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그치다나 마치다 모두 이어져 오던 무엇이 더는 이어지기를 그만두고 멈추었다는 뜻이다. 이어져 오던 것이므로 시간의 흐름에 얽혀 있고, 사람의 일이나 자연의 움직임에 두루 걸쳐 쓰이는 낱말이다. 그러나 이들 두 낱말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저만의 남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그치다와 마치다의 뜻이 서로 넘나들 수 없게 하는 잣대는, 미리 어떤 과녁이나 가늠을 세워 두었는가 아닌가이다. 미리 어떤 과녁이나 가늠을 세워 놓고 이어지던 무엇이 그 과녁을 맞혔거나 가늠에 차서 이어지지 않으면 마치다를 쓴다. 아무런 과녁이나 가늠도 없이 저절로 이어지던 무엇은 언제나 이어지기를 멈출 수 있고, 이럴 적에는 그치다를 쓴다. 자연의 움직임은 엄청난 일을 쉬지 않고 이루지만 과녁이니 가늠이니 하는 따위는 세우지 않으므로, 자연의 모든 움직임과 흐름에는 그치다만 있을 뿐 마치다는 없다. 비도 그치고, 바람도 그치고, 태풍도 그치고, 지진도 그친다. ▲ 그치다와 마치다의 뜻은 과녁이나 가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과녁이나 가늠을 세워 놓고 이어지는 무엇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고
[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자유는 사람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몸과 마음에 얽힌 굴레와 멍에 때문에 자유를 누리기가 몹시 어렵다. 가끔 굴레를 벗고 멍에를 풀었을 적에 잠간씩 맛이나 보며 살아가는 수가 있지만, 온전한 자유에 길이 머물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몸과 마음에 얽힌다는 굴레나 멍에는 빗대어 말하는 것일 뿐이고, 참된 굴레나 멍에는 소나 말 같은 집짐승을 얽어매는 연모이다. 굴레는 소나 말의 머리에 씌워 목에다 매어 놓는 얼개다. 소가 자라면 코뚜레를 꿰어서 고삐를 코뚜레에 맨다. 그리고 고삐를 굴레 밑으로 넣어서 목 뒤로 빼내어 뒤에서 사람이 잡고 부린다. 이때 굴레는 고삐를 단단히 붙들어 주어서, 소가 부리는 사람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말은 귀 아래로 내려와 콧등까지 이른 굴레의 양쪽 끝에 고삐를 매어서 굴레 밑으로 넣고 목 뒤로 빼내어 뒤에서 사람이 잡고 부린다. 굴레가 고삐를 맬 수 있게 하고 움직이지 않게 하여, 말이 부리는 사람의 뜻을 거스를 수 없도록 한다. ▲ 굴레나 멍에는 소나 말 같은 집짐승을 얽어매는 연모이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멍에는 소나 말에게 수레나 쟁기 같은 도
[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사랑하다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은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벌레나 푸나무까지도 힘이 솟아나고 삶이 바로잡힌다는 사실을 여러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그만큼 목숨의 바탕이기에, 참으로 사랑하면 죽어도 죽음을 뛰어넘어 길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여러 사람들이 삶으로 보여 주었다. 세상 모든 사람의 말꽃(문학)이나 삶꽃(예술)이 예나 이제나 사랑에서 맴돌고, 뛰어난 스승들의 가르침이 하나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부채질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랑하다와 비슷한 토박이말에 괴다와 귀여워하다와 좋아하다가 있다. 이들 넷을 비슷한 토박이말이라 했지만, 저마다 저만의 빛깔을 지니고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서로 다르다. 우선 이들 네 낱말은 괴다와 귀여워하다가 한 갈래로 묶이고, 사랑하다와 좋아하다가 다른 한 갈래로 묶여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앞쪽 갈래는 높낮이가 서로 다른 사람 사이에서 쓰는 것이고, 뒤쪽 갈래는 높낮이가 서로 비슷한 사람 사이에서 쓰는 것이다. 괴다와 귀여워하다는 아이와 어른 사이, 제자와 스승 사이, 아들딸과 어버이 사이처럼 손윗사람과 손아랫사람 사이에서 쓰고,
[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세상 목숨이란 푸나무(풀과 나무)건 벌레건 짐승이건 모두 그런 것이지만, 사람은 혼자 살지 않고 여럿이 함께 어우러져 산다. 핏줄에 얽혀서 어우러지고, 삶터에 얽혀서 어우러지고, 일터에 얽혀서 어우러져 사는 것이 사람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살자니까 서로 아끼고 돌보고 돕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겨루고 다투고 싸우기가 십상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많아지니까, 겨루고 다투고 싸우는 노릇이 갈수록 뜨거워진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지난 일백 년에 걸쳐, 침략해 온 일제와 싸우고, 남과 북이 갈라져 싸우고, 독재 정권과 싸우며 가시밭길을 헤쳐 와서 그런지 삶이 온통 겨룸과 다툼과 싸움으로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 삶이 온통 싸움의 난장판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는데, 겨룸과 다툼과 싸움을 제대로 가려 놓고 보면 그래도 세상이 한결 아늑하게 느껴진다. 정작 싸움은 그렇게 많지 않고 다툼과 겨룸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겨룸은 무엇이고, 다툼은 무엇이며, 싸움은 무엇인가? 겨루다 : 서로 버티어 승부를 다투다. 다투다 : ①의견이나 이해의 대립으로 서로 따지며 싸우다. ②승부나 우열을 겨루
[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물은 햇빛, 공기와 함께 모든 목숨에게 가장 뺄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나 물을 찾아 삶의 터전을 잡았다. 그러면서 그런 물에다 갖가지 이름을 붙였는데, 여기서는 먹거나 쓰려고 모아 두는 물이 아니라 흘러서 제 나름으로 돌고 돌아 갈 길을 가는 물에 붙인 이름을 살펴보자. 물은 바다에 모여서 땅덩이를 지키며 온갖 목숨을 키워 뭍으로 보내 준다. 이런 물은 김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땅 위로 내려와서는 다시 돌고 돌아서 바다로 모인다. 그렇게 쉬지 않고 모습을 바꾸고 자리를 옮기며 갖가지 목숨을 살리느라 돌고 돌아 움직이는 사이, 날씨가 추워지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얼음이 되기도 한다. 그처럼 김에서 물로, 물에서 얼음으로 탈바꿈하며 돌고 도는 길에다 우리는 여러 이름을 붙여 나누어 놓았다. 김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던 물이 방울이 되어 땅 위로 내려오는 것을 ‘비’라 한다. 그리고 가파른 뫼에 내린 비가 골짜기로 모여 내려오면 그것을 ‘도랑’이라 한다. 도랑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사람의 집 곁으로 흐르기 십상이기에, 사람들은 힘을 기울여 도랑을 손질하고 가다듬는다. 그래서 그것이 물 스스로 만든 길
[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값은 남이 가진 무엇을 내 것으로 만들 적에 내가 내놓는 값어치를 뜻한다. 그것은 곧 내가 가진 무엇을 남에게 건네주고 대신 받는 값어치를 뜻하기도 한다. 이때 건네주는 쪽은 값어치를 내놓아야 하지만, 값어치를 건네받는 쪽은 값을 치러야 한다. 값어치를 내놓고 값을 받는 노릇을 판다 하고, 값을 치르고 값어치를 갖는 노릇을 산다 한다. 팔고 사는 노릇이 잦아지면서 때와 곳을 마련해 놓고 많은 사람이 모여 종일토록 서로 팔고 샀다. 그때를 장날이라 하고, 그곳을 장터라 한다. 본디는 파는 쪽에서 내놓는 것도 무엇이었고, 사는 쪽에서 값으로 치르는 것도 무엇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슬기가 깨어나면서 돈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는 쪽에서는 돈으로 값을 치르는 세상이 열렸다. 그러자 돈을 받고 무엇을 파는 노릇을 일로 삼는 사람도 생겼는데, 그런 일을 장사라 하고, 장사를 일로 삼은 사람을 장수라 부른다. 장사에는 언제나 값으로 골치를 앓는다. 값을 올리고 싶은 장수와 값을 낮추고 싶은 손님 사이에 밀고 당기는 흥정이 불꽃을 튀기지만, 언제나 가닥이 쉽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흥정을 하면서 장수는 값을 끌어 올리려 하고 손님은 값
[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삶의 꽃이 말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은 지난 삼천 년 동안 끊임없이 탈바꿈하며 새로워진 서유럽 문명의 역사가 증명한다. 사람들은 서유럽 문명의 뿌리를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 말한다. 이들 두 뿌리는 모두 유프라테스·티그리스의 쐐기글자 문명과 나일의 그림글자 문명을 아우르며 자랐으나, 저마다 아주 다른 빛깔의 삶으로 꽃을 피웠다. 헬레니즘은 이승을 꿰뚫어보면서 꽃피운 헬라말(그리스말)의 문명이고, 헤브라이즘은 저승을 꿈꾸면서 꽃피운 히브리말의 문명이다. 저승에 매달린 헤브라이즘은 이승에 매달린 헬레니즘의 현세 문명과 겨루기 어려웠으므로, 겉으로 드러난 서유럽 문명의 뿌리는 헬레니즘으로 보인다. 그런 헬레니즘은 소리글자를 앞장서 가다듬어 기원전 8세기부터는 헬라말을 글말로 적으며 서유럽 문명의 뿌리로 자리 잡았고, 기원전 4세기까지 더욱 쉬운 소리글자에 헬라말을 담아 놀라운 삶의 꽃으로 지중해 문명을 이끌었다. 그런 서유럽 문명의 중심이 기원 어름에 헬라말에서 라틴말로 옮겨 갔다. 그러면서 소리글자도 ‘로마자’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더욱 쉽게 가다듬어져 라틴말을 글말로 담아내면서 라틴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헤브라
[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우리 겨레가 한문을 끌어다 쓰면서 우리를 잃어버리고 중국을 우러르며 굴러떨어진 역사를 ‘중세 보편주의’에 어우러진 문명의 전환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중국의 한문 문화에 싸잡혀 들어간 것이 중세 동아시아 보편주의에 어우러진 발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문은 그런 중세 보편주의를 이루어 내게 해 준 고마운 도구였다고 한다. 이런 소리는 이른바 중화주의자들이 셈판을 두들겨 꿍꿍이속을 감추고 만들어 낸 소리인데, 우리나라 지식인들까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중세 보편주의’란 서유럽 역사에서 끌어온 말이다. 이 말은 르네상스 이전에 모든 유럽 사람들이 라틴말을 쓰면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던 시절[중세], 가톨릭[보편] 교회의 가르침[주의]을 뜻하는 말이다. 라틴말이 유럽에 두루 쓰인 것과 한문이 동아시아에 두루 쓰인 것이 닮았다고 섣불리 ‘중세 보편주의’를 끌어다 붙였겠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다. 우선 동아시아에는 고대를 받아서 근대로 넘겨주는 ‘중세’란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기원전에 만들어진 정치·사회 체제가 19세기 말까지 거의 그대로 되풀이되었을 뿐 아니라, 한문의 위세 또한 19세기 말까지
[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한문을 끌어들이지 않았던 시절, 우리 겨레는 땅덩이 위에서도 손꼽힐 만큼 앞선 문화를 일으키며 살았다. 비록 글자가 온전하지 못하여 경험을 쌓고 가르치는 일이 엉성했을지라도, 입말로 위아래 막힘없이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하나로 어우러져 살기 좋은 세상을 일구어 이웃한 중국과 일본을 도우며 살았다. 이런 사실이 모두 우리나라 고고학의 발전에 발맞추어 알려진 터라 기껏 지난 이삼십 년 사이에 밝혀졌다.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로만 보아도, 우리 겨레는 구석기 시대에 이미 대동강 언저리(검은모루, 60만 년 전)와 한탄강 언저리(전곡리, 26~7만 년 전)와 금강 언저리(석장리, 4~5만 년 전)에서 앞선 문화를 일구며 살았다. 무엇보다도 구석기 말엽인 일만 삼천 년 전에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드러났다. 그것은 이제까지 세상에서 맨 먼저 벼농사를 지었다고 알려진 중국 양자강 언저리의 그것보다 삼천 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게다가 청원군 두루봉 동굴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꽃을 바치며 장례를 치른 신앙생활의 자취까지 드러나, 구석기 시대에 이미 높은 문화를 누리며 살았던 사실도 밝혀졌다.
[한국문화신문 = 김수업 명예교수] 국립국어원이 2011년에 ‘짜장면’을 비롯한 서른아홉 낱말을 표준어로 삼았다고 발표하여 얼마동안 이런저런 소리로 시끄럽더니 올해에 또 ‘꼬시다’를 비롯한 열세 낱말을 표준어에 넣었다고 발표하여 다시 적잖이 시끄럽다. 그런데다 나까지 나서는 노릇이 몹시 내키지 않으나 이쯤에서 우리도 표준어라는 말부터 없애면 좋겠다 싶어서 이런 글을 쓴다. 우리나라 ‘표준어규정’에는 표준어를 왜 두는지 그 까닭은 밝히지도 않았다. 제1부 표준어 사정 원칙ㆍ제1장 총칙ㆍ제1항부터 곧장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표준어규정 제1장 총칙ㆍ제1항은 표준어를 ‘무엇’으로 정하느냐를 밝힌 셈이다. 그런데 그 ‘무엇’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교양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으며, ‘두루’는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서울말’이란 과연 어떤 말인지 누구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있는 말들, 실체는 없이 이름만 있는 말들을 잇달아 놓았을 뿐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표준어란 애초에 글로써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