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에 볼 수 있는 일본의 장식문화 12월도 슬슬 중반이 넘어 월말로 접어드는 이때쯤 일본에서는 신년맞이 각종 집안 장식품들을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장식품이라고는 했지만 크리스마스 장식품 같은 것은 아니고 달리 말하면 부적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는 게 이해가 빠를 것 같다. 한국에서는 요즈음 ‘부적’이라고 하면 악귀를 쫓으려고 몸에 지니거나 집안에 붙여두는 것쯤으로 알지만 일본의 신년 맞이용 장식품들은 거의 악귀를 쫓거나 신령을 맞이하고 복을 빌기 위한 매개체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카도마츠(門松)”이다. 카도마츠란 ‘문송(門松)’이라는 한자에서 보듯이 대문 앞에 세워두는 소나무 가지를 말한다. 예전에는 나뭇가지 끝(木の梢, 고즈에)에 신(神)이 머무른다고 믿었기에, 문 앞에 소나무가지를 세워두는 것은 바로 신을 맞이한다는 뜻이 있다. 일본사람들은 정초 집 앞에 소나무가지를 세워두는 일을 아주 소중히 여겼는데 정초에 신을 맞이하지 않으면 그 한해는 불행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신을 맞이하는 매개체로 쓰이는 것은 소나무 가지 말고도 사카키나 동백 같은 상록수가 쓰이지만 지금은 거의 소나무만 쓴다. 헤이안시대(794-1
일본 시가현 호남시 불교미술 서울 나들이 비파호를 끼고 있는 시가현은 일본의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많이 간직한 도시들 가운데 4번째로 꼽히는 곳이다. 이곳의 보물들이 “일본 불교미술 비파호 주변의 불교신앙”이란 주제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릴 예정(12월 20일~)이다. 시가현에 있는 절과 신사에서 소유하고 있는 국보 4건과 중요문화재 31건 등 모두 94점을 선보인다. 이러한 기사가 실린 2011년 11월 22일 자 교토신문을 오려 보내온 분은 시가현 상락사의 다케우치 씨이다. 붉은 단풍이 상락사를 물들이던 지난 11월 21일 나는 백제계 양변 스님의 발원으로 지어진 상락사를 찾았는데 상락사 들머리에 있는 삼성신사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절 안내소에 있는 다케우치 씨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 다케우치 씨는 “좀 더 알아보고 한국으로 자료를 보내겠다.”라는 약속을 했다. 그로부터 3주쯤 지난 엊그제 명동 로얄호텔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재일교포 오영환씨였다. 시가현에서 다케우치 씨와 친하게 지내는 분이라며 서울 나들이 길에 다케우치 씨의 삼성신사(三聖神社)에 대한 자료를 손수 가지고 왔다면서 전해준 누런 봉투 속에는 다케우치 씨가 직접 붓으로
연말에 붐비는 도쿄 재래시장 ‘아메요코’ 연말이 다가오면 사람들의 마음은 바쁘다. 특히 외국에서 연말연시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국에 대한 향수가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일본에 있을 때 마음이 착잡할 때마다 찾아가던 곳이 있는데 우에노에 있는 재래시장인 ‘아메요코(アメ橫)’ 시장이다. 우에노 역에서 오카치마치 역까지 기다랗게 형성되어 있는 ‘아메요코’시장은 옷, 구두, 꾸미개(액세서리) 따위의 잡화를 비롯하여 사탕이며 과자는 물론이고 채소와 생선, 과일 따위를 파는 식품 가게 등 가짓수도 헤아릴 수 없는 점포가 들어서서 장사를 하는 것이 꼭 서울의 남대문 시장 같은 분위기다. 특히 아메요코 시장의 유래가 재미있다. 2차 대전 패전 뒤 사탕(일본말로 아메)을 팔던 가게가 200여 곳이 있어 붙여졌다는 이야기와 당시에 일본에 남아 있던 미군들이 본국에서 가져온 꾸미개나 값싸게 들여온 텔레비전, 냉장고 따위를 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부르던 ‘아메리카요코쵸’가 줄어서 ‘아메요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패전 뒤 일본의 경제가 어렵던 시절과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던 수도 도쿄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달콤한
우리 애들 어렸을 때만 해도 돌잔치는 집에서 치르는 줄 알았다. 지금은 이십대 중반이 된 아이들이 첫돌을 맞았을 때 친정어머니의 일손은 바빴다. 수수팥단지를 만들고 삼신할머니에게 올릴 시루떡도 손수 쪄내느라 좁은 집은 수선스러웠다. 어디 그뿐인가! 금반지 반 돈이라도 해 들고 찾아오는 일가친지를 맞아들일 준비도 하고 돌날 아침 돌잡이 상도 따로 봐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일을 집에서 하는 아이 엄마는 없다. 아이가 태어나서 맞이하는 백일과 돌잔치는 어느새 거대한 이벤트화 되어 호텔마다 젊은 부부들의 아기 돌잔치 예약이 넘쳐난다. 손님들도 금값이 비싼 지금은 현금 봉투를 들고 돌잔치가 열리는 뷔페식당이나 값비싼 호텔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일본의 돌잔치는 어떠한가 보자. 일본은 돌잔치가 없다. 엑? 하고 놀랄 분들이 계시겠지만 태어나서 치르는 첫 생일인 ‘돌’이라 부르는 특별한 잔치는 없다. 그 대신 ‘오미야마이리(お宮參り)’라고 해서 핏덩이를 막 벗어난 한 달 정도 되는 아기를 강보에 싸서 신사 참배를 한다. 그 이후에 남자아이는 3살과 5살 때 여자아이는 3살과 7살이 되는 해에 일본 전통옷을 곱게 입혀 신사 참배를 시
“소나무 숲 사이에 핀 잔잔한 들국화 한 송이 꺾어 내려오는 쓸쓸한 저녁”-牟田口龜代- “북한산 산마루에 흰 구름 비추니 오늘은 맑겠구나” -久保靜湖- 위 노래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이치야마(市山盛雄) 씨가 펴낸 조선풍토가집에 나오는 일본의 단가(短歌)이다. 이 노래집에는 816명이 조선을 다녀가면서 읊은 노래들이 실려 있는데 온돌, 한약방, 주막, 고려자기, 무녀, 기생, 양반, 조선요리와 같은 조선의 풍속에 관련된 노래가 있는가 하면 쑥, 무궁화, 소나무, 작약, 조선인삼 같은 식물류와 까치, 학, 매, 뻐꾸기, 호랑이 같은 동물류도 노래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땅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바를 노래로 기록해두고 있다. “내가 조선을 회고하건대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맑고 투명한 하늘의 아름다움이다. 그 중에서도 남선(조선을 남북으로 볼 때 남쪽)의 하늘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빛이다.”라고 와카야마(若山喜志子) 씨는 서문에서 조선에 대한 인상을 쓰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매력에 빠져 여러 번 조선 땅을 밟았다는 사람도 있다. 1936년이라면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 된 지 26년째로 조
이이오겐시 씨가 쓴 “최을순 상신서” “재판관님. 저는 본국(한국)으로의 송환을 기다리며 오무라(大村) 입국자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주부입니다. 본적은 조선 경상남도 함안군이고, 이름은 최을순(30세)이라 합니다. 제가 귀국(일본)에 불법 입국하게 된 것은 쇼와(昭和 32년, 1957년) 5월 열여섯의 나이였을 때입니다. 일본에서 살아온 남편이나 저, 그리고 제 부모님이나 형제가 귀국과 연관된 것들에 대해 재판장님께서 제 이야기를 직접 들어주셨으면 하여, 반년 이상 살아온 수용소의 다다미방에서 썩 능숙하지는 않지만 일본어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서른 살의 최을순은 세 살과 한 살짜리 아기엄마였다. 180여 일을 눅진 다다미방에서 강제 송환이라는 절차를 기다리며 오죽 답답했으면 재판관에게 자신의 심경을 써 내려갔을까? 최을순의 변론을 맡은 시미즈 변호사는 이런 사건을 전적으로 도맡다시피 한 변호사이다. 그의 책상에는 언제나 수북하게 이러한 사연이 쌓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찡그리는 적이 없다. “독(毒)도 약(藥)도 되지 않는 외국인은 모두 돌려보낼 생각이다. 그게 우리나라의 정책이니까. ‘외국인은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자유’”라고 당당히 말하는
10월 22일 교토의 시대마츠리와 백제왕비 고야신립 10월 22일은 교토 3대 마츠리의 하나인 지다이마츠리(時代祭) 날이다. 화려한 고대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교토 시내를 두어 시간 행진하는 이날은 일본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느라 부산하다. 일본을 알려면 마츠리를 알아야 하고 마츠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일본 교토의 3대 마츠리 중 하나쯤은 보아야 마츠리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라도 잡을 것이다.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에 당할 것이 없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다만,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가장 그 역사가 짧은 것은 지다이마츠리로 1895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116년 째를 맞이한다. 지다이마츠리 행렬은 교토 어소(御所)를 낮 12시에 출발하여 가라스마도오리 등 시내 4∼5킬로 구간을 행진한 뒤 헤이안신궁(平安神宮)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헤이안-가마쿠라-무로마치-안도모모야마-에도-메이지시대의 옷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의 행렬이 볼만하다. 헤이안신궁은 백제여인 고야신립이 낳은 제50대 간무왕(桓武天皇)을 모시는 사당으
엊그제 10월 9일은 565돌 한글날이었다. 한글을 만든 지 이만한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본문자인 ‘가나문자’는 언제 생겼을까? 나는 종종 일본어 첫 걸음마 교실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일본문자가 언제 만들어졌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더러는 제대로 알고 답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개는 묵묵부답이다. 그럴 때 나는 객관식으로 고르라고 다음과 같은 문항을 만든다. ①에도시대 ②메이지시대 ③가마쿠라시대 ④헤이안시대 4지 선다형이라고 답이 쉬운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들은 일본문자가 메이지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답을 하는 학생도 있다. 메이지시대라면 1868년이다. 물론 정답은 헤이안시대(794-1192)이다. 한글처럼 만든 사람과 만든 날짜, 만든 목적이 뚜렷한 글자는 지구상에 없다. 영어도 그렇고 중국어, 일본어 또한 누가, 왜, 언제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한글날처럼 ‘가나의 날’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보통 가나의 출현을 10세기로 잡는다. 배우기도 어렵고 쓰기도 복잡한 한자는 일본인들에게 불편한 문자였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복잡한 한자의 획을 떼어버리고 편리한 부분만을 취해 둥글게 굴리기도 하고 눕히기도 하고 흘려 쓰기도 하여 만든 것이
"148살 짜리 왕이 있다" 는 일본왕실 스케치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꿈이다. 그래서 장수를 위해 별의별 것을 다 구해 먹는가 하면 제약회사들은 장수를 위한 약을 개발하려고 안간힘이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 장수라고 해도 100살을 넘기는 일은 쉽지 않다. 기록상의 장수 인물을 보면 로버트 테일러(1764-1898) 라는 영국사람으로 무려 134살을 살다 갔다고 한다. 그의 장수에 빅토리아 여왕은 "희유(希有)의 장수를 축하하여,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로버트 테일러에게"라는 서명이 담긴 여왕의 초상화를 선물했는데 일설에는 이 선물을 받고 감격한 나머지 세상을 뜨고 말았다니 웃어야 할 일인지 안타까워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금세기도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이웃나라에 100살을 훨씬 넘긴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니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다름 아닌 일본 왕(천황)들의 수명이다. 1대 왕인 진무왕은 127살, 5대 효소왕은 114살, 6대 효안왕은137살, 7대 효령왕은 128살이고 12대 경행왕은 무려 148살을 기록하고 있다. 또 16대 왕인 인덕왕도 143살까지 살다갔다니 대단한 장수 왕실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날은 더워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가운데 오카데라(岡寺, 나라현 타카이치시 아스카무라 오카 806)를 찾아가는 길은 고역이었다. 천여 년 전 백제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라면 도중에 목적지를 바꾸고 싶을 만큼 칠월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가시와라진구마에역에서 1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600엔짜리 1일자유권 버스를 타고 오카데라마에(岡寺前)에서 내려 한 십여 분 거리지만 경사진 언덕 위의 절까지 가기에는 숨이 차오른다. 절로 가는 길은 작은 승용차 하나 다니기도 버거울 만큼 좁았고 양쪽으로는 주택들이 들어 서 있었다. 한국에 그 흔한 마을버스는 아예 길이 좁아 엄두도 못 낼 곳에 오카데라는 자리하고 있었다. 절 입구에서 300엔의 입장료를 내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반긴다. 보아하니 저 밑의 아스카데라(飛鳥寺) 까지는 한국인들이 찾아 와도 이만치 떨어진 언덕에 자리한 오카데라(岡寺)를 찾는 한국인은 드물었을 듯싶다. 이곳은 사전에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면 발길을 옮길 수 없는 절이다. 서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서국 33 (西三十三箇所) 관음도량 성지 중 7번째 절이라고는 하나 우리 일행이 절을 찾았을 때는 사람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오카데라는 동