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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

난세에 선사를 청한 국사차(國師茶)
[라석의 차와 시서화] 32

[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나라가 스승을 필요로 하는 때는 태평성대만이 아니다. 오히려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고 백성의 삶이 불안해지는 난세일수록, 세상을 바르게 이끌 정신의 스승이 절실하다. 신라 말의 선승 징효대사 절중은 바로 그러한 시대를 살았다.

 

절중은 826년 휴암(鵂嵒),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 일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에 오관산사(五冠山寺)에 들어가 진전법사(珍傳法師)에게 출가하였고, 열다섯 살에는 부석사에서 화엄교학을 배웠다. 열아홉 살에는 장곡사에서 구족계(具足戒,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그는 경전의 문장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의 근원을 직접 밝히고자 했다. 금강산 장담사로 도윤선사(道允禪師)를 찾아가 사자산문의 법맥을 이었으며, 뒤에는 도담선원의 자인선사(慈忍禪師) 문하에서 십육 년 동안 참선 수행에 전념하였다.

 

오랜 수행을 마친 절중에게 세상의 명예와 벼슬은 마음을 붙들 만한 것이 아니었다. 882년 전 국통 위공이 그를 곡산사 주지로 추천했으나, 절중은 왕경과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침, 사자산의 운예선사가 간절히 청하자, 제자들을 이끌고 흥녕선원(興寧禪院)으로 들어갔다.

 

헌강왕은 절중을 궁궐로 초청하고 흥녕선원을 왕실의 근시 기구인 중사성에 예속시킬 만큼 그를 존숭하였다. 정강왕 또한 절중의 높은 덕을 받들었다. 그러나 왕실의 공경과 달리 신라의 현실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왕위는 쌓아 놓은 달걀처럼 위태로웠고, 곳곳에서 반란과 민란이 일어났다. 891년 절중은 전란을 피해 제자들과 상주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그가 떠난 뒤 흥녕선원은 병화에 휩싸여 전각이 모두 불탔다.

 

절중은 공주와 쌍봉사, 동림사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왕실에서는 무량사와 영신사에 머물러 달라고 청했고,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도 앞다투어 그를 모시고자 했다. 그러나 절중은 한곳의 명예에 머무르지 않고, 전쟁과 혼란 속에서 수행자와 백성의 마음을 보살폈다.

 

마침내 서해를 건너 은강선원(銀江禪院)에 이르러 잠시 머물렀을 때였다. 진성여왕은 황양현 부수 장연설(張連說)을 사신으로 보내 귀한 차인 명다(茗茶)와 이름난 향인 명향(名香)을 아름다운 함에 담아 전하게 하였다.

왕실의 전갈에는 이러한 뜻이 담겨 있었다.

“늘 대사를 왕좌(王佐)의 재목으로 흠모하였으므로 이제 국사(國師)의 예를 표합니다.”

 

임금이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나라의 혼란을 바로잡는 데 도움받고자 한 것이다. 이때의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임금이 자신의 지위를 낮추어 선사의 지혜를 청하고, 혼란한 나라의 앞날을 밝힐 법문을 구하는 존경과 간청의 예물이었다. 차와 함께 보낸 향에도 뜻이 있었다. 향은 흐린 공간을 맑게 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차가 선사의 정신을 맑게 받드는 공양이라면, 향은 그 덕이 나라와 백성에게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발원이었다.

 

 

그러나 절중은 국사의 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이미 깊이 혼탁해졌으므로 작은 반딧불 하나로 긴 밤의 어둠을 몰아낼 수 없고, 한 줌의 아교로 황하의 거센 탁류를 막을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이는 백성을 외면한 말이 아니었다. 수행자의 이름을 빌려 무너지는 왕실의 권위를 꾸미려 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계였다.

 

절중은 왕실이 보낸 차를 받았을지라도 권력에 마음을 맡기지는 않았다. 국사의 자리는 사양했으나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기도와 가르침은 버리지 않았다. 비문이 그를 두고 세 왕조에 걸쳐 왕도를 도왔다고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진정한 국사는 벼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나라가 어두울 때 바른길을 일깨우는 사람이다. 참된 스승은 임금의 곁에 앉아 권세를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임금에게도 자신의 마음부터 바로 세우라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성여왕이 보낸 차를 ‘국사차(國師茶)’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국사 책봉을 축하한 차가 아니라, 국사의 예를 갖추어 선사를 청한 차였다. 또한 그 청을 사양함으로써 수행자의 본분을 지킨 절중의 맑은 정신이 담긴 차였다.

 

명다와 명향을 담은 함은 물(物)이었지만, 그 안에는 난세를 구할 스승을 찾는 임금의 마음(心)이 들어 있었다. 절중이 그 예물을 마주하고 권력보다 수행자의 본분을 앞세운 순간, 차는 왕실의 물품을 넘어 한 시대의 정신을 증언하는 활물(活物)이 되었다. 차는 임금에게서 선사에게로 갔지만, 선사의 뜻은 다시 임금과 백성에게 돌아갔다. 마음이 차에 실리고 차가 다시 사람의 마음을 깨웠으니, 이것이 신라 왕실과 산문 사이에 형성된 하나의 심물차망(心物茶網)이었다.

 

절중은 900년 3월 9일, 제자들에게 선문을 지키고 종지를 무너뜨리지 말라고 당부한 뒤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세수 일흔다섯, 법랍 쉰여섯이었다. 그가 입적한 뒤 906년 ‘징효(澄曉)’라는 시호와 ‘보인(寶印)’이라는 탑호가 내려졌다. ‘징효’는 흐린 물이 가라앉아 새벽처럼 맑아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난세의 탁류 속에서도 마음을 흐리지 않았던 절중의 생애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오늘날의 지도자들도 수많은 전문가와 인공지능의 조언을 듣는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있어도 자신의 욕망을 비추어 볼 맑은 마음이 없다면 바른 판단에 이르기 어렵다. 지도자가 먼저 자신을 낮추어 지혜를 구하고, 스승은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진성여왕이 보낸 함의 차와 향은 묻는다.

나라가 어두울 때 우리는 누구에게 길을 묻는가.

스승을 찾으면서도 듣기 좋은 말만 구하는 것은 아닌가.

또한 스승이라는 사람은 권력의 초청 앞에서 바른 뜻을 지킬 수 있는가?

 

절중의 국사차는 왕실의 화려한 다례로 완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선사가 국사의 자리를 사양한 데서 그 깊은 향이 피어났다. 한 잔의 차로 스승을 청한 임금의 겸손과, 그 차 앞에서도 본분을 굽히지 않은 선사의 절개. 이것이 난세에 더욱 맑게 빛난 징효대사 절중의 차 정신이다.

 

징효대사 절중은 신라 하대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제2조이다. 도윤선사의 법맥을 계승하여 영월 사자산 흥녕선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현존하는 '흥녕선원 징효대사탑비'에는 진성여왕이 장연설을 보내 명다(茗茶)와 명향(名香)을 바치며 국사의 예를 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최언위가 924년에 지었으며, 탑비는 후삼국의 전란이 끝난 뒤인 944년 흥녕선원에 세워졌다. 현재 강원특별자치도 영월 법흥사에 남아 있다. 이 탑비는 절중의 생애뿐 아니라 신라 말 왕실과 선문, 차와 향을 통한 공경의 문화를 전하는 귀중한 금석문이다.(2026. 9. 30. 불한산방에서 라석)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북경대학 미학ㆍ철학전공 철학박사/시인

물파공간화랑 서울ㆍ북경 관장 역임

《라석심물시》, 《손병철시전집》 등 9권 시집 펴냄

국제복희역학회 회장, 한국불한선차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