗으로 함께 한 시모임이다. 이들은 여러 해 전부터 손말틀(휴대폰)로 서로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시형식은 손말틀 화면에 맞게 1행 10~11자씩 4행시로 쓰고 있다. 일종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