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또 하나의 신라 왕실과 산문에 얽힌 차의 이야기는 지리산 선맥을 이은 수철화상에 관한 기록이다. 수철화상(秀澈和尙)은 신라 말 실상산문의 선승이다. 생년은 자료에 따라 815년 또는 817년으로 두 가지가 전하지만, 893년 입적한 사실은 분명하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그는 삶의 덧없음을 깨닫고 출가하였다. 여러 스승에게 경전과 계율을 배운 뒤 지리산 실상사로 들어가 실상산문을 연 홍척국사의 법을 이었다. 이후 심원사와 실상사를 중심으로 선법을 펼치며 신라 왕실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수철은 경문왕의 부름을 받아 왕궁에서 선과 교의 같고 다름에 관해 문답하였다. 그의 대답을 들은 임금은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헌강왕과 진성여왕 때에도 왕실의 존경은 이어졌으며, 그는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수철은 왕실의 화려함에 머물지 않았다. 다시 산으로 돌아가 수행하고 대중을 가르쳤다. 그의 법은 궁궐 안에서 권위를 얻은 것이 아니라, 산중의 고요함 속에서 생명을 얻었다.
893년, 수철은 제자들을 불러 자기 죽음이 가까웠음을 알렸다.
“죽음이 장차 이르렀으니 나는 이제 가고자 한다. 그대들은 더욱 힘써 마땅히 부처의 뜰에서 노닐라.” 말을 마친 수철은 조용히 입적하였다. 향년 일흔아홉이었다. 진성여왕 때 왕실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수철화상(秀澈和尙)이라는 시호와 능가보월 (楞伽寶月)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에는 입적 이후의 왕실 공양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其後齋營八會,禮備十旬. 若茗若香,悉從王府."
그 뒤 여덟 차례 재를 베풀어 백일의 예를 갖추었으며, 차와 향은 모두 왕실에서 내었다.
왕실은 한 번의 의례로 추모를 끝내지 않았다. 여덟 차례 재를 마련하고 백 일 동안 예를 갖추었으며, 재에 필요한 차와 향을 모두 왕실에서 내주었다. 이처럼 차는 살아 있는 사람만을 위한 음료가 아니었다. 떠난 스승에게 올리는 공양이었고, 남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맑은 의식이었다.
향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 피어오를 때, 차는 대지의 물과 사람의 정성을 담아 영전에 올랐다. 이 차를 추선차(追善茶)라 할 수 있다. 추선(追善)은 세상을 떠난 이를 슬퍼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를 위하여 선한 공덕을 닦아 돌리는 일이다. 죽은 이를 기억하되 슬픔에만 머물지 않고, 그의 삶과 가르침을 오늘의 선한 행위로 이어 가는 것이다. 수철화상의 영전에 올린 차도 그러하였다.
찻잎은 불과 물을 만나 자신의 형체를 풀어놓고 맑은 향과 맛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의 육신도 언젠가 흩어지지만, 바르게 닦은 마음과 세상에 남긴 덕은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왕실이 여덟 차례 재를 베풀고 차와 향을 올린 것은 수철의 육신을 붙들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법과 덕을 기억하고, 그 인연을 나라와 백성의 마음속에 다시 일으키기 위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추선차는 죽음을 슬퍼하는 차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넘어서는 차이다. 한 잔의 차를 올림으로써 떠난 이는 기억 속에 다시 오고, 남은 이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마음을 일으킨다.
원랑선사 대통에게 보낸 법연차와 수철화상에게 올린 추선차는 서로 다른 시간에 놓여 있다. 법연차는 살아 있는 스승에게 보낸 차이다. 그 차는 왕실과 산문을 이어 주고, 가르침이 세상에 펼쳐지도록 인연을 맺었다.
추선차는 입적한 스승에게 올린 차이다. 그 차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가르침과 기억을 이어 주었다. 하나는 만남의 차이고 다른 하나는 이별의 차이지만, 두 차의 근본정신은 같다. 참된 스승의 덕을 존중하고 그 법이 세상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잇는 마음이다.
심물철학에서 차는 눈에 보이는 물(物)이지만, 그 차에 담긴 법의 인연과 추모의 정성은 보이지 않는 마음(心)이다. 마음이 차에 깃들면 차는 궁궐과 산문을 잇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 주는 살아 있는 심물이 된다. 경문왕의 마음은 차에 실려 월광사에 이르렀고, 원랑선사의 법은 그 차향을 따라 나라에 퍼졌다.
진성여왕 때 왕실에서 올린 차와 향은 수철화상의 영전에 이르렀고, 그의 법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인연은 만남으로 시작되지만, 기억과 실천으로 완성된다. 살아 있을 때 차 한 잔으로 좋은 인연을 맺고, 떠난 뒤에도 차 한 잔으로 그 뜻을 이어 가는 것, 그것이 신라의 법연차이며 추선차이다.
(26.9.24. 불한산방에서 라석)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북경대학 미학ㆍ철학전공 철학박사/시인
물파공간화랑 서울ㆍ북경 관장 역임
《라석심물시》, 《손병철시전집》 등 9권 시집 펴냄
국제복희역학회 회장, 한국불한선차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