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전하, 부디 성군이 되시옵소서.” 사극에서 울려 퍼지는 이 대소신료들의 목소리는 조선의 임금이 일상적으로 들어야 하는 간언이었다. 조선의 임금은 공부해야 했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유가사상의 핵심이었고, 조선의 군주는 ‘내성외왕(內聖外王)’, 곧 안으로는 성인이고 밖으로는 임금이어야 했다. 지금은 성인이 아니라도 성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임금의 덕성이라 보았다. 이 성인이 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바로 공부였다. 요즘이야 학교를 졸업하면 공부하라는 말은 잘 듣지 않지만, 옛날 임금은 참 힘들었다. 왕세자 시절부터 임금의 자리를 내려놓을 때까지 끊임없이 ‘경연(經筵)’이라는 체계적인 시스템에 따라 공부해야 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자,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이어야 했던 ‘극한직업’이 바로 조선의 임금이었다. 역사학자 오항녕이 지은 이 책, 《경연, 평화로운 나라로 가는 길》은 조선의 독자적인 군주 교육 시스템이었던 경연이 문치(文治)의 수단으로 어떻게 제 역할을 했는지, 조선의 경연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러한 경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세세히 짚는다. 청소년도 읽을 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땅은 저마다 이름이 있다. 우리 일상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그 뜻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지라도, 저마다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다. 꽃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 꽃은 비로소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곳도 이름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면 더없이 가깝고 정겹게 느껴지는 법이다. 이 책, 《그래서 이런 지명이 생겼대요》는 서울뿐만 아니라 강원ㆍ경기ㆍ충청 등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땅이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친절하고도 정겹게 풀어주는 책이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의 지명에 얽힌 유래도 함께 소개해 다 읽을 때쯤이면 세계로 눈을 넓힐 수 있다. 책에서 소개하는 지명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다섯 개를 뽑아보았다. #1. 장승배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경기도 화성(지금의 수원)으로 이장한 뒤, 11년 동안 12차례나 찾아갔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그러나 지금도 가깝지 않은 수원을 그 당시 가려면 꽤 먼 길을 움직여야 했다. 현륭원으로 행차하던 정조는 커다란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여기는 민가도 없고 사람도 드물어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침했다. 그래서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검계! 이름만 봐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오늘날의 조직폭력배와 유사한 검계는 도성 안팎의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든 조선 후기의 비밀 폭력조직으로, 양반 세력가의 자제들도 많이 가담해 온갖 나쁜 일을 저지르곤 했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포도대장 장붕익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장붕익은 26살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조선 영조 때, 오늘날의 경찰청장 격인 포도대장으로 활약하며 검계를 일망타진했다. 그는 전조선 후기 유명한 포도대장 집안이었던 인동 장씨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기운이 넘치고, 작은 일에 얽매이거나 남에게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장하현은 숙종 때, 장붕익은 영조 때, 손자 장지항은 영ㆍ정조 때 각각 포도대장을 지냈으니 가히 포도대장 명문가라 할 만했다. 이 책 《포도대장 장붕익 검계를 소탕하다》은 장붕익이 1725년~1735년 포도대장으로 있던 시절, 포도청에서 실제로 벌어졌거나 일어났을 법한 사건을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재구성한 책이다. 장 대장의 참모 격인 김 종사관, 특별 대원인 이 포교와 팔봉, 남이, 막동이 등이 등장해 각종 범죄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이 흥미롭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옛 그림.’ 어쩐지 근엄하기도 하고,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뭔가 공부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옛 그림’은 한동안 내가 선뜻 다가가기 힘든 대상이었다. 이런저런 그림을 자주 접하면서도, 그리고 심지어 우리나라 ‘옛 그림’을 심심찮게 보면서도, 묘하게 낯설고 어려운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이렇게 막연하고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옛 그림’은, 이 책을 계기로 계속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되었다. 처음에는 진중한 느낌 때문에 다가가기가 망설여져도 막상 대화해보면 잘 통하는 친구처럼, 옛 그림에 담긴 오묘한 맛과 신묘한 뜻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이 책, 《속속들이 옛 그림 이야기》는 뒷면에 있는 소개 문구 그대로, ‘다정한 입담으로 청중을 사로잡은 미술평론가 손철주의 강연집’이다. 그가 강의했던 내용이 네 장으로 정리되어 네 번의 특강을 듣는 기분이다. 지은이는 ‘이야기에 담긴 연희성은 역시 말로 해야 흥이 돋는다. 글로 단장하려 하니 제스처만 남고 교감이 날아간 느낌이다. 귀에 남을 이야기가 얼마나 될지 걱정스럽다.’라며 겸양을 보이지만, 귀에 착착 감기는 강의 덕분에 책장을 덮을 때까지 몰입할 수 있다. 책의 1장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니…” 교산(較山) 허균(許筠, 1569~1618). 우리는 보통 그를 《홍길동전》의 지은이로 기억한다. 첩이 낳은 자식인 서얼의 한을 그린 홍길동전은 지금도 삼척동자가 알 만큼 유명한 고전소설이다. 홍길동을 통해 허균은 자신의 꿈을 실현한다. 모두가 평등한 나라, 율도국을 세워서 말이다. 허균은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한 뒤 조선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한, 조선 중기의 문제적 인물이다. 혹자는 그가 내심은 권력을 탐했고, 음험했으며, 세상과 영합했다고 비난한다. 그도 그럴 것이 6차례 파직을 당하고 3차례 귀양을 가면서도 말년에는 권력을 잡아 득세했고, 문벌이 도도한 가문에서 적자로 태어난 전형적인 ‘금수저’였던 그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울분에 얼마나 공감했겠냐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책 《인문주의자 허균, 개혁주의자 허균》은 항변한다. 교산 허균은 진심이었다고. 명문가의 적자로 태어난 거칠 것 없는 신분임에도 서얼 차별을 반대했고, 시대가 강요하는 사상의 획일성에 반기를 들고 부패한 정치와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며, 오로지 두려워할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식민지(植民地). 우리가 수도 없이 부르고 배웠던, 우리가 불과 백여 년 전 처했던 현실인 ‘식민지’는 ‘사람을 심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 땅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수많은 자기네 나라 사람들을 이 땅에 심었다. 그들은 이 땅에 집을 짓고, 사업을 하고, 혼인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오래도록 이 땅에 남았다. 그 흔적을 다룬 책 정명섭의 《역사 탐험대, 일제의 흔적을 찾아라》는 한국에 남은 일제시대 건물, 가옥, 산업시설을 ‘노인호’라는 교수와 ‘동찬’이라는 아이가 함께 답사하며 나누는 문답으로 보여준다. 자칫 무겁고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는 재기 넘치는 대화와 풍부한 역사적 설명이 책장을 술술 넘기게 한다. 그들은 일제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다닌다. 부평 삼릉마을 줄사택 유적을 걷고, 부산 기장 광산마을을 가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보고, 박노수미술관과 벽수산장도 다녀간다. 이들이 다닌 열 곳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네 곳을 정리해보았다. 1. 삼릉마을 줄사택 유적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인천 부평에 무기공장 조병창을 세웠다. 부평은 땅이 넓고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의식주(衣食住)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로 손꼽히는 세 가지다. 그 가운데 ‘옷 잘 입기’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때와 용도에 맞춰 옷을 잘 갖춰 입는 것은 그 사람의 교양을 보여주는 수단이자, 사회적 신분과 재력을 나타내는 지표이며, 한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지렛대이기도 하다. 이 책, 《조선시대 옷장을 열다》는 다들 누구나 관심을 가질 법하지만 뜻밖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옷’이라는 소재를 통해 조선시대를 들여다본다. 조선시대 ‘옷’이라 하면 흔히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저고리에 치마를 떠올리게 되지만 조선의 옷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했다. 양녕대군의 손자 호산군도 달라고 졸랐던 ‘쓰개’부터 성종이 사치하는 풍조를 걱정해 금지한 ‘초피 저고리’, 선조가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생각해 금지한 ‘귀고리’까지, 옷과 보석으로 멋을 내는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옷장을 열었을 때 가장 눈에 띌 만한 네 가지를 추려보았다. 1. 쓰개(이엄) 쓰개(이엄)는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동물의 털과 비단, 무명 등으로 만든 방한용 모자였다. 수달이나 담비, 족제비 같은 짐승의 털가죽에 비단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화강암에 그린 듯한 독특한 질감의 그림으로 사랑받는 ‘국민화가’, 박수근이 혼인 전 부인에게 보낸 편지다.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처럼, 박수근은 혼인 뒤에도 아내와 자식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집안 살림은 늘 어려웠다. 그는 생전에는 개인전을 해보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뒤늦게 지인들의 도움으로 유작전이 열릴 만큼 빛을 보지 못한 화가였다. 박수근의 딸들은 ‘아버지의 그림이 팔리는 날이면 쌀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소금물에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은 수제비를 먹곤 했는데, 밥보다 수제비를 먹는 날이 많았다’라고 회고한다. 그래도 참 행복한 가정이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그림책을 사 줄 수 없었던 박수근 부부는 직접 그림책을 ‘만들어냈다’. 남편은 그림을 그리고 아내는 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소현세자와 강빈. 개화당이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갑오개혁의 기치를 올리기 250여 년 전, 새로운 조선을 꿈꾼 부부가 있었다. 이들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9년 동안 가난하지 않은 조선, 청나라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는 조선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애썼다. 그러나 그 꿈은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이다. 부왕인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여러 정황상 인조의 묵인 아래 독살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강성한 조선을 꿈꿨던 소현세자 내외는 어찌하여 이렇게 허망하게 가야 했을까. 이들이 인조 사후 조선을 통치했다면 조선은 경술국치를 겪지 않아도 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들의 죽음은 국운의 융성과 쇠퇴를 가른 뼈아픈 이정표였다. 이 책, 《조선궁중잔혹사》를 쓴 김이리 또한 이런 안타까움을 느꼈다. 지은이는 《조선왕조실록》과 《한국역대 궁중비사》에서 민회빈 강씨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찾을 때마다 그녀의 혜안과 열정에 탄복하며,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비사를 역사장편소설로 절절히 그려냈다. 소설은 강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물러갈 것이냐 나아갈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조선의 햄릿으로 살다간 김시습의 생애를 한 마디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한평생 출처(出處), 곧 선비의 나아감과 물러남을 고민한 그는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 선비가 세상에 나아가는 것을 ‘출(出)’, 재야에 묻혀 자신을 갈고닦는 것을 ‘처(處)’라고 한다면, 김시습은 초야에 묻혀 세월을 보내던 처사(處士)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평생 그를 괴롭힌 것은 출사(出仕)에 대한 욕망이었다. 불의한 세조 정권에 맞서 절의를 지키려 처사가 되었건만, 타고난 재능으로 조정에 출사하여 천하를 경륜하고자 했던 젊은 날의 꿈은 한평생 그를 괴롭혔다. 강숙인이 쓴 이 책, 《나는 김시습이다》는 이처럼 절의와 세속적 성공 사이에서 갈등한 김시습의 내면을 1인칭 시점으로 세밀하게 그려냈다. 지은이는 세조 정권에 저항하며 장렬히 목숨을 버린 ‘사육신’의 그늘에 가려진 ‘생육신’이 겪었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 가늘고 여린 슬픔’에 대해 쓰고자 했다고 밝힌다. 사육신 곧 1456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등 6명은 조선 중기 이후 충절의 상징으로 칭송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