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사진첩을 정리하다 보니 1998년에 찍은 특별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1998년 봄, 연세대학교 교양 국어 〈글과 삶〉을 맡았다. 시간강사로서 한 학기 내가 강의하는 학생 수는 평균 200여 명이었다. 제자 이름을 모르면 스승으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이름을 외우기 위해 야외 수업 겸 모둠별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 귀퉁이에 찍힌 날짜는 3월 12일이다. 아직 겨울 기운이 남은 연세대 캠퍼스 뒤 안산 기슭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앙상한 나무와 시멘트 담장 앞이었다. 학생들은 둘둘 만 수업자료와 책을 들고 조금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만으로는 이름이 머리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을 옆에 두고 공책에 한 사람씩 옮겨 그렸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림 잘 그리는 임운하 제자가 도와주었다. 얼굴 위에 말풍선을 달고 그 안에 이름을, 풍선 꼭대기에는 성을 적었다. 장지훈, 장종철, 전소정, 이지현, 이지혜, 전진용, 전석인, 임운하, 전대홍. 한가운데 내 이름은 ‘스롱’이라고 장난스레 적었다. 그림을 다시 보니 웃음이 난다. 브이를 그리며 앉아 있던 운하는 제 얼굴에만 까만 선글라스를 씌워 놓았다. 말풍선도 구름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광산김씨상언문〉은 1727년 10월에 노론 4대신 가운데 한 사람인 이이명의 아내자 한글 문학의 대가인 김만중의 딸 김씨 부인이 영조에게 손자 이봉상과 시동생 이익명을 구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이다. 신임옥사 때 노론 대신이었던 남편은 사형을 당했고 영조가 집권한 뒤 복권이 되었지만, 다시 소론이 집권하자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속이고 도망간 이봉상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이명의 동생 이익명은 이봉상이 도망가는 것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았다. 김씨 부인은 손자를 피신시킨 것은 자신이 한 일이라며 두 사람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글을 올리게 된 것이다. 상소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공적 글 쓰기다.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선비도 상소문을 통해 자기 뜻과 주장을 펼칠 만큼 백성이라면 누구나 올릴 수 있었다. 주요 상소문은 《조선왕조실록》에 전문이 수록될 만큼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소문은 공식 행정 문서라서 한자로만 작성해야 했다. 그러한 시대에 여성이 상소문을 한글로 작성한 것은 남성 중심의 문자 권력에 균열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고 여성 상소문의 전형이 되었다. ----------------------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설날 새벽 벽에 걸어 두던 복조리, 모종철에 내리는 모종비, 138쌍의 꿩무늬가 새겨진 영친왕비의 적의, 호랑이가 입을 벌린 백제의 소변기 호자까지. 김영조 <우리문화신문> 발행인이 20년 넘게 날마다 써 온 〈날마다 쓰는 우리문화 편지〉 4,800여 회 가운데 164꼭지를 골라 한 권에 담았다. 명절과 세시풍속에서 24절기, 입을거리ㆍ먹거리ㆍ살림살이, 국악과 춤, 배달말과 한글, 문화재에 이르기까지 한 꼭지를 두 쪽 안팎으로 쉽고 짧게 풀어낸 《한국인이 알아야 할 한국문화 이야기》(얼레빗, 2023)의 지은이에게 다섯 가지를 물었다. - 〈날마다 쓰는 우리문화 편지〉가 책을 펴낸 2023년 11월 현재 4,800회를 넘겼습니다. 20년 넘게 날마다 써 온 글을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묶으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인터넷으로 날마다 편지를 보내온 지 올해로 22년째입니다. 받아 보시는 분들이 적지 않지만,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편지는 하루 읽고 지나가기 쉬운데, 책은 곁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다시 펼칠 수 있지요. 더 많은 이들에게, 특히 인터넷 편지가 닿지 않는 분들에게 한국문화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어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노을은 대개 가볍다. 하루의 끝을 붉게 물들이고 곧 사라지는, 그래서 낭만이나 쇠락의 비유로 쓰이던 풍경이다. 그런데 이하 시인은 그 노을을 “무겁다”라고 썼다. 시인의 노을은 “저녁 끼니”고, “일 가는 아버지를 떠미는 바람”이며, “오 남매 바랜 소맷귀”를 꿰매던 어머니의 밤이다. 시집 제목이자 표제작인 《어머니 노을은 무겁다》는 그렇게 한 가족의 생활 무게를 여섯 줄 시조에 얹어 놓는다. 이하 시인(본명 이만식)은 1995년 《오늘의문학》시* 신인상, 1996년《월간문학》시조* 신인상으로 등단한 뒤 시ㆍ시조ㆍ조각시를 넘나들며 1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해 왔다. 짧은 시형인 ‘조각시’ 장르를 새로 열었고, 세종문화예술상을 받았다. 경동대학교 부총장으로 재직하다 2026년 8월, 40년 교단생활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이 시조집을 냈다. 4부 90여 편은 ‘꽃 쓰기’, ‘낙서’, ‘속초 바다’, ‘내성천’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꽃과 바다와 강, 그리고 낙서처럼 던지는 시대 풍자까지,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그대로 차례가 되었다. 한글학을 공부해 온 필자로서 이 시조집에 눈길이 오래 머문 까닭이 하나 더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한산 이씨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사대부 유명천에게 시집가 서른두 살에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랐다. 1719년에 자신의 회갑을 맞아 탄생부터 회갑까지의 삶을 한글로 기록한 《한산이씨고행록》을 펴냈다. 숙종 시대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정치적 환국에 휘말린 남편을 따라 유배지를 떠돌며 험난한 삶을 살았던 일들을 자세하게 풀어썼다. 세 번이나 자식을 잃고 양자를 들였던 일, 시어머니와 남편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집안을 지켜냈던 일 등을 시간에 따라 기록했다. 유배와 관련된 정치적 사건은 언급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집안일만 서술했으나 당대 남인 사대부가의 운명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 An autobiography of Madame Lee of Hansan becoming a Classic of Women’s Writing A Hangeul memoir published b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붓으로 한글을 쓰려는 이들에게 《월인천강지곡》은 오래된 숙제였다. 1447년 무렵 세종이 손수 지어 한글 활자로 찍어 낸 이 책은 훈민정음 반포 뒤에 나온 문헌 가운데 한글이 가장 크고 당당하게 앞자리에 선 책이다. 그런데도 정작 붓을 든 사람이 곁에 두고 한 장씩 따라 쓸 교본은 없었다. 서예가 정복동이 국보 《월인천강지곡》 상권 194곡을 한 곡도 빼지 않고 옮겨 쓰고, 해설과 판독문, 낱글자 자전, 원본 영인까지 한 권에 묶어 《한글서체 교본 월인천강지곡 상》을 펴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엮은이는 《월인천강지곡》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이자 《월인천강지곡 입체 해설서》 공동 편저자이기도 하다. 펴면 필사본이고 뒤집으면 해설서가 되는 이 독특한 교본을 두고 다섯 가지를 물었다. - 《훈민정음 해례본》도 《용비어천가》도 있는데, 왜 하필 《월인천강지곡》 상권 194곡의 한글을 모두 붓으로 옮겨 쓰셨습니까? “훈민정음(해례본ㆍ판본)체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정작 ‘문장’을 익힐 자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은 설명이 한문이어서 한글보다 한자가 더 많고, 《용비어천가》는 125수 가운데 한글로만 쓰여 있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 숙종 6년인 1680년 12월 22일 숙종의 어머니 명성 대비가 송시열에게 벼슬길에 나오기를 권고하는 전유(傳諭)를 한글로 써서 보냈다. 전유는 왕실에서 신하들이나 민간에 보내는 공문서를 일컫는다. 왕실 여성이 한글로 공문서를 작성한 것은 한글의 실용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은 숙종과의 갈등으로 벼슬을 내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명성 대비가 돌아오라는 내용의 한글 편지를 직접 써 보냈던 것이다. 편지를 받은 송시열은 “이는 옛날 송나라의 선인 황후가 사마광을 만류했던 고사(古事)다.”라고 이야기했고 명성 대비의 은전에 감격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 Queen Myeongseong’s Hangeul Official Document Myeongseong DaebiJeonyu, Enhancing the Practical Use of Hangeul Korean Letters Enhancing the Practicalit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MoW) 사업은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 이 물음을 놓고 9월 1일과 2일 이틀 동안 경북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 국제포럼’이 열렸다. 부제는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미래 구축: 거버넌스, 포용성 및 지속가능성”이다. 경상북도가 주최하고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교육연구소위원회(SCEaR)가 공동으로 준비하고 세계기록유산 아시아ㆍ태평양지역위원회(MOWCAP)가 후원해 11개 나라 전문가가 자리를 함께했다. 필자는 미래엔역사박물관과 세종시가 함께 추진하는 월인천강지곡(1447)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박병천 추진위원장, 김동래 부위원장, 강순애·김선희 추진위원, 김동준 세종시 문화유산과 팀장)와 함께 참가했다.왜 지금, 왜 안동인가포럼에는 두 개의 좌표가 있다. 하나는 한국 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KMoW KC) 설립 10돌이다. 지난 10년은 등재된 기록을 ‘목록에 오른 문서’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지켜 다음 세대에 넘겨줄 ‘공동의 기억과 지식’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과정이었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2026년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한힌샘 선생 태어나신 150돌이고, 1926년 ‘가갸날’ 선포로 시작된 한글날 제정 100돌이 되는 뜻깊은 해다. 한 세기 전 조선어학회 선열들이 나라 잃은 어둠 속에서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곧 겨레를 지키는 길임을 선언했다면, 그 정신을 광복 이후 오늘까지 온몸으로 이어온 이가 바로 이대로 님이다. 한글운동 판에서 그를 가리켜 ‘한글운동계의 대통령’이라 부르는 데 토를 다는 이가 없다. 1960년대 대학생 국어운동의 깃발을 올린 이래 반세기 넘게 국어기본법 제정, 공문서 한글전용, 한글날 국경일 제정, 우리말 땅이름ㆍ회사이름 지키기 등 굵직한 싸움의 맨 앞자리에 늘 그가 있었다. 그가 2008년에 펴낸 《우리말글 독립운동의 발자취—배달말 힘 기르기의 어제와 오늘》(지식산업사)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우리말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한 흐름으로 꿰어낸 역작이다. 한글날 제정 100돌을 맞아 이 책을 다시 펼쳐야 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책이 짚어낸 ‘말글 사대주의’의 병폐가 지금, 이 순간에도 영어 간판과 알파벳 회사 이름으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명저 다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필자는 광화문 훈민정음체 한글 현판 달기 국민 모임 공동 대표로 이 안을 처음 제기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 문체부 장관이 나서고 주무 부서인 문체부 국어정책과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는 무엇인지 같은 공동 대표인 이건범 대표와 얘기를 나눠봤다. 지난 7월 26일 연세대 백양누리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행정안전부가 연 첫 ‘모두의 토론회’에서 나온 반대 의견의 문제는 무엇인지 함께 따져 봤다. 이날 반대쪽 발표를 맡은 이는 김현경 한국전통문화대 국가유산관리학과 교수다. 그 주장은 이렇게 간추릴 수 있다. 광화문은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 그때마다 현판도 바뀌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만 골랐다. 지금 논의되는 한글 현판 추가는 그 변화들과 성격이 다르다. 이미 복원이 끝난 건물 위에 새 상징을 한 겹 더 얹는 일, 곧 ‘중첩적 개입’이다. 이것은 문화유산 보존의 원칙에 어긋난다. 새로운 뜻을 더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유산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한글의 가치는 현판이 아니라 전시나 해설, 교육 같은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과 근거가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