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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문화 톺아보기

비 내리는 밤, 춤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

「팔인(八人), 명무들의 삶의 향연」을 보고
[이진경의 문화 톺아보기 30]

[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비가 거세게 내리던 저녁이었다. 궂은 날씨라면 공연장을 찾는 발걸음도 주춤할 법했지만, 8월 28일 한국문화의집 KOUS에서 열린 팔인예의 「팔연화무」 객석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가득 찼다. 관객 대부분은 중ㆍ장년층이었으며, 곳곳에서는 외국인 관객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객석의 집중도는 높아졌고, 춤이 이어지는 동안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이번 공연은 2017년 공연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여덟 명의 전통무용가가 오랜 시간 서로의 춤을 나누고 교류하며 이어온 네 번째 무대다. 다만 이날은 함경남도 검무의 양승미 명인이 불의의 사고로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팔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해 온 자리였기에 그 빈자리는 더욱 아쉽게 다가왔다.

 

이날 무대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설적으로 무대의 단순함이었다. 화려한 세트나 영상, 특별한 무대장치의 기교에 기대지 않았다. 그러나 비워진 공간은 오히려 무용수의 몸과 춤사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여백이 되었다.

 

한 걸음을 내딛고 팔을 들어 올리고 몸의 방향을 바꾸는 동작 하나하나가 공간에 선을 그었다. 의상 자락이 몸을 따라 움직이고 다시 가라앉는 순간까지 하나의 조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무대장치가 공간을 채운 것이 아니라 춤이 공간을 채웠다. 특히 움직임이 절정에 이른 뒤 한순간 정지할 때면 마치 한 폭의 한국화를 무대 위에 펼쳐놓은 듯했다. 그 찰나가 완성될 때마다 객석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공연의 첫 문을 연 황순임의 승무(이매방류)는 장삼이 그려내는 유려한 선과 깊은 호흡으로 무대를 열었다. 특히 장구 반주에 맞춰 펼쳐진 화려한 북 사위는 압권이었다. 장단이 고조될수록 북을 치는 몸짓에는 절제와 힘이 동시에 실렸고, 장삼의 유연한 선과 북 사위의 역동성이 대비되며 무대를 장악했다.

 

 

이어진 유지영의 부채입춤은 공연장 밖의 궂은 날씨와 대조되는 화사함을 선사했다. 부채가 접히고 펼쳐질 때마다 몸의 선이 함께 확장되었고, 그 움직임은 마치 우중(雨中)에 화사한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나는 듯했다. 부채가 만들어내는 섬세한 선과 유연한 곡선은 무대를 밝게 물들이며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권경애의 한양교방무(정명숙류)에서는 춤사위 못지않게 무용수의 표정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아우르는 듯한 따스하고 품격 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미소는 단순한 표정 연기를 넘어 객석과 소통하는 또 하나의 춤사위처럼 다가왔다. 또한 손끝에서 전해오는 섬세한 움직임과 부드러운 몸의 흐름에는 오랜 수련에서 비롯된 여유와 깊이가 배어 있었다. 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시선을 머물게 하는 춤, 관객을 향해 열린 미소와 손끝의 세밀한 표현이 어우러지며 교방춤 특유의 기품과 풍류를 온화하게 풀어낸 무대였다.

 

 

최미나의 달구벌입춤(최희선류) 은 또 다른 방식으로 객석과 가까워졌다. 흥겨운 소고 춤사위에 이어 허리에 맨 끈을 활용한 춤사위가 펼쳐지면서 객석의 분위기를 한층 밝게 이끌었다. 몸의 움직임을 따라 유연하게 뻗어나가는 끈은 춤의 선을 공간으로 확장하며 시각적인 재미를 더했다. 소고의 경쾌함과 무용수의 흥, 끈이 그려내는 역동적인 선이 어우러지면서 관객의 호응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전통춤이 지닌 소박한 멋과 유쾌한 흥이 객석까지 번져가는 순간이었다.

 

오은명의 살풀이(이매방류)에서는 ‘한을 푼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진정한 한의 풀이는 슬픔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흥으로 승화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수건을 따라 이어지는 그리고 맺고 풀어내는 춤사위 속에는 한의 정서가 흐르면서도 그 한에 침잠하지 않는 생명력이 있었다. 춤이 진행될수록 한을 넘어서는 흥이 살아났고, 풀어냄의 과정 자체가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되는 전통춤의 정서를 보여주었다.

 

 

박수옥의 부채산조(김진홍류)는 산조의 음악적 흐름과 부채의 움직임이 긴밀하게 맞물렸다. 부채를 열고 접는 동작과 몸의 호흡이 이어지며 섬세함과 힘을 함께 보여주었고, 음악의 흐름을 몸으로 시각화하는 듯한 춤사위가 이어졌다. 부채의 선과 몸의 선이 만나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산조 특유의 자유로운 흐름과 긴장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마지막 임관규의 태평무(강선영류)는 앞선 무대와는 또 다른 기운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무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기품과 절도 있는 움직임에서는 왕의 위엄을 마주하는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힘 있게 내딛는 발디딤과 장단을 타고 이어지는 움직임은 무겁기만 하지 않았으며, 위엄과 흥을 함께 품고 있었다.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춤의 의미가 남성 무용수의 기품 있는 춤사위와 만나 공연의 마지막을 힘 있게 맺었다.

 

 

이렇듯 각 춤은 계보도, 사용하는 소품도, 몸의 언어도 달랐다. 그러나 이날 무대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오랜 시간 춤을 몸에 새겨온 무용가들의 내공이었다. 큰 동작이나 빠른 움직임만으로 시선을 붙잡는 것이 아니었다. 손끝 하나, 시선 하나, 한 걸음의 이동과 잠시 머무는 순간에도 오랜 수련의 시간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들의 춤에서 ‘멈춤’조차 비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움직임이 멎은 순간에도 호흡과 시선, 손끝의 방향에는 춤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한 동작이 완성되어 정지하는 순간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 되었고, 관객들은 그 순간마다 박수로 화답했다. 오랜 시간 축적된 몸은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아도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비에도 객석은 만석이었다. 외국인 관객을 포함한 관객들은 공연 내내 높은 집중력을 보였고, 인상적인 춤사위가 완성될 때마다 우레와 같은 손뼉 소리가 공연장을 꽉 채웠다. 무대와 객석의 호흡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공연이었다.

 

다만 공연장 환경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극장 내 냉방이 원활하지 않아 공연 내내 많은 관객이 프로그램북으로 연신 부채질을 해야 했다. 객석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채질이 자칫 무용수들의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무용수들은 흐트러짐 없이 각자의 호흡과 춤을 이어갔고, 관객들 역시 불편함 속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무대에 집중했다.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작품뿐 아니라 관객과 예술가 모두가 온전히 공연에 몰입할 수 있는 극장 환경 역시 세심하게 살펴야 할 부분이다.

 

그러한 아쉬움에도 팔인예의 「팔연화무」는 화려한 무대장치 없이 전통춤 자체가 얼마나 풍성한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몸이 선을 그리고, 의상이 여백을 만들며, 장단과 호흡이 그 위에 생명력을 더했다. 오랜 세월 춤을 이어온 이들의 몸짓은 그 자체로 충분한 무대미술이 되었다.

 

비 내리던 밤, 무대에는 일곱 명의 춤과 함께하지 못한 한 명인의 빈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팔연화무」가 남긴 것은 빈자리에 대한 아쉬움보다 오랜 시간 춤을 지켜온 예술가들의 내공, 그리고 그 춤을 알아본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