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붓의 무덤(筆塚)
옛 선인들의 예술혼이 깃든 (달)
붓의 무덤에 꽃향기 어리네 (돌)
묵향인가 아이리스 향인가 (심)
여신의 싱그런 무지개 숨결 (빛)
... 25.5.22. 불한시사 합작시
붓무덤엔 아마도 붓꽃이 피었으리. 붓꽃은 꽃봉오리가 먹을 머금은 붓과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서양에선 아이리스라고 한다. 여신 헤라가 무지개 이리스에게 축복의 숨결을 불어 주었는데, 땅에 떨어져 핀 꽃이라 전한다.(한빛)
- 붓이 돌아간 자리, 필총(筆塚) -
필총(筆塚)은 글자 그대로 ‘붓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낡고 못 쓰게 된 붓을 버린 자리가 아니다. 한 자 한 획을 이루기 위하여 수없이 먹을 머금고 종이 위를 오갔던 붓, 예술가의 손끝과 호흡과 마음을 받아 글씨가 되었던 붓을 정중히 땅에 묻어 공양한 자리다. 그러므로 필총은 붓의 죽음을 애도하는 무덤이면서, 한 예술가가 평생 쌓아 올린 정진의 시간을 기리는 기념비기도 하다.
필총의 유래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중국 진ㆍ수(陳ㆍ隋) 시대의 승려이자 명필인 지영선사(智永禪師)다. 왕희지의 후손인 지영은 절강성 소흥의 옛 산음현 영흔사(永欣寺)에 머물며 오랫동안 글씨를 연마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서예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누각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수십 년 동안 왕희지의 필법과 여러 서체를 깊이 연구하였다.
지영은 해서와 초서로 『천자문』을 함께 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을 800여 본이나 필사하여 절강 일대의 절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닳고 부러진 붓이 다섯 광주리와 여러 독에 가득 차자, 그는 그것들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땅에 묻은 뒤 직접 명문을 지어 ‘퇴필총(退筆塚)’이라 이름하였다. 그에게 닳은 붓은 쓸모를 다한 폐물이 아니라, 자신의 공부와 수행을 함께한 벗이자 스승이었다.
사람들이 지영의 글씨를 구하러 끊임없이 찾아와 절의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자, 쇠로 덧씌웠다는 ‘철문한(鐵門限)’의 고사도 전한다. 쇠로 감싼 문지방과 산처럼 쌓인 몽당붓은 모두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명필은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한 획의 아름다움 뒤에는 수천수만 번 되풀이한 몸의 움직임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수행이 있었다.
당나라의 초서 명인 회소(懷素)에게도 필총의 고사가 전해진다. 집이 가난하여 종이를 넉넉히 구할 수 없었던 그는 호남성 영주 영릉의 녹천암(綠天庵) 주위에 파초를 심고, 넓은 파초 잎에 글씨를 연습하였다고 한다. 먹을 갈아 쓴 연못의 물이 검게 물들고, 닳아 버린 붓이 산처럼 쌓이자, 그것을 산 아래에 묻어 필총이라 불렀다.
지영의 글씨가 오랜 절제와 법도의 수행에서 이루어졌다면, 회소의 광초(狂草)는 술기운과 자연의 생동, 거침없는 몸짓 속에서 폭풍처럼 솟아났다. 두 사람의 서풍은 달랐으나, 그들이 지나온 길에는 한결같이 닳은 붓이 쌓여 있었다. 자유분방한 예술도 끝없는 연마에서 태어나며, 천변만화하는 한 줄의 초서 또한 수많은 실패와 반복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붓은 본래 대나무와 털로 만들어진 하나의 물건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손에 들리는 순간, 붓은 마음의 기운을 받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은 다시 예술가의 몸과 정신을 변화시킨다. 마음은 붓을 통하여 형상을 얻고, 붓은 마음의 흔적을 품음으로써 단순한 도구를 넘어선다. 그렇게 한평생 마음과 몸과 붓이 서로 감응한 끝에 이루어진 자리가 필총이니, 그것은 예술가와 사물이 하나의 생명으로 만났던 심물합일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불한시사의 합작시 「붓의 무덤」은 그 필총 위에 붓꽃이 피어났으리라고 상상한다. 먹을 머금은 붓끝을 닮은 붓꽃, 서양에서 무지개 여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리스가 오래된 붓무덤 위에 피어난다면, 동양의 묵향과 서양 신화의 꽃향기가 한자리에서 만나는 셈이다. “묵향인가 아이리스 향인가”라는 시구는 바로 그 경계를 묻는다. 붓에 남은 먹의 향기인지, 흙에서 새로 피어난 꽃의 향기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곳에서 죽음과 생명, 예술과 자연이 서로 스며든다.
필총은 붓의 끝이 아니라 붓이 다시 흙과 꽃으로 돌아가는 자리이다. 닳은 붓은 땅속에서 침묵하지만, 그 붓으로 쓴 글씨는 후세 사람의 눈과 마음에서 다시 묵향으로 살아난다. 붓의 몸은 사라져도 그 안에 깃들었던 예술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총에 어린 꽃향기는 한 송이 붓꽃의 향기만이 아니라, 선인들이 평생 갈고닦은 묵향이 세월을 건너 다시 피어나는 향기일 것이다.(2026.9.26. 병오년 한가위 뒷날 불한산방에서 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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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한시사(弗寒詩社) 손말틀 합작시(合作詩) `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 ‘불한티산방’에 모이는 벗들 가운데서 시를 쓰는 벗으로 함께 한 시모임이다. 이들은 여러 해 전부터 손말틀(휴대폰)로 서로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시형식은 손말틀 화면에 맞게 1행 10~11자씩 4행시로 쓰고 있다. 일종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