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 최근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트위터에 “닭도리탕은 일본식 이름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도 트위터를 통해 “닭도리탕의 도리는 일본어 'とり(새)에서 온 것으로 보고, 이를 닭볶음탕으로 다듬었다. 도리의 어원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분명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밝혀 일부 언론에서는 이외수 선생이 망신당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말 속의 일본말찌꺼기를 명쾌한 유래와 함께 밝힌 ≪사쿠라훈민정음≫을 쓴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이 글을 보내와 이를 소개합니다. 널리 퍼트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옮기실 때는 출처를 분명히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얼레빗] 쟁점(1) 이외수 선생이 주장하는 ‘도리=토박이말’에 대하여... 작가 이외수 선생은 일본말 도리(tori,とり)를 새(또는 닭 ‘니와도리지만 도리라고도 함')로 보지 않고 우리 토박이말로 보는 근거로 닭을 ‘도려내어(토막 쳐) 만든 요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이 틀렸다기보다 이 말의 근거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닭도리탕을 만들려면 닭을 토막 내야 함은 상식이다. 통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2) - 오구라가 약탈해간 조선 유물들 - 오구라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가 게걸스럽게 긁어모은 한국의 값나가는 유물들은 그의 사후 보존회에 의해 보존되다가 1982년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유물은 일본의 중요문화재 8점, 중요미술품 31점을 포함한 1,110점이다. 세목을 살펴보면 조각 49점, 금속공예 128점, 도자기 130점, 칠공예(漆工藝) 44점, 서적 26점, 회화 69점, 염색작품 25점, 토속품 2점, 고고시대 유물 557점이다. 시대별로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전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특히 고고유물(考古遺物)은 낙랑시대와 삼국시대의 고분출토품인 기와류와 통일신라시대의 귀중한 금속공예와 토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고분출토품’이라는 말인데 고분이란 주로 왕릉이나 고대 통치자의 무덤을 말한다. 국보급 문화재를 싹쓸이해간 것도 용납할 수 없거늘 신성한 왕릉을 파헤쳐서 문화재를 약탈해갔으니 그 패륜적 행위를 어찌 말로 다하랴! 《잃어버린 조선문화유산, 동경 고려박물관 발행》18쪽에 보면 “오구라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1) 동경 우에노공원(上野恩賜公園) 안에 있는 동경국립박물관은 일본 최고(最古)이자 최대 박물관이다. 본관, 동양관, 법륭사보물관 등 5개의 전시관과 자료관을 갖춘 곳으로 소장품 수만도 11만 건을 넘으며 국보 87건, 중요문화재 622건(2009. 3. 31 현재)을 보유하고 있다. 이곳에 한반도에서 약탈한 오구라콜렉션이 자리하는데 총 1,111점이 전시되고 있다. 오구라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는 1903년에 조선에 건너와 대구에서 전기사업권과 금융업으로 일약 부자가 된 이래 조선의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는 도굴품도 개의치 않고 사들인 사람인데 그의 광적인 유물 수집은 도굴꾼과 꿍짝이 맞아 소중한 가야 시대 고분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는 불행을 만들었다. 오구라는 하나 둘 손에 거머쥔 문화재가 값나가는 것이라는 평을 듣자 그 야심을 조선 전역에 뻗치게 되는데 정당하게 문화재를 입수하지 못할 때는 협박과 공갈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금속문화재 수집가로 알려진 김동현 씨는 오구라의 공갈과 협박을 무릅쓰면서 우리의 문화재를 고집스럽게 지켰는데 그가 지킨 문화재는 지금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챠우쉔화(朝鮮花)는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중국땅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에 핀 노오란 들국화를 현지인들이 애처로워 부른이름입니다. 지난해 1권에 이어 이번에 2권을 펴냈습니다.다시 삼월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였던 만주벌의 챠우쉔화,사할린의 챠우쉔화,후쿠오카 치쿠호 탄광의 챠우쉔화, 아우내장터의 챠우쉔화를 이 계절에 생각하는 것도의의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삼일절을 앞두고 이윤옥사룀 =============================================================== 여성독립운동가가 없었다면 광복도 없었다 [서평]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2권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영조 “권총으로 삶을 마감한 아들 주검을 확인하는 어미의 가슴 속에 구멍 하나 뻥 뚫렸다 휑하니 불어오던 그 겨울의 모진 바람 한 자락 뚫린 가슴을 휘젓는다” 위는 최근 펴낸 이윤옥 민족시인의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20인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2권(도서출판 얼레빗)에 나오는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진 김상옥 어머니 ‘김점순’” 시 일부다. 아들의 주검 앞에서는 살아있는 어미도 이미 주검이다. 앞서 간
슬슬 한국은 각 급 학교의 졸업철이다. 졸업식장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 제창은 학창시절의 마지막 추억이 될지 몰라서인지 식장의 애국가 제창은 여느 때보다 우렁차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졸업식장 풍경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졸업식장에서 기미가요(국가,國歌)를 부르느니 못 부르느니 문제로 졸업과 입학 때만 되면 시끄럽다. 더불어 히노마루(국기, 國旗)에 대해서도 경례를 못하겠다고 버티는 교사와 학생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관절 무슨 곡절인가! 2008년 오사카 시립중학교 졸업식장에서 일어난 국기, 국가 제창 거부 사건은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졸업생 160명 중 159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으니 교장 선생의 붉으락푸르락하던 모습은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상상이 갈 것이다. 이날 졸업식 후에 교장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당장 3학년 담임 5명과 부담임 3명이 시교육위원회에 ‘문제교사’로 고발되었다. 오사카 시립중학교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의 집단 ‘국기(國旗)·국가(國歌) 거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데 특히 1999년 (평성 11년)
일본에 신사나 절 입구에 가면 커다란 선간판에 액운이 든 날을 표시해 놓은 “액막이 안내판”이 빠짐없이 놓여 있다. 일본말로는 “야쿠도시, 厄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일본 위키피디어에서는 “일본에서는 액재(厄災)가 자주 드는 나이가 있다. 이 풍습은 이미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부터 유래한다. 이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사람들은 예부터 뿌리 깊게 믿고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액이 든 나이는 지방이나 절, 신사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아래 사진(교토 청수사 안의 지주신사)에 보면 남성은 24살을 앞뒤로 1년을 주의해야 하고 여성은 18살을 전후해서 큰 고비를 넘겨야 한다. 또 남성은 41살과 60살을 인생의 큰 고비로 보고 있으며 여성은 32살과 36살을 주의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하여 미신이라든가 하는 말도 있지만 일본의과대학의 병리학자인 가네코(金子仁)씨는 ≪액년의 과학(厄年の科學)≫에서 19살과 25살은 청춘기에 해당하고 또 33살과 42살은 청춘기를 지나 중고년기의 과도기인지라 인생의 굽잇길에서 남성은 사회적으로 책임이 무거워지는 때로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가 많고 여성은 자녀양육 시기로 매우 분주하고 힘든 시기
한중일이라는 말로 우리는 동양 3국을 곧잘 말한다. 생김새도 닮은데다가 생활습관이나 먹거리 따위가 서양과는 사뭇 달라 이들 국가와는 가까운 형제의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설날이나 한가위 따위의 명절 때만 되면 일본은 동양에서 벗 어나 “서양사람”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명절을 한국이나 중국같이 음력으로 쇠지 않기 때문이다. 음력 설은 한국, 중국은 물론이고 화교권 나라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대만 등 대다수 나라가 음력설을 쇠는데 견주어 일본은 양력설을 따르고 있어 지난 양력 1월 1일이 설날이었다. 양력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보름달이 탐스러운 한가위를 양력 8월 15일로 쇠고 있어 우리네 정서와는 사뭇 다른 명절 분위기다. 오카다(岡田義朗)씨의 ≪달력으로 보는 일본인의 지혜≫ 에 보면 일본이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72년(명치 5년) 12월 10일부터라고 한다. 양력 실시일이 1월 1일이 아니고 12월 10일인 것은 음력으로 이해에 윤달이 끼어 있어 공무원 월급을 13개월치를 줘야 해서 부득불 12월 10일부터 양력으로 확 바꾸었다고 하니 명치정부의 기민성이 놀랍기만 하다. 명치유신(1868)은 부국강병을 내세워 일본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으로 유명한 교토 서부 아라시야마 들머리(입구)에 있는 도월교(渡月橋, 도게츠다리)를 찾은 것은 그제 점심 무렵이었다.(2012년 1월 16일) 3박 4일 답사 여정의 마지막 코스인 도월교 부근 주차장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버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관광철도 아닌 1월에 이 정도면 벚꽃이나 단풍철에는 몰려드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이 갈 만하다. 도월교가 놓인 가츠라강 하류는 강이라기보다는 큰 냇물 같은 느낌의 아담한 크기였는데 상류 쪽은 물을 가둔 보(洑)가 있어 제법 강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리 길이 250m인 도월교는 건너편 표고(標高) 375m의 아라시야마(嵐山)의 단풍과 벚꽃이 아름다워 예부터 시인 묵객과 귀족들이 넘나들던 다리다. 특히 다리이름은 가메야마왕(龜山天皇)이 이곳에 놀러 와서 물에 비친 달빛이 고와 도월교라고 붙였다고 하는데 그간 전란과 홍수 등으로 불타거나 유실되기도 하여 그때마다 새로 놓았다. 현재 다리는 1934년에 콘크리트로 기초를 다지고 나무로 난간을 만든 것으로 아라시야마의 정취와 조화를 맞추어 전체적으로 나무다리의 느낌이 들도록 설계되어있다. <교토
“성인의 날인 지난 9일 신성인(新成人)을 맞이하는 축하 행사가 현내 각지에서 열렸다. 현내(縣內)의 신성인 수는 85,991명이었다. 전년보다 692명이 많았다. ”도쿄와 맞닿아 있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신문 기사이다. 가나가와현은 요코하마가 속해 있는 현으로 인구 9백만의 대도시이다. 스무 살을 먹는 젊은이들의 잔치인 성인의 날은 1999년까지 1월 15일이던 것이 2000년부터는 1월 둘째 주 월요일로 옮겨 지방마다 성인식을 한다. 요코하마는 대형 식장이 차고 넘쳐 오전과 오후로 나눠 성인식을 치렀으며 식장으로 향하는 지하철 역 구내에는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나가다가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를 막으려고 임시 통로를 만들 정도로 성인식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이 폭발적이다. 여성들은 “하레기(晴れ着)”라고 해서 전통 기모노를 입고 털이 복슬복슬한 흰 숄을 목에 두르고 남성들은 대개 신사복 차림이지만 더러 “하카마(袴, 전통 옷)” 차림도 눈에 띈다. 특히 여성들은 이날 행사를 위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단장을 해야 하므로 시간과 돈이 어지간히 든다. 하지만, 일생 단 한 번인 스무 살 의식을 위해서라면 그깟 돈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고
엊그제 세미나가 있어 가니 초청강사 한 분이 파워포인트 자료로 특강을 하더군요. 맨 처음 비친 장면은 ‘과잉연결시대’의 화면이었습니다. 빨간 선이 얼키설키 둥근 원으로 그려져 있는 속에 인간이 갇혀 있더군요. 인터넷과 통신기기의 발달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연결’이 인간 사이에 급속도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지요. 손말틀(휴대전화)은커녕 한 마을에 전화 한 대로 연결되던 시절이 불과 삼십여 년 전인 것을 기억하는 세대로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때 우리 동네에 전화기가 있던 집은 이장집뿐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버튼식이 아니라 손가락을 전화기 다이얼에 넣고 오른쪽으로 끝까지 돌리면 나사 풀리듯 디리릭 소리를 내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고 그러면 다시 구멍에 손을 넣고 돌리는…. 박물관에나 가서 볼 수 있는 전화기를 쓸 때만 해도 과잉연결시대'라는 말을 상상도 못하던 시대였지요. 지난 성탄절 때도 그렇고 이번 새해 인사 역시 문자 메시지가 폭주까지는 아니지만 꽤 많이 들어왔는데 주로 보험회사와 슈퍼마켓, 서점, 심지어는 어디서 알았는지 아파트 분양회사까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기분이 썩 좋은 것도 아니라서 문자를 열어본 기분이 떨떠름합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